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갈라디아서

[스크랩] 갈라디아서 (6 : 1~1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9
갈라디아서 6장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ㅇ무슨 범죄한 일 - '범죄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프토마티'
는 문자적으로 '넘어지다', '따로 떨어지다'등의 의미로 '타락하다'라는 개념을
포함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죄의 개념을 제거하고자
한다(Ridderbos, Lenski). 본절의 범죄는 어떤 유혹에 의하여 부지중에 저질러진 '실
수'나 '허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파라프토마티'가 무지와 연약함에 의하여 저질러진
것이라 할지라도 범죄에 대한 책임마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겸손
한 마음으로 그들의 책임을 나누어 질 것을 권고한다(2절). 한편 바울이 본절에서 '범
법한 자'라는 의미를 가진 '파라바테스'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취급하고자하는 범죄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偶發的)이거나 육신의 약
함을 인하여 범한 것임을 시사한다.
ㅇ드러나거든 - '드러나거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롤렘프데'
는 '발견하다', '놀라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프롤람바노'의
부정 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어떤사람이 부지중에 범죄한 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범죄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때에 느끼는 당혹감과 놀라움을 의미하며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범죄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혹자는 이 단어가
범죄의 수단이나 원인보다는 단순히 범죄한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현장성을 강조한다
고 설명한다(Ridderbos). 그러나 '프롤렘프데'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언
급할 때에(요 8:4) 사용된 '카탈람바노'란 단어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카탈람바노'는 사건의 현장성, 곧 범죄의 증거를 강조하는 한편 '프
롤렘프데'는 사건의 진위성(眞僞性) 곧 범죄한 사실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사실 관계
를 강조한다.
ㅇ온유한 심령 - 이것의 헬라어 '프뉴마티 프라위테토스'
는 '온유한 마음'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고전 4:21). 물론 '프뉴마티'는
본절에서 '인간의 영'을 뜻하며 성령의 열매인 온유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의 심리적 상
태를 의미한다. 특별히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온유'를 언급한 것은 '프라위테토
스'가 교만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겸손'을 의미하며 또한 '화내지 않고 관용하는 마
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R.E. Howard)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ㅇ짐을 서로 지라 - '지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제테'는
일시적인 도움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관계성을 갖고 돕는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공동체
적 관계는 '알렐론'('서로')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들이 나누어
져야 할 '짐'(바로스)은 '가혹하여서 감당하기 힘든 일이나 짐'을 뜻하
는 단어이지만, 때로는 긍정적인 의미로 '영광과 충만'의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고
후 4:17). 본절에서 의미하는 바는 다음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범죄로 말
미암아 스스로 감당해야 할 책임을 뜻한다(Huxtable). (2) 그리스도인이 삶의 현장에
서 겪는 시험이나 인생의 좌절을 뜻한다(Boice). (3) 죄를 짓도록 유혹하거나 영적으
로 억압하려는 세력을 뜻한다. 이경우 '짐을 서로 지는'것은 그리스도인들을 범죄의
유혹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자 예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위
의 세 견해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지체들의 유기적(有機的)관계를 설명
함에 있어서 부적합한 것은 없다. 성도는 이상의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서로의 짐을 나
누어져야 한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ㅇ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 바울은 동일한 주제 속에서 온전한 사랑
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의 내적 상태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이웃의 무거운 짐들을
함께 나누어지지도 못하면서 의식적인 율법의 구조속에 빠져 스스로 모든 율법의 요구
를 지켰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경고한다.그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재능이나 역할에 대하
여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빠져 하나님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무시하고 율법을 자신의 유익과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지켰다는
것이다.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ㅇ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 앞절이 영적교만에 빠져 자기를 기만하는 몇몇 사람들
