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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베드로전서

[스크랩] 베드로전서 - 저자,대상,통일성,내용 및 특징,기록연대와 장소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24

베드로전서(1Peter)


Ⅰ. 저 자

본서의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1:1 전반)라고 밝혀 주고 있다. 즉, 그는 자신의 아람어 별명인 게바를 헬라어로 바꾸어 사용한 것이다(참조:마 16:18). 예수께서 붙여 주신 별명인 베드로로 더 널리 알려진(마 16:18, 막 3:16, 요 1:42. 참조:마 4:18, 8:14) 시몬(막 1:16, 마 16:17, 벧후 1:1. 참조:시므온<행 15:14>)에 대해 마태복음에는 바요나의 아들로(16:17), 요한복음에는 요한의 아들로(1:42, 21:15-17) 기록되어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는 기혼자이었고(마 8:14, 막 1:30, 눅 4:38, 고전 9:5), 동생 안드레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생활하는 어부였다(막 1:16, 21, 29). 그의 성격은 솔직하고 열정적이고(마 14:28-33, 막 8:32, 14:29-31, 47, 요 18:10) 충동적이며(마 14:28, 16:22, 17:4, 막 8:32, 10:28, 요 13:8, 18:10), 약간 변덕스러운 데(마 26:33-35, 69-73)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부름을 받은 12제자 중 으뜸이요 대변자가 되었고, 모든 사도의 목록에서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다(마 10:24, 막 3:16-19, 눅 6:14-16, 행 1:13). 그는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에 예수를 부인한 적이 있고, 또 여러 번에 걸쳐 실수하기도 하였다. 비울은 그를 가리켜, "교회의 세 기둥 가운데 한 사람"(갈 2:9)이라고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교회의 반석인 그는 64년(혹은 67년경이라는 설도 있다.)에 네로 황제의 박해로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하는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저자 자신이 베드로라고 밝힌 점(1:1)과 실루아노에게 대필시킨 것이라고 한 점(5:12)과 이 서신 마지막 문안 부분(5:13)에 언급된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고, 또 저자 곁에 "내 아들 마가"가 있다고 한 점 등으로 인해 쉽사리 받아들여졌다. 발(C. S. Ball)은 "베드로가 저자라는 사실은 1세기말부터 현대까지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C. S. Ball, p. 245. )라고 하였다.

"그런데 교회적으로 인정하는 권위 있는 경전 (Muratorian C-anon)에 그 명단이 빠졌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고 연구한 하르낙(Harnack)은 여러 가지 가설을 주장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제1세기와 제2세기 사이에 흔히 유포된 떠돌이 문헌이 아닐까? 그렇다면 서두와 결말에 인사말이 없어야 하며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익명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 본래는 인사도 이름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후대의 어떤 사람이 거기에 베드로의 이름을 앞에 붙여서 사도적 권위를 부여하여 경전으로 입적시킨 것이 아닐까 한다."( "Beare, E. P. pp. 24,-25. A von Harnack:Die Chronologie der a -ltchristlichen literatur bis Eusebius Ⅰ. pp. 451-465." in 김철손, p. 106.

) 사실 서신의 내용으로 보아 어떤 개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일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보낸 임기웅변의 편지는 아니다. 그리스도인 전반에게 보내는 보편적인 권고와 교훈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참된 은혜에 대한 '증거'(1:12)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거가 참으로 베드로에게서 온 것인지 아닌지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생애와 사상을 알아볼 만한 재료는 복음서와 사도행전 처음 부분에 얼마쯤 있는데 그나마도 충분한 재료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베드로서의 저자 문제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김철손).( 김철손, p.105. )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 "Beare, Best, Brox, Schutter, 대부분의 독일 학자들"(in I. H. Mar- shall, p. 21). "R. Perdelwitz, F. W. Beare, B. H. Streeter"(in C. S. Ball, p. 245). "G nkel, Knopf, Windish"(in E. A. Blum, p. 210. "E- ichhorn, De Wette, Baur, Schwegler, Hilgenfeld"(in B. C. Caffin, p. v). A. R. C. Leaney, p. 12. L. Goppelt, p. 7. W. Schrage, p. 24. "H. H. Cludius:1808년에 처음 주장, Riddle-Huston, F. Hauch"(in 김철손), 김철손, "베드로의 첫째 편지" in 金喆孫·朴昶環·安炳茂, 新約聖書槪論(서울:大韓基督敎書會, 1991, 22版), p.239. *J. N. D. Kelly, p. 51 베드로의 저작 설을 부인하지만, 베드로와 관련된 것으 로 생각한다. )이 내 세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고펠트(L. Goppelt)는 "이 서신의 권위 있는 권면과 증거(5:12)의 특성을 보아, 소아시아 교회들과 개인적 관계가 없는 베드로의 것으로 보기 어렵다.( L. Goppelt, p. 7. )라고 하였다.

2) 슈라게(W. Schrage)는 "무엇보다도 이 서신이 바울의 신학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베드로의 저작 설을 반대하는 결정적인 논거가 된다. 비록 베드로가 유대교의 시조는 아니라 하더라도, 유대계 그리스도를 대표하고 있는 그가 이처럼 바울로와 유사한 신학을 대변하고 있을 리가 없다."( W. Schrage, p. 24 )라고 하였다.

3) 반대자들 대다수가 내세우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서신이 바울 서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종교적 희망의 근거로 삼은 점(1:3, 20), 십자가의 수난의 의미를 강조한 점(1:2, 19, 2:24, 3:18), '믿음'과 '은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 점(1:5, 10, 13, 5:9, 10) 등을 들고 있다. 특히, 로마서 및 에베소서와 병행되는 구절이 많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서신의 저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바울 서신을 잘 아는 후대의 어떤 사람이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튀빙겐 학파에서는 본서를 바울 파와 베드로 파의 조화를 위해 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in 이상근, p. 98. ).

4) 베드로는 교양이 없고 배운 것이 없는(행 4:13) 갈릴리의 어부이다(막 1:16, 눅 5:3). 따라서, 여러 가지 문학적이고 수사학 적인 문제들을 사용하고, 매우 세련되고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한(예:1:3-12은 정교한 분사 구문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장이다.) 이 서신의 저자일 리가 없다(W. Schrage).( W. Schrage, p. 24. )

5) 이 서신의 대상자들이 거주하는 여러 지역(1:1 후반)은, 대부분 바울의 선교 지역에 해당하는 지역들인데, 베드로가 이처럼 자명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설이다(W. Schrage).( W. Schrage, p. 24 )

6) 이 서신의 저자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인용하였는데, 히브리 성서가 아니라 헬라어 성서인 70인역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헬라어를 잘 모르는 베드로가 쓴 것일 리가 없다(W. Schrage, F. W. Beare).( Ibid. "F. W. Beare"(in E. A. Blum, pp. 211-212). ) 특히, 슈라게(W. Schrage)는 "2:1 이하에는 70인역의 인용문들이 시가선(詩歌選)의 형태로 편찬되어 있다."( W. Schrage, p. 24 )라고 하였다. 베어레(Beare)는 "아마도 베드로의 헬라어 실력은, 당시 헬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개화한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정도와 시장에서 외국인들과 장사할 정도에 불과했을 것이다."( "Beare, E. P., p. 28."(in 김철손, pp. 111-112). )라고 하였다.

7) 슈라게(W. Schrage)는 "이 서신은 헬레니즘적인 정신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다(예를 들어 인간론의 경우가 그렇다. 참조:2:11)."( W. Schrage, p. 24 )라고 하였다.

