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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에스더

[스크랩] 에스더(2)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1:03

에스더(2)


6. 문예성과 주제

 6-1. 심각한 위기 안에 웃음

  앞서 살펴본 대로 에스더서의 내러티브는 한 민족의 말살이라는 위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를 우연과 음모를 통해 발전되어 나가고 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팽창주의에 의해 흡수되듯이, 우연과 음모에 의해 아하수에로 왕의 궁전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예상치 못한 이상한 사건들을 통해서 유다인들은 포로로 잡히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사악하고 기회주의적인 궁정 대신 하만의 고소와 황제의 무관심한 허락으로 인해 조직적인 유다인 말살 계획이 은밀하게 추진되고 있었다. 에스더서는 유다인 민족 말살이라는 심각한 위기를 다루면서도 스토리의 중심 전개에 따라 아이러니와 풍자와 유머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6-2. 아이러니

  앞에서 살핀대로 에스더서에는 페리페테이아(역전)의 원리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강한 아이러니가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세운 계획이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강한 아이러니는 9장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달월 곧 십이월 십 삼일은 왕의 조명을 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이 저희를 제어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제어하게 된 그 날에(에 9:1)...."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 9:22)...."

  "에스더가 왕의 앞에 나아감을 인하여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에 9:25)...."

  특히 하만은 에스더서에서 아이러니의 희생물로 등장하고 있다. 모르드개와 유다인을 멸망시키려고 했던 하만은 결국 자신의 가족과 함께 파멸하며(9.10),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했던 교수대(5:14)는 하만을 매다는 사형틀이 되고 만다(7:10). 하만의 조서는 유다인들의 재산을 강탈하도록 지시하나,(3:13), 끝내는 하만의 재산이 유다인 모르드개의 손 안에 들어가게 된다(8:2). 이렇게 보면 하만은 힘이 세고, 거만한 인간 군상의 대표로 제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만을 아이러니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그저 극적인 분위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하만이 실제 상황에 부적절한 처신을 하거나, 자기 계획과는 반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모르고,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에 우리는 극적인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단지 언어적 장식만은 아니다. 아이러니를 형성 시키는 원리는 우주적이고, 세게적이고, 인생론적이다. 아이러니는 누가 세계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자는 아하수에로 왕도, 하만 자신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연약한 자를 악한 음모로 괴롭히는 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결국 우리는 하만이 아이러니컬하게 거꾸러지는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오만한 삶으로부터 분리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6-3. 풍자

  에스더서 기자는 하만을 아이러니의 희생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들, 그 중 특별히 페르시아의 남자들에 대해 통렬한 풍자를 행사하여 우리의 웃음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와스디 왕후가 나오는 장면들은 아하수에로 왕을 바보로 만든다. 왕은 왕후 와스디를 잔치 석상에 나오도록 요청하지만, 와스디는 이를 거절한다. 왕은 진노하여 중심이 불붙는 듯 하여(1:12) 어찌할 줄 몰라 했다. 127도나 되는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는 왕이 자기 아내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와스디의 거절을 경험하고 크게 당황했고(1:15), 왕을 모시는 박사들은 페르시아 제국 내에 새로운 페니미즘이 출현 할 것을 두려워했다(1:17-18). 왕와 왕후의 가정적 불화가 무서운 속도로 구가 전체의 성 정치(sexual politics)로 비화된다. 왕의 지혜로운 박사라는 므무간은 "왕의 기색을 살피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논리를 편다.