에게만 제한되어 적용된 것이라면, 본절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의식하는 자들은 율법의 종이 되어 인간적인 규범으로 이웃을 판단하고,다른 사
람의 범죄에 자신을 비교하여 자신의 상대적인 의로움에 절대적인 가치를 둠으로써 이
웃의 짐을 나누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웃의 짐을 가중시키는 불법을 행하였다. 이처럼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생기는 그릇된 자존심에서 탈피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
의 출발점이다. 한편 본절의 '살피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마제토'
는 제련소에서 순금을 정련(精鍊)하는 것처럼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것을 의
미한다(test, NIV). 성도들은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살필 때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
로하여 엄정하게 해야한다. 이렇게 할 때 성도들은 그리스도 앞에서 깨꿋한 양심을 갖
게 되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참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ㅇ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 '스스로 속이는 자들'은 자신의 자랑거리를 상대방
의 실수와 견주어 평가했던것 같다(Ridderbos).그러나 자신의 업적이 하나님의 행하심
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는 바울의 자랑(고후 1:12;빌 2:13)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자랑이 얼마나 부끄럽고 어리석은 것인지를 알게 된다. 바울은 자신의 눈을 다른 사람
이 아닌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을 시사하며 이로써 성도는 자신의 무익함과 하나님께
대한 영광을 깨닫게 될 것을 보여준다(Boice).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ㅇ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바울은 본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의무를 가르친다. 그것은 곧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는 것이다. 바울은 본절에서 '짐'
을 뜻하는 단어로 '포르티온'을 사용하여 2절에서의 '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로스'와 구별하고 있다. '포르티온'은 신약에서 배에 싣는 화
물을 가리키기도 하였으나(행 27:10 ), 어원적으로 '포르티온'이 '바로스'보다 더 가
벼운 짐을 뜻한다든지 더 무거운 짐을 뜻한다는 것을(마 23:4)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니다(Ridderbos). 그러나 '포르티온'은 '바로스'와 달리 한 사람의 '짐 꾸러미'
를 의미한다. 이 '짐꾸러미'는 본절에서 하나님이 성도 각자에게 맡기신 직무를 가리
킨다(고전 12:5). 모든 성도는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하며 그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한편 '질 것임이니라'의 헬라어 '바스타세이'
는 미래 시제로 미래의 심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감당하는 정상적인 의무와 마땅
히 해야 할 일들의 책임성을 강조한다(Ridderbos, Huxtable). 하나님의 심판 날에 각
사람의 모든 행위가 드러나므로(벧전 1:17)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ㅇ가르침을 받은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쿠메노스'
의 동사형 '카테케오'('가르치다')는 원래 '이해하게 하다', '귓
가에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때로는 '좋지 않은 소리를 귀에 따갑도록
반복해서 알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행 21:21, 24). 혹자는 본절에 언급된자들
이 유료(有料)교사들의 집단일 것이라고 추측한다(Boice).그러나 본절 '카테쿠메노스'
는 어떤 특정한 단체나 조직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교훈 아
래 있는 자'들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같다(Boice, Cole).
ㅇ말씀을 가르치는 자 - '가르침을 받는 자'들의 신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듯
이 '가르치는 자'들의 신분도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로서 다른 서신서에서는 '디다스칼로이'라고 표현되었으며
'교사'라고 번역되었다(고전 12:28;엡 4:11). 이들 '교사들'이 본절에 기록된 '가르치
는 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지에 대한 견해는 크게 둘로나뉜다. (1) 혹자는 이들
이 초대 교회 안에서 목회자적인 신분을 가진 자들로서 '디다스칼로이'와 같은 신분의
사람들이라 한다(Ridderbos). 그러나 본서가 다른 서신들보다 일찍 기록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볼 때 '가르치는 자' 즉 '카테쿤티'가 교회로부터 공
식적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2) 오히려 본절에서 '가르치는 자'
들은 보다 초기의 직분자들로서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과 바나바와 디도같은 사역자들
과 교회가 임명한 장로들을(행 14:23) 가리킨다(Huxtable). 이들은 '교사'들과는 달리
한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전도 여행자들을 뜻하는 것같다. 문맥상 (2)의 견해가 무난하리라 본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ㅇ스스로 속이지 말라 - '속이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플라나스데'
는 3절에 '프레나파타'와는 차이가 있다. '플라나스데'는 '길
을 잃게 하다', '진리에서 벗어나도록 하다', '잘못되게 유인하다','미혹하다' 등을
뜻하는 '플라나오'의 현재 수동태 명령법으로 '어떤 유혹에 미혹되어
믿음을 잃게 되다'는 뜻이다.