8) 이 서신에는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 다. 따라서, 예수의 생애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베드로가 썼다고보기 어렵다. 물론, 예수를 직접 보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고 (1:8), 예수 그리스도와 고난을 함께 당했다는 증언을 하기는 했 으나(5:1), 충분한 것이 못 된다.( in 김철손, "베드로전서" in 全景淵·池東植·金龍玉·金喆孫, 新約 聖書槪論(서울:大韓基督敎書會, 1965, 4판), p. 310. )

9) 저자 자신이 자기 소개에서 "나는 함께 장로 된 자"(5:1)라고 하였는데, 장로와 사도가 엄밀히 구별되는 시대에 그렇게 소개한 것을 미루어 사도 베드로가 아닌 어떤 장로로 이해해야 한다.( in Ibid. )

10) 이 서신이 기록된 시대적 배경을 고찰해 보면, 로마 판도 안에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 시대는 두말할 나위 없이 도미시안(Domitian) 시대이다(92-96년). 따라서, 네로 황제 시대에 로마에서 순교했다(64년 혹은 67년)고 전해지는 베드로가 썼을 리가 없다(L. Goppelt, p. 14. "Von Zoden, Magifford).( L. Goppelt, p. 14. "Von Zoden, Magifford"(in 이상근, p. 97). ) 같은 주장을 하는 베어레(Beare)는 베드로전서에 언급되어 있는 박해를 트라얀 황제(Trajan, 98-117)의 통치 기간 중에 있었던 박해라고 한다.( "F. W. Beare"(in E. A. Blum, pp. 210-211). )

11) 외적 증거로, 이 서신이 정경으로 채택되는 데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베드로의 저작 설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일에 정말 베드로가 대필시킨 것이라면, 초대 교부들이 그 권위와 가치를 인정하여 우선적으로 정경으로 채택했을 것이다.( in 김철손, "베드로전서" in Ibid. )

특히, 슈라게(W. Schrage)는 "몇몇 주석가들은 5:12을 실마리로 삼아 소위 '대필가설'을 내세워 위에 열거된 난점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즉, 이들은 베드로가 실바노[실루아노]에게 서신 내용의 주제와 근본 원칙만을 일러주고 자필로 쓰여진 서신의 말미(5:12 이하)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독자적으로 쓰도록 하였으며 따라서 실바노는 많은 재량권을 가지고 이 과제를 수행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이 서신이 훌륭한 그리스어로 쓰여진 것과 이 서신이 바울로 서신과 유사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하며 이 서신의 배후에는 결국 사도의 권위가 있다는 주장을 고집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서 모든 난점들은 만족스럽게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바노[실루아노](사도행전에는 실라로 나옴)에 대해서 알려진 사실은 그가 사도 칙령의 전달자였으리라는 것(행 15:22, 27, 32)과 이른바 제2차 전도 여행 때 그가 바울로와 디모테오와 함께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행 15:40, 고후 1:19)과 그리고 사도행전에 따르면, 그가 예루살렘 원공동체 출신인 듯하다는 점뿐이다.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살펴볼 때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실바노[실루아노]도 이 서신의 저자로서는 적당하지 않다. 베드로와 실바노[실루아노]가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또한 '∼의 손을 빌어 보내다'(5:12)라는 말은 단지 말을 받아쓰는 서기나 서신의 전달자만을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제1세대에 속하는 어떤 사람을 이 서신의 저자로 고려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이 서신이 바울로 이후 시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처해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내적(장로 제도와 5:1을 참조하라.), 외적 상황(교회가 소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 확산되었다는 것과 전체 제국 안에 만연되어 있 었던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참조하라.)은 이러한 추측에 배치된 다. 따라서, 실바노[실루아노]가 이처럼 서신에 대해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서신의 저자 문제에 대한 많은 난점들이 그렇게 충분히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 냐하면, 그런 경우에 있어서도 대필 서신과 위조 서신간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W. Schrage, pp. 24-25. )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저작 설을 반대하는 견해 중에 색다른 견해가 있다. 이 점에 대해 레익크(B. Reicke)는 "어떤 학자들은 실루아노가 베드로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쓴 다음에 신망을 얻기 위해 베드로의 이름을 빌렸다고 주장한다"( B. Reicke, p.71. )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베드로가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베드로의 저작 설(실루아노에게 대필시킴)을 지지하는 학자들( M. Henry, p. 1001. B. C. Chapman, p. 685. J. A. Bengel, p. 725. J. Wesley, p. 299. C. R. Erdman, p. 1301. R. C. H. Lenski, p. 7. A. M. Hunter, pp. 77-80. "B n treau, Clowney, Cranfield, Grud- em, Michaels(with some hesitation)"(in I. H. Marshall, p. 21). D. H. Wheaton, p. 1236. I. H. Marshall, pp. 23-24. I. Cobbin, e -d., Barn's Notes on the New Testament, p. 1391. S. W. Paine, pp. 1441-1442. M. Bentley, p. 13. H. L. Ellison, p. 414. "E. G. S -elwyn"(in W. Barclay, p. 140). A. J. Mason, p. 385. W. Barclay, pp. 137-138. A. T. Robertson, p. 72. W. C. van Unnik, "Peter, F -irst Letter of" in IDB, Vol. 3, pp. 762-763. W. G. Moorehead, "Peter, First Letter of" in ISBE, Vol. Ⅳ, pp. 2351-2352. "Mich- aelis, Henslaw, Schneider, McNeile-Williams" in 김철손, "베드로 의 첫째 편지" in 金喆孫·朴昶環·安炳茂, op. cit., p. 238. E. F. Harrison, 新約槪論. 정성구 역(서울:세종문화사, 1966), p. 434. R. Tuck, p. 1. 米田豊, p. 545. 黑崎幸吉, p. 179. 박윤선, pp. 239-240. )이 내세우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베드로도 가이사랴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10:24-48, 11:2-17, 15:7-11),( C. S. Ball, p. 245. ) 또 안디옥에서는 이방인 교인들을 위해 일하기도 하였다(갈 2:11-14).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소아시아 교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또한 존경받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2) 베드로의 대중 연설의 내용과 십자가의 도에 관한 변증(행 14-36, 4:5-13)은, 베드로와 바울이 근본적인 면에서 신학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참조:C. S. Ball, p. 246. ) 바클레이(W. Barcl-ay)는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이 편지의 신학이 초기의 초대 교회의 신학이라는 점이다. 셀윈은(E. G. Selwyn) 이 점에 대해 상세하게 연구하여 베드로전서의 신학 사상과 사도행전 앞 부분에 기록된 베드로의 설교들에서 나타나는 신학 사상과 똑같다는 것을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하였다."( W. Barclay, p. 140. )라고 하였다.

그러나, 단순한 바울 신학이나 바울 서신의 발췌, 또는 요약은 아니다. 이 서신에는 그리스도와 교인간의 신비적인 연합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고, 또 "바울의 중심 사상인 신앙 의인 사상(信仰義認思想), 하나님의 자유 의지 사상(自由意志思想), 반율법 사상(反律法思想) 등이 결여되어 있다"(김철손).( 김철손, p. 312. ) 그 반면에 카핀(B. C. Caffin)이 지적하는바 "영의 세계에 있어서 주의 설교와 같은 것들이 있다. 즉, 요한계시록의 특징이기도 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제사직, 노아의 대홍수를 세례에 비유하는 것, 사라를 그리스도인 아내의 본으로 언급하는 것, 옛 예언의 제시, 구속 행위에 대한 천사들의 관심[이 점은 바울 서신에도 나옴], 이교도를 확신시키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거룩의 시행 등"( B. C. Caffin, p. v-vi. )의 독특한 사상이 들어 있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를 바울 신학, 또는 바울 서신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어떤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 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헌터(A. M. Hunter)처럼, 근본적인 면에서 바울 신학과 일치하는 베드로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A. M. Hunter, p. 79. )