  와스디의 거절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겨 제국의 모든 부녀들이 남편을 멸시하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왕후 와스디를 폐하는 조서와 함께, 그것을 법률로 선포하라고 간언한다. 결국 왕은 자신이 왕후를다스리지 못하면서, 전 제국에 각 백성의 문자와 방언대로 조서를 내려 남편으로 그 집을 주관하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1:21-22). 과연 한 가정에서 남편이 집안을 주관하는 일이 조서나 법률로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이러한 왕과 방백들의 모습에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가장 통렬한 풍자는 6장에서 하만에게 던져진다. 자신의 영광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멋진 각본(6:7-9)을 만든 하만은 오히려 모르드개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전락한다(6:11). 하만은 죽도록 미워하는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관을 씌우고, 왕이 타는 말에 태워 성을 돌면서, "왕이 존귀케 하기를 기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고 외치고 다녀야만 했던 것이다. 악인이 자기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진 모습은 저자와 독자를 한바탕 웃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6-4. 유머와 메시지

  에스더서의 아이러니와 풍자는 독자들에게 유머를 가져다준다. 그렇다면 이런 언어적 장치는 에스더서의 주제 표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정치적 요소나 극적 장치에 불과한가? 그렇지는 않다. 에스더서가 던져주는 풍자적인 웃음은 에스더서의 메시지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에스더서는 억압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물을 새로운 빛으로 보게 하고, 하늘의 웃음에 참여하게 만든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게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 2:4).

  결국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대적에게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게 되고, 어떻게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으며고, 어떻게 애통이 변해서 축복의 날이 되었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직접 간섭하셨던 출애굽과 같은 구원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세계에서, 어떻게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서 구원을 체험하게 되었는 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에스더식 구원 스토리는 일상적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성도들을 돌아보시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복잡하고 어려운 종교적, 윤리적 문제들이 싸여있고, 이해와 통제가 불가능한 사건들과 투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에스더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에도 하나님을 심뢰하고 금식하며 행동한 성도들의 승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기에 가장 극적인 구원의 반전을 이루었으며, 울다가 웃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6-5. 쌍과 중복

  에스더서 기자는 쌍과 중복이라는 문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이중적 언급은 에스더서 기자가 선호하는 작문 테크닉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한 작문 기법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문 테크닉은 에스더서의 주제를 표출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스(Michael Fox)는 에스더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이질적인 우연한 사건들의 집합이 아닌, "쌍으로 이루어지고 균형잡힌 대조의 연속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항목

내용

성경(1)

성경(2)

1

왕의 잔치

1:3-4

1:5-8

2

에스더의 잔치

5:1-8

7:10

3

유대인의 부림절 잔치

9:17

9:18-32

4

두 개의 왕의 신복들의 명단

1:10

1:14

5

에스더가 자신의 정체를 숨겼다는 언급

2:10

2:20

6

여자들의 두 번의 모임

2:8

2:19

7

여자들의 두 개의 궁전

2:12-14

2:12-14

8

금식 사건

4:3

4:16

9

하만이 아내와 친구들과 상담을 함

5:14

6:13

10

예정에 없던 에스더와 왕과의 만남

5:2

8:3

11

모르드개가 왕복을 입음

6:7-11

8:15

12

하만의 얼굴을 가리움

6:12

7:8

13

하만의 아들들에 대한 언급

5:11

9:6-14

14

하르보나의 출현

1:10

7:9

15

왕의 칙령

3:12-14

8:13

16

왕의 진노가 수그러짐

2:1

7:10

17

페르시아 법의 폐기 불가능성에 대한 언급

1:19

8:8

18

유다인들의 보복 가능 기간은 이틀

9:5-15

9:5-15

19

부림절 제정에 관한 편지

9:20-28

9:29-32

  위의 도표에 나오는 쌍과 중복의 요소들은 역사에 대한 균형감을 잡는데 기여하고 있다. 비록 모든 요소들이 대조를 이루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쌍과 중복의 요소는 역사에 "가하학적 균형"을 부여하는 데 충분한 기여하고 있다. 에스더서에서 전개되는 역사는 비록 악이 판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선에 의해 정복되고 있다. 악이 선에 의해 균형을 이루고, 악한 계획이 선한 계획에 의해 무산되며, 공격이 반격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결국 에스더서에 나오는 쌍과 중복은 역사의 기하학적인 균형을 잡는 문예적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7. 신학적 메시지

 7-1. 포로민들의 라이프 스타일

  에스더서는 이방의 지배 아래 살아가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그리고 있다. 유다인들은 이방 국가와 그 국가의 지배자들과 항상 적대적 관계를 맺고만 살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인들은 그들의 특성을 어떻게 보존하고 표현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이미 예레미야는 당시의 포로민들에게 이방 나라 안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며, 곧 회복된다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선동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예레미야는 포로가 된 나라에서 집을 짓고, 그 안에 살며, 정원과 과수원을 세우고, 그 산물을 먹고, 자녀들을 결혼시켜서 번성케 하여 유다 공동체가 감소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전원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생산하며 너희 아들로 아내를 취하며 너희 딸로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생산케 하여 너희로 거기서 번성하고 쇠잔하지 않게 하라(렘 29:4-6)."

  동시에 그들이 거하고 있는 도시의 안녕을 위해 기여하고, 하나님께 이를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 여기에 포로(유랑) 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이 있다. 유다 공동체와 이방의 적대적 환경 사이에 상호 의존성이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실제로 에스라-느헤미야서는 페르시아 왕들의 자애로움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들과 협조할 때에 이스라엘이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에스더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라이프 스타일의 유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모르드개는 두 환관이 모의한 왕의 암살 계획을 아하수에로 왕에게 보고함으로 왕의 목숨을 구했다(2:21-23). 이것으로 그는 왕의 역대 일기 속에 이름이 들어가게 되었고(2:23), 그의 백성이 위태롭게 되었을 때,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유력한 위치에 올랐다(6:1-2). 그의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의 행위는 그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유익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동적 유다인들의 보전과 번영에도 기여하였다. 에스더서가 아하수에로 왕과 모르드개의 권세와 지위에 대한 언급으로 끝나는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한 유다인 모르드개가 높은 지위에 올랐다는 것이 요점이 아니다. 대신에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에 의해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양자가 서로 유익을 주고 받으며, 공존하였음을 강조한다. 비록 처음에는 페르시아 왕궁이 유다인에게 큰 위험이 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페르시아 왕가의 도움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비록 다니엘서도 적대적 환경에서 이러한 삶의 스타일을 취하고 살아가야 함을 암시적으로 지지하고 있으나, 때로는 신앙인에게 적대적인 세력과의 대결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단 3:16-18). 단기적으로 보면 이런 대결로 인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단 11:33). 결국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때로는 지혜로워 보이는 권력과의 타협이 결코 그의 백성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기에 에스더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감히 아하수에로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그 앞에 나아가는 용기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에스더서는 여호와와 전통적인 여호와 종교에 충성을 보이면서도 이방 세계에서 풍요롭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7-2. 하나님의 숨겨짐