3) 로마서와 에베소서 그리고 데살로니가전·후서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지만, 그것이 베드로가 아닌 후대 사람의 저작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베드로가 그 서신들을 알았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참조:벧후 3:15-16). 더욱이, 널리 인정되고 있는 것처럼, 에베소서는 소아시아 교회들이 돌려보도록 한 회람 서신이다. 또, 베드로와 바울의 신앙 및 신학이 근본적으로 같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게다가 대필자로 알려진 실루아노는 여러 해 동안 바울의 동반자였다. 그 밖에도 두 사도가 같은 구두 전승에 근거하여 기록했기 때문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참조:B. C. Caffin, p. v. E. A. Blum, pp. 211. W. Barclay, pp. 14 2-143. )

4) 베드로 자신은 헬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의 글을 대필한 실루아노는 달랐을 것이다.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행 16:37) 실루아노는, 본래 예루살렘 모교회의 교인으로서 사도 회의가 끝난 뒤에, 안디옥 교회로 공문을 전달하는 일에 공동 대표로 파송된 적이 있었다. 그때에 동행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바사바라 하는 유다였다(행 15:22). 그 뒤에 그는 바울의 동역자로 활동하면서, 디모데와 함께 바울이 데살로니가서를 기록하는 데 보조 역할도 하였다(살전 1:1, 살후 1:1). 그러므로 언제 그가 베드로와 동행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바울 서신과 비슷한 필치를 나타낼 수 있었다.( 참조:B. Reicke, p. 70. )

그리고 베드로는 두 나라 말을 사용하던 갈릴리 어부였고(A. M. Stibbs, R. C. H. Lenski, A. J. Mason),( A. M. Stibbs, p. 24. R. C. H. Lenski, p. 8. A. J. Mason, p.385. ) 사도가 된 뒤에 여러 지방을 순회하였으며, 말년에는 로마에서 순교를 당한 사 람이라 헬라어와 문학에 약간의 재능은 있었을 것이다(A. M. S-tibbs, B. Reicke).( A. M. Stibbs, p. 25. B. Reicke, p. 70. ) 그를 소박하고 무지한 갈릴리 어부로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오순절 경험을 치르고 난 뒤에 한 대중 연설(행 2:14-36)의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다. 이 서신의 문체와 표현 방법이 어느 정도 이 연설과 유사점이 있다(B. C. Caffin, 김철손).( B. C. Caffin, p. iii. 김철손, "베드로전서" in Ibid., p. 311. ) 또, 그가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의 문중 그리고 관원과 서기관들 앞에서, 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변증했을 때, 그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행 4:5-13). 그처럼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바울의 변증은 서신의 문체와 표현 방법에도 나타나고 있다(E. G. Selwyn).( E. G. Selwyn, "The First Epistle of St. Peter", pp. 33-36, in E. F. Harrison, 新約槪論. 정성구 역(서울:세종문화사, 1966), p. 434.. )

레익크(B. Reicke)는 "원칙적으로 그 묘사로부터 베드로를 제외시킬 수는 없다. 베드로와의 관계가 없었더라면, 실루아노는 자기의 이름이나 스승인 바울의 이름으로 썼을 것이다. 이 서신이 베드로가 죽기 전에 구성되었다고 가정한다면, 대사도의 인정과 동의, 또는 직접적인 요청으로 쓰여졌을 것이라고 믿는 게 자연스럽다."( B. Reicke, p. 71. )라고 주목할 만한 주장을 하고 있다.

5) 이 서신의 저자가 70인역을 알고 인용했다는 사실은, 실루아노가 대필한 것이 사실이라면, 베드로 저작 설을 반대할 결정적인 이유가 될 수 없다. 블럼(E. A. Blum)은 "베드로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유창하게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가를 결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헬라어는 중동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었던 사 람은 70인역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E. A. Blum, p. 212. )라고 하였다.

6) 이 서신에는 헬레니즘적 정신의 영향보다는 유대교적 정신 의 영향이 더 많다. 그러나, 서신 전체에 흐르는 내용은, 박해 아래 있는 교인들에 대한 십자가의 도에 근거한 교훈과 권면 그리고 위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주석할 때에 더욱 자세하게 드러날 것이다.

7) 예수의 행적과 교훈에 대한 내용이 빈약하다는 지적은 서신의 동기와 목적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내용이 빈약하다고는 하나, 저자 자신이 예수를 만나 보았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고(1:8), 변화산의 신령한 경험을 시사하는 내용(5:1)도 있다. 그리고 교훈 가운데 겸손의 덕(5:5) 및 고난과 인내(2:21-24)는, 예수의 교훈에서 비롯되었거나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근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본문 중에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하는 구절과 낱말이 많이 나타난다(벧전 1:18 마 20:28, 막 10:45, 벧전 1:19 요 1:29, 벧전 1:2022 요 13:34, 벧전 2:7 마 21:42, 막 12:10, 눅 20:17, 벧전 2:5 마 16:18, 2:12 눅 19:44, 벧전 2:15 막 1:25, 4:39, 벧전 2:19 눅 6:32, 마 5:39, 벧전 2:21 요 13:15, 벧전 2:25, 5:4 마 9:36, 18:12, 13, 요 10장, 벧전 3:19 마 5:39, 10, 벧전 3:20 마 24:37, 38, 벧전 4:10 눅 12:42, 벧전 4:11, 13, 13 마 5:16, 12, 10, 벧전 4:19 눅 23:46, 벧전 5: 2 요 21:16, 벧전 5:3 마 20:25, 벧전 5:5 요 13:3-5, 벧전 5:7, 8, 9 마 6:25, 28, 5:25, 7:25, 벧전 4:14 마 5:11).( 참조:A. M. Hunter, p. 79. B. C. Caffin, p. ii. I. H. Marshall, p. 23. C. S. Ball, p. 246. )

8) 저자 자신이 장로라고 소개한 것은 베드로 저작 설을 반대할 이유가 될 수 없다. 당시에는 장로라는 말의 개념이 교회 안에서는 연장자라는 의미도 있었기 때문이다(김철손).( 김철손, "베드로전서" in 全景淵·池東植·金龍玉·金喆孫, op. cit., p. 312. )

9) 당시의 박해를 꼭 도미시안 황제 시대나 트라얀 황제 시대로 못박을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없다. 예루살렘 교회이든 이방 교회이든 간에 초대 교회는 대체로 곳곳에서 박해를 받고 있었 다.( 참조:A. M. Hunter, p. 79. I. H. Marshall, p. 23. E. F. Harrison, Ibid., p. 437. 김철손, "베드로전서" in Ibid. ) 더욱이, 카핀(B. G. Caffin)이 잘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서신은 로마의 행정 장관들이 기독교를 뿌리뽑기 위해 어떤 조직적인 노력을 했다는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B. C. Caffin, p. vi. )

10) 마샬(I. H. Marshall)은 "후대에 쓴 것이라는 표가 없다. 즉, 초기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의 위험과 악의 있는 짐승과 같은 특성을 가진 국가와 베드로의 죽음 후의 공포에 대한 흔적에 관한 언급이 없다."( I. H. Marshall, p. 23. )라고 하였다.

11) 베드로의 저작 설(대필자는 실루아노)을 주장하는 렌스키(R. C. H. Lenski)는, 위작자가 대부분 바울에 의해 설립된 이방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왜 베드로의 이름을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또, 그는 위작자가 베드로를 바울의 조수들인 실루아노와 마가에게 관련지을 생각을 해야만 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한다.( R. C. H. Lenski, pp. 7-8. )

12) 렌스키(R. C. H. Lenski)는 위조 편지에서 언급된 다섯 지역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모든 교회가 후대의 위작자에게 기만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Ibid., p. 8. )

13) 정경화의 과정에서 어려움이 많았다는 것이 반드시 베드로 저작 설을 부인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만큼 정경화의 작업이 신중했다는 이유도 될 수 있다.