  우리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명시적 언급이 없는 것이 에스더서의 가장 큰 특색이라는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의 이름이 생략된 이유에 대해서 그 동안 여러 가지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일부 학자들은 에스더서를 마카비 시대에 기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 사이의 간격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어떤 경건한 기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언급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언뜻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다른 많은 이들도 글을 남겼는데, 그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일부 학자들은 에스더서의 사용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에스더서는 매년 부림절 때에 낭송하였는데, 부림절은 히브리인들이 지킨 절기 가운데 가장 시끄럽고 흥청거리는 절기였다. 탈무드에 보면 "부림절에는 '모르드개는 복을 받을지라'와 '하만은 저주를 받을지라'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셔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Megillah, 7b). 따라서 절기 참여한 사람들은 술에 만취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은 에스더서 기자가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 신성 모독을 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름을 생략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원래 히브리 원본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지만, 후대의 편집자가 술취한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만족할만한 설명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요란한 잔치 풍습은 후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휴이(F. B. Huey)는 하나님의 숨겨짐은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포함해서 에스더서의 등장 인물들의 의혹스런 행동들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라고 주장한다. 휴이는 에스더가 "속이지 말라"는 토라의 규정을 어기고 자신의 정체를 속인 것(레 19:11)과, 이방 왕의 아내가 되기 위해 정절을 포기한 것(참조, 신 7:3, 스 10장), 그리고 하만에게 머리를 숙이기를 거부한 모르드개의 교만이 유다인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결국에는 7만 5천인이나 되는 페르시아인을 죽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휴이는 에스더서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에스더서 기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일부 등장 인물들의 의혹스러운 행동을 설명하는 장점은 있지만 설득력은 작아 보인다. 구약의 내러티브를 통틀어 볼 때에 성경 가지가 이런 식으로 역사를 돌려서 평가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다인들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에스더서의 결론 부분에 모르드개의 영광을 얻은 것은 이러한 부정적인 주장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에스더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은 에스더서 기자가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예민한 독자라면 에스더를 읽어 가면서 그 안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스토리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도 같이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후에 오른 것이 우연이 아니며, 따라서 유다인의 구원을 위해 나설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모르드개는 만일 에스더가 이 일을 거부하면 구원이 다른 곳을 통해서 나올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밈마콤 아헬")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랍비 히브리어에서 그 곳"(함마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우회적인 용어이다. 따라서 (에 4:14)에서 언급된 "다른 곳"(밈마콤 아헬)은 하나님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에스더는 백성을 위해 개입하라는 모르드개의 요청을 받아들인 후에, 모든 수산의 유다인들을 불러모아 3일간 금식할 것을 요구하였다(4:16). 여기에서 우리는 에스더서가 겉보기와는 달리 종교적인 책인 것을 알 수 있다. 금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구약에서는 기도에는 통상 금식이 동반하기 때문이다(삼상 7:6, 삼하 12:16,22, 왕상 21:27). 심지어 하만의 아내도 하만이 모르드개 앞에서 굴욕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6:13). 더욱이 앞에서 살펴본 대로 스토리에는 정확한 타이밍과 아이러니칼한 역전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사건을 예정된 목표로 이끌고 간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성경에서는 순전한 우연(행운)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잠 16:33). 전도서에서도 "우연한" 사건들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인간 편에서 볼 때에 예측 불가능한 것일 뿐이다(전 7:14, 9;11-12, 11:5-6).

  주전 2세기에 여섯 단락이나 되는 미드라쉬적 확장이 에스더서에 첨가되었는데, 이를 보면 하나님의 개입을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첨가는 스토리의 미묘함을 빼앗아가기는 하지만, 스토리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에스더서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섭리적 간섭을 가리키는 책으로 이해되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에스더서는 삶에 대해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개입을 세심하게 찾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그렇다면 우리들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개입을 주의깊에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랫 동안 포로민으로 살면서 낙담한 유다인들은 점차 종교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다. 사방에 악과 불의가 판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그러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를 기적으로 구원하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에스더서 기자는 인간의 삶 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 방식을 주목하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깊이 개입하고 계신다. 기적적이고 극적인 일에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은 아니다. 또한 하나님은 경건한 이들의 삶뿐 아니라, 불경건한 이들의 삶 가운데도 임재하시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이전의 가치관이 계속해서 무너지며 점차 악이 성행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에스더서는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패와 악이 판치는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앤더슨은 "에스더서의 질펀한 세속성의 근저에는 하나님이 이 백성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고(3:8), 오직 언약에만 충실함을 보이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이 깔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8. 정경적 메시지

  에스더서에 언급된 구원은 유다인의 구원이며, 이로 인해 생긴 절기도 유다 절기인 부림절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림절을 지키지 않는다. 또한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악인은 유다인의 적인 하만이었다. 에스더서는 유다인의 존재를 위협하는 불안한 세계 가운데서 유다인의 생존을 축하하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다인들의 구원 이야기를 우리가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가? 루터가 매우 유다주의적인 색채가 짙다고 해서 정경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책이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8-1. 직접적인 우리의 스토리는 아님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정경의 일부로 전해지고 있는 사실은 이미 교회에 의해 이 책이 정경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경 문맥에서 에스더서가 어떤 기능을 갖느냐?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 차일즈(B. Childs)는 에스더서는 우리 스토리가 아니라 그들의 스토리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스더서는 인종적 의미에서 유다 백성의 종교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강한 정경적 보증이다. 기독교 정경에 에스더서를 포함시킨 것은 이스라엘의 개념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려는 어떤 노력이라도 억제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차일즈는 비록 에스더서가 기독교 정경의 일부이지만, 에스더서를 단순한 의미에서 "우리" 이야기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에스더서는 "우리"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스토리, 즉 민족으로서의 유다인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특정 민족으로서 유다인을 존속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주장의 의미는 무엇인가? 간략히 말해서 에스더서는 기독교 성경의 일부로서 교회가 셈족이나 유다민족을 반대하는 일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앤더슨은 에스더서가 유다 백성의 문제 즉 반셈족주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앤더슨은 다음과 같은 하만의 고소는 인류 역사에 반복되어 온 디아스포라 유다인에 대한 고소의 전형이었다고 주장한다.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 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에 3:8)."

  나치스가 유다인 600만 명의 학살 근거를 반유다주의라는 신학적 이유에서 찾았음은 이러한 경고의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웹(Webb)은 만일 기독교 독자들이 스토리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한다면, 에스더서나 모르드개 안에서가 아니라 하만과 아하수에로를 통해서라고 극단적으로 말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에는 언짢을 지 모르나, 이런 느낌이 차일즈의 논증을 거부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스더서의 기독교적 수용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 시대로 들어오면서, 부림절은 신약 어디에서도 유월절이나 제사 제도나 성전처럼 기독교적 방식으로 대치되거나 변형되어 행해진 적이 없다. 부림절은 기독교적 유비나 성취가 없는 독특한 유다의 절기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차일즈의 접근에는 기본적인 오류가 있다. 에스더서는 유다인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에스더서의 주제를 살펴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다.


 8-2. 그러나 결국은 우리의 스토리

  에스더서는 단순히 특정한 한 민족인 유다 백성의 보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을 보존하신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에스더서에 선택이라는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에스더, 모르드개, 그리고 유다인들을 구원하고 보존한 이유는 명백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2:5-6)와 율법(3:8)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의 보존과 구원이라는 주제는 구약 전체를 관통하여 신약에서 그 절정에 이르고 있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 나오는 언약들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에, 신약 시대와 그 이후의 하나님 백성은 구약의 하나님 백성의 스토리를 자신의 스토리로 수용할 수 있다.

  더욱이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우리가 처음 생각하는 것처럼 구원 역사의 주류에서 많이 벗어난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이 사건들은 이방 땅에서 일어났지만, 인도에서 에디오피아에 이르는 거대한 페르시아 127도의 대제국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의 페르시아 제국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 초강대국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하만의 계획의 성공은, 페르시아에 살던 유다인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유다인들도 포함한 모든 유다인의 종말을 의미했다. 따라서 숨겨진 하나님께서 열방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에스더서는, 구원사에서 불필요한 이야기가 아니라 중요한 부분이다.


 8-3. 끝나지 않은 갈등

  에스더서는 단지 과거 페르시아 시대에 일어났던 지나간 갈등, 단회적인 유다 민족의 생존 투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에스더서는 구속사의 다른 사건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고립된 섬이 아니다. 오히려 에스더서는 구속사의 다른 사건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이 스토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갈등을 드러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가장 심각한 갈등은 모르드개와 하만의 갈등인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아멜렉 족속과의 지속적인 갈등과 연관된다. 에스더서에 언급된 하만과 모르드개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갈등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으로 사울의 아비인 기스의 후손이며(2:5), 하만은 사울이 전쟁했던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의 자손이다(3:1, 삼상 15장). 이렇게 보면 모르드개와 하만의 갈등은 이미 출애굽 때부터 시작된 이스라엘과 아말렉간의 갈등의 후속편이요, 삼상 15장에 보고된 미완결된 과제의 해결이 되는 셈이다.