14)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편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재림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과 감독[딤전 3:1, 2, 딛 1:7]이나 집사[롬 16:1, 빌 1:1, 딤전 3:8, 10, 12, 13]의 직분에 대한 언급이 없고 장로의 직분만 언급되었다는 점을 들어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 W. Barclay, pp. 139-140.

) 특히, 저자가 삽입한 성경 구절 중에 로마서는 52―59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이고, 빌립보서는 60―64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이며,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61-66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최세창, 로마서(서울:글벗사, 1992, 재판), p. 26. 최세창, 빌립보서 (서울:글벗사, 1992, 3판), p. 41. 최세창, 디모데전·후·디도서(서 울:글벗사, 1992, 3판), p. 41. ) 따라서, 베드로전서는 비교적 상당히 이른 시기에 쓰여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 초기의 모든 교부들과 모든 문서들이 다 이 서신을 소홀히 여기거나 생략해 버린 것은 아니다. "폴리캅(Policarp, 69?-155년)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135년경. 1, 2, 8, 10장, Ante-Nicene Fathers, Eng. trans., vol. i)에서 처음으로 베드로전서를 인용하였다."( B. C. Caffin, p. iv-v. C. S. Ball, p. 77. B. W. Robinson, p. 1339. ) 파이네(S. W. Paine)는 "신약성서 학자들은 베드로전서와 바나바 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약 80년경) 사이에 병행되는 표현을 발견하였다."( S. W. Paine, p. 1442. )라고 한다.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의 글(95년경)에는 이미 이 서신에 대해 15회 이상을 언급하고 있다. …헤르마스의 세퍼드(Shepherd of Hermas),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안디옥의 테오필루스(Theophilus of Antioch) 등의 글에도 이 서신에 대한 뚜렷한 흔적이 있다."( B. C. Caffin, p. v. ) 이레니우스(Irenaeus[130?-202?, 220?년)는 자신의 편지에서 본서 1:8을 인용하였다.( S. W. Paine, p. 1442. A. J. Mason, p. 385. in 이상근, p. 98. )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 150?-213년)는 본서의 매 장에서 자유롭 게 인용하였고, 또한 본서의 주해를 썼다.( 참조:B. C. Caffin, p. v. A. J. Mason, p. 385. 이상근, p. 98. ) 터틀리안(Tertulli- an, 160-220?년)도 본서 2:8, 20, 22, 3:3, 4:12 등을 인용하였다.( 참조:B. C. Caffin, p. v. 이상근, p. 98. A. J. Mason, p. 385. ) "오리겐은 베드로전서는 결코 논박될 수 없는 권위가 있는 책 중의 하나라고 말하였다."( A. J. Mason, p. 385. ) 교회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320?, 330?])는 성서를 분류하기를 수락된 책( ), 문제 된 책( ) 및 위작( - )으로 하였고, 그 중에 본서는 요한일서와 함께 첫째로 규정하였다.( 이상근, p. 98. )

유세비우스(Eusebius)는 이 서신을 히에라폴리스(골로새 가까운 소아시아의 도시)의 감독인 파피아스(Papias:A. D. c. 60-130)가 사용했다고 한다.( 참조:A. R. C. Leaney, p. 11. B. W. Robinson, p. 1339. S. W. P- aine, p. 1442. A. J. Mason, p. 385. ) 또, 그는 베드로전서를 초기 교부들에 의해 진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받아들인다(Eccl. Hist. 3. 3).( A. R. C. Leaney, p. 7. ) 특히, 바클레이(W. Barclay)는 교부들이 이 서신에서 인용했거나 영향받은 내용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W. Barclay, pp. 141-142 )

파이네(S. W. Paine)는 "베드로전서는 페시토(Peshito)라는 시리아 역, 콥트 역, 에티피아 역, 아르메니아 역, 아랍 역에서도 발견된다."( S. W. Paine, p. 1442. )라고 하였다. 훼아톤(D. H. Wheaton)은 베드로의 저작 설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들 가운데 어느 것도 전통적인 베드로 저작설을 거절할 결정적이며 압도적인 내·외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D. H. Wheaton, p. 1236. )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레난(Renan)까지, 본서를 신약에서 가장 오래고도 가장 이의 없이 그 권위를 입증 받은 책 중의 하나로 지정하였다.( A. J. Mason, p. 385. ) 발(C. S. Ball)은 "베드로가 저자라는 사실은 1세기말부터 현대까지 교회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Charles S. Ball, p. 245. )라고 하였다. 헌터(A. M. Hunter)는 "정말로 신약성경 중에서 이 서신보다 이르고 보다 나은 증거를 가진 책은 없다. 그리고 그 증거의 힘을 흔들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A. M. Hunter, p. 77. )라고 하였다. 스팁스(A. M. Stibbs)와 헌터(A. M. Hunter)는 베드로 저작 설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주된 근거들을 면밀하게 고찰한 다음에,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작품이라고 결론지었다.( A. M. Stibbs, pp.15-57. A. M. Hunter, pp. 77-80. ) 지금까지 베드로전서는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저작이라는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 반대하는바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저작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논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실루아노가 대필한 베드로의 저작 설이 훨씬 더 유력한 내적·외적 증거가 있고, 또 훨씬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Ⅱ. 대상

이 서신은 어느 한 개인이나 어느 한 교회에 보낸 것이 아니 라,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를 제외한 소아시아 여러 주인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나그네들(1:1 후반), 즉 주로 이방인 교인들에게(1:14, 18, 2:9, 10, 3:5, 4:3) 보낸 일반 서신이다.

이 지역들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들 지명의 대부분은 옛 왕국들의 국명들과 그 명칭을 그대로 붙인 로마의 주들이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그런데도 옛 왕국과 로마의 주들이 항상 같은 지역에 걸치는 것은 아니었다. 본도는 결코 로마의 주가 된 적이 없었다. 원래는 미트라테스 왕의 왕국이었는데 일부는 비두니아에, 일부는 갈라디아에 편입되었다. 갈라디아는 원래 안키라와 페씨누스 그리고 타비움 등 세 도시가 포함된 골인들(Gauls)의 왕국이었으나, 로마인들이 브루기아, 비시디아, 루카오니아, 그리고 이사우리아 등을 포함하여 훨씬 더 넓은 행정 구역으로 확장하였다. 갑바도기아 왕국은 주후 17년에 원래의 형태 그대로 로마의 주가 되었다. 아시아는 현재의 아시아 대륙은 아니었다. 아시아는 독립된 왕국이었는데, 마지막 왕인 아탈루스(Attalus) 3세가 주전 133년에 로마에 선물로 유증하였다. 아시아는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북쪽은 비두니아, 남쪽은 리기아, 동쪽으로는 브루기아 및 갈라디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쉬운 말로 하면, 에게해 연안에 있는 소아시아의 일부였다.( W. Barclay, pp. 144-145. ) 로마의 행정 구역에 속한 그 주들은 "소아시아 북부와 중부 그리고 서부 지역에 위치했으며, 타우루스(Taurus) 산맥 북쪽 반도의 광대한 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B. Reicke). ( B. Reicke, p. 72. ) 이로 미루어, 초대 교회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소아시아 거의 전역 에 전파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놀라운 결과 는 주로 바울 사도의 선교 활동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본도와 비두니아가 이미 오래 전에 로마의 행정 구역상 하나의 주로 통합되어 '비두니아·본도'라고 불렸는데(C. Bigg),( C. Bigg, p. 70. ) 저자가 두 주로 나누어 언급한 이유가 무엇인가 함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로마의 속주인 지명들을 이상하게 열거한 의미가 무엇인가 함이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다만 소아시아의 지리적인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한 것이라는 설(W. Schrage)( W. Schrage, p. 22. )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고대의 왕국이었을 때의 명칭을 따른 것 같다는 설("Zahn",( in 이상근, p. 100. ) W. Barcl-ay( W. Barclay, p, 144. ))이 있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후자가 보다 그럴 듯 한 것 같다.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1)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소아시아의 지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 것(본도와 비두니아가 인접 지역이라는 점을 참조하라.)이라는 설(W. Schrage),( W. Schrage, p. 22. )

2) 베드로가 이 지방을 순회한 순서대로 한 것 같다는 설(Harnack,( in 김철손, p. 114. ) 김철손( 金喆孫·朴昶環·安炳茂, "베드로의 첫째 편지" in op. cit., p. 233. )),

3) 율동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라는 설(W. L. Knox),( in A. M. Stibbs, p. 64.. )

4) 본서를 보낸 로마에서의 길 순서를 따른 것이라는 설( "Hort, Selwyn"(in L. Goppelt, p. 4). J. A. Bengel, p. 45. L. Gopp- elt, p. 4. C. Bigg, pp. 69-70. A. M. Stibbs, p. 64. C. S. Ball, p. 2 48. A. M. Hunter, p. 81. W. Barclay, p, 145. ) 등이 있다.

이 서신은 에베소서와 같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돌려가며 보도록 한 회람 서신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그 중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4)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 상세한 여정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이 서신을 가지고 온 사자는 해로로 해서 먼저 본도의 항구에 상륙하고, 북부 갈라디아를 통과하여 갑바도기아에 이르고, 그 다음에 서쪽으로 향하여 아시아 주로 갔다가 북전하여 비두니아로 돌아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W. Barclay)는 여로를 약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지도를 힐끗 보아도, 실루아노로 짐작되는, 본서의 전달자가 이태리에서 배를 타고 소아시아 북동쪽의 시노페 항에 상륙하여 그 지역들을 통과하는 여행을 한다면, 다시금 시노페 항에 돌아오게 되는 순회 여행이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두니아[본도}에 있는 시노페 항에서 그는 남행하여 갈라디아로 가고, 더 남행하여 갑바도기아로 가고, 서행하여 아시아로 가고, 북행하여 다시 비두니아로 간 다음에, 동행하여 다시금 시노페 항에 도착할 것이다."( W. Barclay, p. 145. )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이 서신의 수신자들은 다양한 계층에 속해 있었다.

Ⅲ. 통일성

처음에는 베드로전서의 문학적인 통일성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율리체르(Adolf J licher)가 "베드로전서는 한 서신으로 있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자에게서] 미리 정해진 계획이 발견될 수 없다."( A. J licher, Einleitung in Das NT(fifth and sixth eds., T bingen, 1906), 176;so also A. J licher, and E. Fascher, Einleitung in D -as NT(seventh ed., T bingen, 1931), 190, in Leonhard Goppelt, p. 15. )라고 하는 바람에 서신의 내용에서 그 기원 을 찾기 시작했던 학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고펠트(L. Goppelt)는 그 서신에서 주제의 통일이 잘 발달된, 합리적 구성을 판독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였다.( L. Goppelt, p. 15 ) 대체로 두통의 서신을 누군가가 한 통의 서신으로 편집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4:11의 송영을 분기점으로 여겨 4:12―5:14을 한 통의 서신으로, 나머지 부분을 또 한 퉁의 서신으로 나눈다. 그리고 4:11까지의 서문은 1:3로, 4:12―5:14의 서문은 1:1-2로 추정하고 있다. 그와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는 가장 큰 이유는, 고난에 대한 언급이 서로 다른 상황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퍼델위치(R. Perdelwitz:1911)는 4:12-13이 그 위 부분과는 다른 공동체의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1:3-4:11에서는 고난이 장차 일어날 가능성으로 규정되어 있는 반면에, 4:12 이하에서는 고난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로 언급되어 있다는 것이다.( R. Perdelwitz(1911) in L. Goppelt, p. 16. )

또, 퍼델위치(Richard Perdelwitz:1911)는 5:12에 언급된 "간단히"와 "권하고"는 1:1f와 4:12―5:14에만 포함되고, 가혹한 핍박을 당하는 교회와 장로들 사이의 불화를 다루는 간단한 권면과 위로의 행위였다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1:3―4:11은 세례 의식을 집행할 때에 세례 받을 사람들에게 한 말을 반영해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R. Perdelwitz(1911) in L. Goppelt, p. 15. ) 프라이스커(H. Preisker)도 1:3―4:11은 세례받기 위해 모인 무리의 예배 의식에서 하는 말 같다고 하였다.( Windisch-Preisker, 156-162(quotation from 157), in L. Goppelt, p. 16. ) 크로스(F. K. Cross)도 베드로전서가 예배 의식서임을 독특한 방법으로 입증하고 있다. 고난을 자주 언급하는 것을 미끼[계기]로 하여 동 서신을 파스칼(Paschal 셈어로 pascha는 희랍어 paschein<고난 당한다>과 비슷하다.)( F. L. Cross, ⅠPeter, A Paschal Liturgy, in E. F. Harrison, op. c -it., p.430. )의 관점에서 보아야 타당하며, 또 그래야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1:3-12이 고난의 신학을 "아주 훌륭하게 요약해 놓은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다. 이 서신은 부활절 세례식이 그 기원이라고 한다. "베드로전서는 감독(Celebrant)의 입장에서 베푼 설교다. 서신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세례식이 밤새도록 계속되었음을 상기해 볼 때, 이것은 감독이 행한 장문의 기도로 볼 수밖에 없다. 제목이 나오지 않은 이상 실제 세례식 집전의 기록이 없는 것은 당 연하다."( ibid. )

위와 같은 주장에 대해 하리슨(E. F. Harrison)은 세 가지의 약점을 지적하고 있다.

1) 세례라는 말이 단 한 번밖에(3:2) 나오지 않는데, 그것도 괄호로( A. F. Walls, "First Epistle of Peter" NBD, p. 977a, in Everett. F. Harrison, Ibid. ) 나오는데도 이것을 기화로 이론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설픈 수작에 불과하다. 물론, 크로스는 세례식 장면 묘사를 뒷받침하기 위해 기타 여러 가지 물적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세례식 묘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런 제시 자료가 이 서신에 맞아 들어가는지는 의문이다. 모울(C. F. Moule)도 "제목조차 붙어 있지 않은 예식용 설교 내용을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세례식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 형식으로 그리고 성급하게 보낼 수 있겠느냐?"( C. F. D. Moule, NTS. 3(Nov. 1956),4, in E. F. Harrison, Ibid. )라고 고개를 흔든다.( E. F. Harrison, Ibid.)