  아멜렉인들은 구속받은 이스라엘에 대항한 첫 번째 민족이었다(출 17장, 민 24:20 참조. 신 25:17-19). 따라서 이미 모세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고 말하였다(출 17:16). 이를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은 "아멜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신 25:17-19, 출 17:14, 삼상 15:23).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을 시켜 이들에게 복수하신 것이다(삼상 15장). 이때는 그들의 왕은 아각이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으며,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지 않고 산 채로 끌고 왔다. 결국 사울은 이로 인해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었으며, 왕의 자리를 잃고 말았다. 사울의 후손인 모르드개와 아각의 후손인 하만 사이의 갈등은 이스라엘과 아멜렉 족속관의 오랜 반감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 갈등은 에스더서 이야기의 수많은 세부 사항들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모르드개가 하만 앞에서 절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은 물론 유다 민족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과 아말렉간의 적대 관계 속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르드개는 하만이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각 사람이기에 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만 또한 동일한 적대감을 소유하였다. 하만은 원래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모르드개에게만 분노를 품고 있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유다인임을 알게 되자, 그는 전 유다인을 진멸시키려고 했다(3:5-6).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바로 오래 전부터 유다인과 아멜렉인들이 원수로 지내왔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해석은 좀 지나친 해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오랜 적대감을 기억하고 있는 당시의 풍습과, 당시의 정치 상황을 볼 때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찌되었든 누가 부친이든간에 이제 아각 사람 하만은 얼마 남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완전히 말살시키기 위해서 마지막 노력을 하는 세계 열국의 표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말살 계획은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인 모르드개가아각 사람 하만에게 용감히 대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는 기스의 후손(사울)과 아말렉 왕(아각)이 다시 한 번 충돌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에스더와 유다인들은 그들의 적들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을 때에 적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레이터는 이 점을 세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에 9:10,15,16). 유다인들은 단지 정당 방위를 했을 뿐이지, 이를 기회로 재산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레이터는 모르드개 당시의 유다인들은 아말렉인들에게서 탈취하기에 급급했던 사울과 똑같은 실수(삼상 15:9-19)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 것이 아닌지 생각된다. 결국 에스더서는 유다인들을 진멸시키려는 세계 열방의 노력이 어떻게 실패로 돌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에스더서 기자는 이스라엘이 세계의 여러 강대국들에게 오랫 동안 굽실거려야 했던 포로 후의 유다인들에게 에스더서를 쓰고 있다. 저자는 유다인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상, 이방의 권력에 비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있다. 우리는 에스더서가 유대교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반유대주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는 "유다인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4:14), 하나님의 선택 목적이 결코 실패하지 않으시기에 이 나라는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8-4. 현재적 상관성

  우리는 지금까지 에스더서를 우리 스토리의 일부로서 수용하는 것이 원리상 옳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에스더서를 깊이 살펴보면 여러 수준에서 에스더서의 현재적 상관성을 볼 수 있다.

  첫째, 에스더서는 포로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루는 다른 본문(예를 들면 다니엘 이야기)과 함께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에 가잘 잘 맞는 구약 나레이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유다인들과 같이 이방인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에스더서는 이런 세계 속에 적합한 라이프 스타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이방 세계 속에서 "창조적이고 풍부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에스더서는 다니엘서와 함께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인들이 여호와께 충성하고 민족 종교적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동시에 이방 세계 안에서 창조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에스더서에 나타나는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잘 맞는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매우 정상적이며, 이적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앞서 살핀대로 이러한 이적의 부재는 반드시 하나님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 숨겨진 하나님은 현상적으로는 숨겨진 것처럼 보일 때에도 사실은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계시며, 모든 것이 합혀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하신다.