또, 켈리(J. N. D. Kelly)는 위와 같은 주장을 자세히 소개한 뒤에, 그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의 세부적인 분석이나 전체적인 논지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하다고 비판한다. 그 주된 근거로 본문에 대한 그들의 주석이 무리하고 부자연스럽다는 점과, 그러한 주석이 그들의 광범위한 추론들을 거의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그들의 논증 전체가 전제로 삼는 가정―침례가 1:21 직후에 일어난다는 것―은 1:3 이하에서 언급되는 사람들이 이미 세 례를 받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1:22에서의 시제들의 변화(1:3에서의 부정 과거를 참조하라.)를 부당하게 강조하는 데서 기인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J. N. D. Kelly, pp. 32-35. )

2) 토른톤(T. C. G. Thornton)의 주장처럼( T. C. G. Thornton, "ⅠPeter, a Paschal Liturgy?" in JTS, 12(4월 호, 1961), 16, in Ibid. ) 고난 예찬과 실 제 고난의 상호 관계는 Pascha-paschein 어법에 능수 능란한 솜씨를 발휘한 2세기 저자들의 경우에나 나오는 것이지, 1세기에는 전혀 취급되지 않은 문제였던 것이다.( E. F. Harrison, Ibid )

3) 고난의 문제를 전제하고 쓰여졌다는 4:12―5:14이 문체와 어휘의 성격으로 보아 1:1-2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데 대해서이렇다할 설명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4:12―5:14을 서자 취급하는 것은 확실히 말해서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R. P. Martin, "The Composition of ⅠPeter in Recent Study," in Vox Evangelica, 1962, p. 39, in E. F. Harrison, Ibid., p. 431. )는 마틴(R. P. Martin)의 주장은 재음미할 만한 것이다.( E. F. Harrison, Ibid., pp. 430-431. )

한편, 베드로전서의 세례식과 관련된 구절은, 고난과 박해받은 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삽입된 하나의 변두리에 속하는 것이라는 셀윈(E. G. Selwyn)의 주장은 더욱 타당한 논리인 것 같다. 그 는 소위 양식 비판 방법을 활용하여 이같은 결론을 내림으로써,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는 으레 신조 강좌, 찬송 및 교리 문답 등의 단계를 부여했다는 주장을 펼 수 있는 것이다. ( E. G. Selwin, The First Epistle of St Peter, 특히 Ⅱ장의 베드로 전서와 신약의 타 서신들 항목 참조(pp. 365-366), in Ibid., 431. ) 이같은 방법론은 원시 기독교 교리 문답서(The Primitive# C-hristian Catechism)를 저술한 필립 캐링턴(Phillip Carrington)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런 양식 비판의 입장에서 보면, 여러 서 신마다 해당된 주제가 나오기 마련인데(비슷하기도 하며, 때로는 똑같은 용어가 나오기도 하는데), 주제가 비슷하다 하여 어느 한 서신이 다른 서신을 바탕으로 쓴 것이라는 논리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각기 당시 교회 전체에 널리 퍼져 활용되었던 공동의 자료를 자기 나름대로 이용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E. F. Harrison, Ibid. ) 1:3―4:11은 본래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것 같다고 하는 슈라게(W. Schrage)는, "두 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이 서신이 동일한 저자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일관성이 있는 용어들과 주제들이 이를 입증해 준다(예를 들면, 1:6과 4:12에는 '유혹'이란 말이 언급되어 있고, 1:7과 5:1에는 계시와 영광이 결합되어 있으며, 1:8과 4:13은 미래의 기쁜 환호를 다루고 있으며, 3:17과 4:19은 하느님의 뜻에 의한 고난을, 그리고 3:14과 4:14은 고난 당하는 자들에 대한 축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W. Schrage, p. 20. )라고 주장한다. 이어서 그는 "1:3-4:11에서는 고난이 장차 일어날 수 가능성으로 규정되어 있는 데 반해, 4:12 이하에서는 고난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실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나 흔히 이 차이점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1:3―4:11에도 고난과 박해의 체험들이 언급되어 있으며(1:6, 2:12, 3:16, 4:1, 4), 두 번째로 '고난'에 대해 앞부분에서 언급된 진술들이 4:12 이하에서 또다시 나오고 있 기 때문이다(특히, 4:13의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용어는 2:21 이하와 3:18 이하로 소급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W. Schrage, pp. 20-21. ) 문체 및 근본 주제의 통일성 문제에 대해서 그는, "이 서신이 문체와 근본 주제에 있어서 대체적으로 통일성을 보이고 있음에 도 불구하고 그 안에 개별적인 긴장이 발견되는 이유는, 그 구성에 있어서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으며(참조:6절) 상호 모순되는 전승들이 수용되어 있기 때문이다(즉,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 위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전승 적인 기대가 언급되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주의적인 입장이 언급되어 있다:2:12, 2:14-15, 3:1―,2:13 내지는 2:19-20, 3:9, 16, 4:4, 15, 5:9-10). 고난을 가상적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 권면은 주변 사람들의 관대한 태도에 의해 선한 행위가 존경을 받으리라는 희망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2:14과 3:13-14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그렇지만 이 서신에는 또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론에 의거하여 인식되고 현실을 통해 입증된 또 다른 통찰이 나란히 병존하는데 그것은 선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W. Schrage, p. 21. )라고 하는데, 구성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수용된 전승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의 윤리적 행위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반드시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 반응은 아닌 것이다. 종교인의 선행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면서도 그의 종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거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 문체와 통일성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논한 슈라게(Wolfgang Schrage)는, "어쨌든, 1:4―4:11이 본래는 다른 상황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저자는 이 부분을 받아 들이면서 자신이 처한 새로운 상황에 맞게 변형했을 것이다."라 고 결론지었다. 켈리(J. N. D. Kelly)는 자세한 논의 끝에 "우리는 본 서신이 하나의 일관된 메시지를 담은 진정한 단일체이며, 또한 언제나 단일체였다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인사말에서 명명

된 교회들에게 보낸 실제적인 편지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J. N. D. Kelly, p. 37. )라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와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대필자는 실루아노)라는 사실(Ⅰ. '저자'를 보라)로 미루어, 전승들을 바탕으로 한 통일된 한 통의 서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Ⅳ. 내용 및 특징

이 서신의 내용 및 특징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알아야 할 것이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시대에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과 유대 민중들의 박해를 받고 있었다(행 8:1-3). 또한,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던 바울이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후에,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많은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들 역시 그 지역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핍박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판도, 특히 로마에서는 대대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로마에서의 박해에 대해서는 W. Barclay, pp. 146-150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이 서신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러한 상황을 잘 아는 베드로는 박해 아래 있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강하게 할"(A. T. Robertson)( A. T. Robertson, p. 75. ) 목적으로 이 서신을 썼다. 즉, 신자의 고난이란 말세의 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복이요, 주의 고난을 본받는 길이요, 영원한 영광을 위한 고난인 줄 알고 잘 견디라는 것이다. 더욱이, 주의 재림이 멀지 않은 점을 강조해 주고 있다.

이 서신을 쓴 둘째 목적은, 교인들의 내적 성결을 위한 것이 다. 즉, 박해자들을 원망하거나 미워할지도 모를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를 믿어 구원받은 거룩한 자답게 복음을 좇아 사랑을 힘쓰고, 복음 선교를 위해 박해자들을 선대하라고 권하기 위한 것이다.

셋째 목적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주를 믿는 자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에 대해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즉, 신자의 사회 생활과 가정 생활 그리고 교회 생활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 교훈의 요지는 선교를 위한 위정자들에 대한 순복과, 복음을 따른 거룩과 사랑 그리고 소망의 인내라 할 수 있다.

이 서신의 내용에 대해서는 차례의 제2부 내용 분해에 자세하게 썼고, 또 본문을 상세하게 주석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이 서신의 특징만을 설명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1) 이 서신은 내용이나 문체 또는 용어 등에 있어서 히브리서와 야고보서, 특히 바울 서신들과 매우 비슷하다.

2) 이 서신의 신학은 근본적인 면에서 바울 신학과 일치한다. 이 두 가지 점에 대해서는 이미 '저자' 문제를 다루면서 자세하게 논하였다.

3) 이 서신은 공동 서신에 속한다.( 공동서신은 야고보서,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등이다. 공동 서신(Catholic Epistles)이란 명칭 은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사용되었다. 이 명칭 외에도 정경 서신 (Canonic Epistles), 사도 서신(Apostolic Epistles), 일반 서신(Gen- eral Epistles) 등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서신은 점차로 성경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전체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으므로 공동 서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W. Barclay, p. 137. )라고 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아마도 공동서신 중에서는 베드로전서가 가장 잘 알려지고, 사랑 받고, 읽혀지는 것이 사실 일 것이다."( Ibid., p. 138. )라고 하였다

4) 이 서신은 히브리서와 요한 계시록과 함께 박해 시대의 산 물로, 특수한 시대의 필연적인 요청에 의해서 저술된 또 하나의 특수 문학이다.( 김철손, p. 100. ) 키이(Kee)는 본서를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과 함께 신약의 박해 문학이라고 하였다.( Kee & Young, Understanding N. T. p. 335, in 김철손, p. 102. ) 굳스피드(E. J. Go-odspeed)는 "베드로전서는 박해 문학 중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in W. Barclay, p. 138. )라고 하였다.

5) 모펫(Moffatt)은 "이 서신의 요지는 행동에 있어서는 확고한 인내이고, 성품에 있어서는 순결이다."( Ibid. )라고 하였다.

6) 이 서신의 내용상의 특징은 현재 박해 아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심한 박해를 받을 교인들에 대한 주께 근거한 위로와 격려이다.

7) 이 서신의 특유의 특징은 '따뜻함'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Ibid. )

8) 이 서신은 바울의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등에 비해서 교의학적인 이론이 빈약하다. 그래서, 모펫(Moffatt)은 바울의 신앙과 신비주의, 종말론과 칭의 사상이 모두 상실되었다고 하였다.( Moffatt, G. E. p. 86, in 김철손, p. 100. ) 또, 히브리서에 비해서 종교적 사변의 깊이가 너무 천박한 감이 있고, 실천적인 교훈에 있어서는 야고보서나 목회 서신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루터가 이 서신을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들과 함께 '우리가 마땅히 으뜸가는[뛰어난] 책으로 간주해야 할 책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핵심이요 정수가 되는 책이라고 한 것( "Vorreder zum NT, 1522" in W. Schrage, p. 17. )은 과대 평가라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바클레이(W. Barclay)의 말대로, "이 서신은 오늘날까지도 더할 나위 없이 읽기 쉬운 서신 중 하나인데, 그 까닭은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호소력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W. Barclay, p. 138. )

Ⅴ. 기록 연대와 장소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본서의 저자가 베드로냐 아니냐에 따라서 기록 장소, 특히 기록 연대가 달라질 수 있고, 또 본서가 통일된 서신이냐 아니냐, 아닐 경우 누군가가 한 저자가 쓴 두 통의 서신을 합친 것이냐, 아니면 두 저자의 두 편지를 합친 것이냐에 따라서 기록 연대와 장소가 달라질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충분한 논의 끝에, 이 서신의 저자가 베드로(대필자:실루아노)이고, 또 서신은 본래부터 통일된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따라서, 이 서신의 기록 연대는 대충 베드로의 순교 전으로 볼 수 있고, 기록 장소는 베드로가 만년에 있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의 마무리 단계에서,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벧전 5:13)라고 한 인사말 속에 이 서신을 쓴 곳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문제는 그 바벨론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인가 함이다. 이 문제에 대해 1) 앗수리아의 바벨론이라는 설,( J. Calvin, p. 228. J. A. Bengel, p. 759. "Drusius, Wetstein, Bas- nage, Beausobre 등"(in A. Barnes, p. 1393). H. Alford, p. 1393. A. Barnes, p. 1393. "Erasmus, Hort, Weiss, Mayor, Thiessen"(in 이상근, p.103). )

2) 카이로의 북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조그만 마을인 애굽의 바벨론, 또는 카이로의 옛 이름이라는 설,( "Pearson, Le Cler, 대다수의 콥트 교회의 주석가들"(in A. Barnes, p. 1392). ) 3) 예루살렘 이라는 설,( "Capellus, Spanheim, Hardouin 등"(A. Barnes, p. 1393), ) 4)로마라는 설( "Papias, Clement of Alexandria, Jerome"(in B. C. Caffin, p. ix) "많은 교부들, Bede, Valesius, Grotius, Cave, Whitby, Lardner"(i -n A. Barnes, p. 1393), S. W. Paine, p. 1442. C. Bigg, p. 87. W. Schrage, p. 23. R. C. H. Lenski, p. 11. "Origen, Dionysius, Ter- tullian, Lightfoot, Hart"(in 이상근, p. 103), E. A. Blum, p. 212. A. M. Hunter, p. 80. L. Goppelt, p. 48. C. S. Ball, p. 247. D. H. Wheaton, 1237. J. N. D. Kelly, p. 52. ) 등이 있다.

1)설은 팔레스틴의 동북쪽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번영했던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인 바벨론에서 썼다고 하는 것이다. 고대의 바벨론은 주전 605년 이래 느브갓네살 2세 때부터 유대인들을 납치해 간 사실이 있고,( 김철손, p. 118. ) 또한 "포로기(주전 586년) 이후 유대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므로(Agrippa's letter to Emperor Caius in Philo), 베드로가 여기에 와서 전도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이상근, p. 103. ) 윌리암즈(N. M. Williams)는 바벨론 칼대아(Chaldea)에서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 in 김철손, p. 119. )

그러나, 이 학설에는 두 가지의 약점이 있다.

첫째, 요세푸스의 고대사에 의하면 주후 40년경에 카리큐라 황제가 바벨론 지방의 유대인들을 엄청나게 학살하는 바람에 그 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것이다.( S. W. Paine, p. 1442. ) 게다가 "5년 후에는 대역병이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김철손, p. 119. )

둘째, 이 지방에 도마가 갔다고 하는 믿을 만한 전설은 있으나,( 이상근, p. 103. ) 베드로가 갔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A. M. Hunter, p. 80. C. S. Ball, p. 247. ) 설령, 베드로가 간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 그 이유는 이 서신을 대필한 실루아노와 마무리 인사말에 언급된 마가까지 함께 간 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R. C. H. Lenski, p. 10. )

2)설은 현재의 카이로의 북동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애굽의 바벨론, 또는 카이로의 옛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이곳에 유대인들이 이주했다는 점과 애굽에 고대 교회(Coptic Church) 가 있었다는 점,( 이상근, p. 103. ) 그리고 마가가 애굽에 가서 전도하였고,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감독이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는 점과 현재 그의 무덤이 그 항구 가까운 곳에 있는 대바우칼리스교회에 있다는 점( "Eus. H. E. ii. 16. Ⅰ;Epiph. Haer. li. 6;Jerome, de Vir. Ill. 8." in C. Bigg, p. 83. ) 등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 학설에 대해 비그(C. Bigg)는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교의 Clementine Homilies(i. 8)에는 애굽 교회는 마가가 아니라, 바나바가 세운 것이라는 옛 견해가 있다."( C. Bigg, p. 83. )라고 하였고, 파이네(S. W. Paine)는 "베드로가 그 곳에 갔다고 하는 전통적인 지지가 없다."( S. W. Paine, p. 1442. )라고 하였다.