  셋째,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 자체, 즉 위기로부터의 구원과 이로 인한 "샬롬"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다. 에스더서의 플롯 전개가 등장 인물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점은 에스더서의 결론에 나오는 "샬롬"이 인간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에스더 9장의 "거룩한 전쟁 모티브"들은 유다인들이 얻은 구원은 인간의 업적이 아님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수 2-6장)에 잘 나타나는 "거룩한 전쟁"을 보면 이스라엘의 적들이 전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게된다. 이에 이스라엘은 큰 노력 없이도 승리를 얻게 되었으며, 따라서 적의 물품은 하나님께 바쳐져 아무도 전리품을 취해서는 안되었다. 그런데 (에 9장)을 보면 이런 거룩한 전쟁의 모티브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전쟁 전에 이미 적들이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두려워하였다(9:3). 이에 유다인들은 손쉽게 수산성에서 800인을 죽이고, 각 도에서 무려 75,000명이나 살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들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이를 보면 유다인들이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며, 인간이 성취한 것이 아님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부림절이 예물을 주는 날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이다(9:22). 애굽에서의 구원이나 가나안 정복도 선물이었던 것을 기억하라! 에스서더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공으로 돌리기 쉬운 "작은 수준의 구원"도 역시 하나님의 선물, 즉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의 삶 전체가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에스더서는 이런 점을 우리에게 놀라운 필치와 웅변력으로 전하고 있다.

  넷째, 에스더서의 유머스러운 성격 역시 오늘 우리에게 주는 시사적인 메시지가 크다. 에스더서가 우리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모두 에스더서의 웃음에 동참하는 것이 옳다. 에스더 스토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만의 몰락을 보고 즐거워 할 것을 요구한다. 하만은 하나님의 백성이 어디로 가든지, 그들을 미워하는 열국의 미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화신이다(요 17:14). 결국 에스더서는 하만의 몰락을 즐거워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이며, 부림절기를 통해 이러한 계기를 미래로 투사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의 주권자이시며, 따라서 결국 마지막으로 웃는 사람은 군주들이나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계 18:20). 현재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의 세력을 비웃을 줄 아는 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다섯째, 에스더서와 모르드개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기하고 있다. 에스더서의 위험을 자초하는 중보, 철천지 원수가 엎드러짐, 모르드개가 승귀하여 모든 백성에게 평화를 말하는 모습 가운데, 우리는 장차 올 일들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구속 역사는 에스더서 원 독자들이 생각지도 못할 놀라운 방식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된다. 에스더서와 모르드개의 승리는 이방인과 대조되는 유다 민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 공동체의 잘못된 율법주의와 메시아니즘 가운데 표현된 거짓 희망들과 안전판들을 심판하면서 새 언약을 세우셨다. 예수님 당시 유다 공동체는 율법주의의 장벽을 높이 세우고, 자신들만이 선민이라고 믿고 이방인들을 무시하고, 유다 백성의 보전과 영광만을 보장하는 잘못된 메시아니즘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법주의의 장벽을 허물고, 잘못된 메시아니즘을 부순 후에야 비로소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형성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과 새 언약을 체결하셨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통치하셔서, 유다와 이방의 담을 무너뜨릴 그의 아들 예수의 출현을 천천히 준비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에스더서가 비종교적 언어로 기록된 심오한 종교적 스토리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숨겨진 하나님께서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을 섭리로 보호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문예 장치로 볼 수 있다. 흔히 윤리적 모호성이나 도덕적인 거리낌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는 요소도 실제로 에스더서를 심도 있게 분석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스더서가 정경의 일부로 인식되고 교회 안에서 정경으로 인정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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