3)설은 이 서신의 바벨론을 바벨론의 사악성을 닮은 예루살렘을 상징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학설에 대해 반즈(A. Barnes)는 네 가지의 타당한 이유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 첫째, 바벨론이란 이름이 일찍이 예루살렘에 적용된 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고, 또 예루살렘이 바벨론이란 용어가 의미하는바 사악한 곳으로 이해된 적도 없다. 둘째, 사도가 쓴 장소를 언급할 것이었다면, 실제의 지명을 썼을 것이다. 셋째, 바벨론이란 사도가 예루살렘에 적용하고 싶어할 만한 명칭이 아니다. 넷째, 만일 서신이 예루살렘에서 쓰여졌다면, 그 지명을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 A. Barnes, p. 1393. )

4)설은 바벨론을 로마를 상징하는 별명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학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파피아스(Papias), 유세비우스(Eusebius), 제롬(Jerome) 등이 그렇게 증거하였다는 점, 그 당시에는 바벨론이 붕괴되었다는 점, 베드로가 만년을 로마에서 보냈다는 수많은 전설과 부합된다는 점 등이다.( in A. Barnes, p. 1393. ) 비그(C. Bigg)는 하르낙(Harnack)이 베드로가 클라디우스의 통치 때까지는, 말하자면 54년 이전에는 로마를 방문했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확실히 이 견해는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C. Bigg, p. 87. ) 54년 이전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나,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었으리라 는 추측은 받아들일 만 하다. 그 밖에도 비그(C. Bigg)는 "로마서는 사실상 변증서이고, 베드로전서에서 발견되는 교리 형태의 선재를 의미하는 것 같다."( C. Bigg, p. 87. )라고 하였다. 또, 이 서신을 대필한 실루아노와 곁에 있는 마가(5:12-13)가 다같이 바울과도 깊은 관련이 있어, 전자는 바울과 전도 여행에 동행하였고(행 15:22, 40, 16:19, 17:4), 후자는 바울의 만년에 로마에서 같이 있었다(골 4:10, 몬 24).

위의 근거들보다 더 유력한 근거는, 성경의 계시 문학에서는 흔히 상징적 이름을 썼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을 가리켜, 요한은 "소돔 또는 애굽"(계 11:8)이라 하였고, 바울은 "시내산"(갈 4:25)이라고 하였다. 역사가인 유세비어스도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 비유적인 호칭이었다고 전하고 있다(Eusebius, H. E. ii. 15).( in 이상근, p. 104. ) 슈라게(W. Schrage)는 "5:13에 언급된 바벨론 은 로마의 별명 내지 가명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불경한 바벨론과 마찬가지로(참조:사 13장, 43:14, 렘 50-51장) 바벨론은 묵시 문학에서 제국의 수도를 가리 키는 가명이다(4Esr. 3:28-29, syr. Bar. 67:7 등등, 묵시 14:8, 16 -18장). 묵시 문학은 이러한 가명을 통해서 이 수도의 악마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심판 때 이들의 타락상이 폭로되리라는 것을 시사하였다."( W. Schrage), p. 23. )라고 하였다. 로벋손(A. T. Robertson)은 "우리는 언제 로마가 바벨론으로 일컬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아마 로마 대 화재 이후에,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결과로 그러한 호칭이 생겨난 것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네로가 통치하는 시대에 악행자(벧전 2:12)라고 일컬어졌다(Tacitus, Ann. ⅩⅤ. 44). 그래서, 우리는 로마를 기록한 장소로 생각하고, 또 베드로가 네로로부터 자기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바벨론'을 사용 한 것으로 생각한다."( A. T. Robertson, p. 74. )라고 하였다.

이 학설에 대해 반즈(A. Barnes)는 그렇게 이른 시대에 바벨론이란 이름이 로마에 적용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 사도들은 편지를 보낼 때에 으레 실제의 지명을 언급했다는 점, 자기가 있는 지역의 명칭을 별명으로 언급한다는 것은 사도의 존엄성에 걸맞지 않는다는 점, 바벨론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바 사악성 때문에 로마를 바벨론이라고 했다면, 사도는 로마 교회를 존경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A. Barnes, p. 1393. )

그러나,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묵시 문학에서, 바벨론이 로마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그 이전부터 그러한 표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편지를 보낼 때 실제의 지명을 언급하는 것이 사도들의 관례이며, 가명을 쓰는 것이 사도의 존엄성에 걸맞지 않고, 또 로마를 가리켜 바벨론이라고 했다면 로마 교회를 존경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바울의 서신들 중에도 쓴 장소가 명시되지 않은 것들이 있고, 또 야고보서도 쓴 장소가 명기되지 않았다. 더욱이, 베드로전서는 박해가 행해지는 로마에서, 박해 아래 있는 로마 판도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 것이다. 그러한 경우라면, 누구라도 로마 교회에 대한 박해가 더 극심해질 것을 우려하여 실제의 지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서신이 기록된 시기에 대해 반즈(A. Barnes)는, "이 서신이 기록된 시기를 확실하게 결정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서신 자체는 물론, 그 밖에 어떤 자료도 없다. 라드너(Ladner)는 63년이나 64년, 또는 늦어도 65년으로 추측하고, 미카엘리스(M-ichaelis)는 60년경으로 추측한다. 만일 바벨론에서 쓴 것이라면, 아마도 58년과 61년 사이의 어느 시기일 것이다."( A. Barnes, p. 1394 )라고 하였 다. 그 밖에 헌터(A. M. Hunter)는 62년경,( A. M. Hunter, p. 80. ) 파이네(S. W. P-aine)와 켈리(J. N. D. Kelly)는 64년경,( S. W. Paine, p. 1443. J. N. D. Kelly, pp. 47-48. ) 블럼(E. A. Blum)은 62-64년경,( E. A. Blum, p. 212. ) 훼아톤(D. H. Wheaton)은 63-64년경,( D. H. Wheaton, p. 1237. 63-64년경. ) 카핀(B. C. Caffin)과 로벋손(A. T. Robertson)은 65년경,( B. C. Caffin, p. ix. A. T. Robertson, p. 72. ) 고펠트(L. Goppelt)는 65년과 80년 사이의 어느 시기( L. Goppelt, p. 47. )로 추측하고 있다.

특히, 켈리(J. N. D. Kelly)는 64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일련의 사건들이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본서의 수신인들―또는 그들 중 대다수―이 최근에 개종한 자들인 것 같다. 곧 제2 세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암시는 전혀 없다. 아나톨리아(Anatolia:옛날의 소아시아이자 현재의 아시아 터어키)의 숱한 공동체들에 공존하던 이러한 상황은 십중팔구 1세기 말경보다는 이른 시기에 전개되었던 것 같다. 둘째, 그들이 준수한 교회―당시의 교회에서는 연령에 있어서도 연장자들인 장로들이 감독권을 쥐고 있었다.―질서의 유형은 특히 우리가 성직자의 정확한 계급 제도가 소아시아에서 얼마나 급속하게 발전되었던가를 기억할 때(이그나티우스의 서신을 참조하라.), 비교적 미발달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서의 기록 시기를 늦게 잡으면 잡을수록, '함께 장로 된 자'(5:1)라는 베드로의 겸손한 자아 묘사는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이 된다. …… '미래의 소망과 현재의 실현을 긴밀히 투시하는 사상의 종말론적인 구조'(F. L. Cross), 윤리의 종말론적인 규정, 그리고 곧 나타날 영광에 대한 환희적 기대는 모두 초기의 표정들이다.

셋째, 본서의 신학은 명백하게 원시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 J. N. D. Kelly, pp. 47-48. )

그런데 발(C. S. Ball)은 62-64년보다 더 이른 시기로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들고 있다.

첫째, 서신의 언어는 박해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박두하고 있다는 것과 여전히 가능한 한 정부에 대해 충성하도록 충고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둘째, 초대 교회에서 아주 확고하게 믿었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1:5, 7, 13, 2:13, 4:13, 5:1, 4).

셋째, 교회 임원들로는 장로들만 언급된 것으로 보아 조직이 아직도 매우 단순한 때이다.

넷째, 아마도 가장 강력한 논증은 "베드로전서의 신학이 교회의 초기 신학"( W. Barclay, p. 140. 더욱 자세한 내용은 Ⅰ. '저자'를 보라. )이라는 점이다.( C. S. Ball, p. 247. )

서신의 언어가 실제적인 박해를 암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박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고 하는 첫째 견해 외에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무방하다. 더욱이, 나머지 견해들의 요지는 켈리(J. N. D. Kelly)의 것들과 같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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