ㅇ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 '만홀히 여김'에 해당하는 헬라어
'뮈크테리제타이'는 '바보 취급당하다'(to be fooled,
NEB)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그릇된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인간
의 이기적본성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등한시하는 결과
를 초래한다.본절에서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꿰뚫
어 보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께서(시 139:1-6;겔 11:5)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지킨다고 자부
하며 할례를 행하는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선행을 무시하는 것
을 염두에 두고 이는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교훈하고 있다.
ㅇ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 바울은 인간의 행위를 자연 법칙에 비
유한다. 이렇듯 행위와 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씨 뿌리고 거두는 비유를 사용하는
것은 혤라 문화와 성경에서 자주발견된다(마 7:16;막 4:26;눅 19:21;고후 9:6). 바울
은 고후 9:6에서 적게 심는 것과 많이 심는 것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였으나 본절에
서는 심는것과 거두는것의 '질'에 대하여 논한다. '심든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
이레'는 현재 가정법 능동태로 미래 조건을 나타내기 위해 '에안'
('...하든지')과 연결되어 있다. 현재 가정법은 동작의 계속적 반복을 나타내므로
본절에서 묘사된 행위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행하는 각각의 행위를 말한다. 또한 미래
조건절임을 나타내는 '에안'이 사용된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미래의 결과, 곧 하나
님의 심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따라서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그것을 어떻
게 실생활에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가 미래의 심판대 앞에서 어떠한 결과를 거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ㅇ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일반적인 법칙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경우에 적용된다. 바울이
앞장에서 육체와 성령을 비교한 논리(5:16-18)와는 차이가 있지만 세상끝의 추수를 바
라보는 시간은 동일하다.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라 규모없이 생활한다면 육체적 부
패와 도덕적 타락을 초래하게 되며 영적인 성품들을 잃게 될 것이다.
ㅇ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 '성령을 위하여 심는다'는 것은 자기의 삶을 성령
에게 맡기고 성령의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을의미한다
(롬 8:14). 이러한 삶은 인간 내면 세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이는 육체적인 생명전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부활 후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영화(榮華)로운 생명을 의미한다(Ridderbos).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ㅇ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 본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
두에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 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
이지만,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 하며 넘어지게 될 것이
다. 한편 본절의 내용은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 3:13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본절과 살후 3:1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절'
(토 칼론 포이운테스 메 엥카코멘), '살후 3:13'(메 엥카케
세테 칼로포이운테스). 살후 3:13에서는 '메'와 연결된 부정 과거 가정법 '엥
카케세테'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형'을 뚜렷
하게 설명하였으나, 본절에서는 현재 가정법 '엥카코멘'과 '메'
의 구문이 앞에 있는 '포이운테스'('행함')와 함께 사용
되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 지니라

ㅇ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은 앞에 기술된 사실
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때 자주 사용되며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본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ㅇ기회 있는대로 -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에코멘'을 가정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Westcott, Hort). 그러나 바울은 일반
적으로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때 언졔나 '안'(if)을 썼다. 본절에서는 '안'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
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한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ㅇ착한 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은 9절의 '칼론'
('선')대신에 쓰여졌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 본절의 '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한
편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좋은
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단수로 쓰이긴 했어도
'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집합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가돈'은 모든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
가도이스'는 영적인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면 본
절의 '아가돈'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ㅇ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리스타'
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의 최상
급이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
인들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가
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엡 2:19;딤전 5:8).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
리들은 신앙 공동체의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한
'형제'(* , 아델포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ㅇ내 손으로는...큰 글자로 쓴것 - 바울은 이제 본 서신 전체에 대한 결론을 맺는다
(11-18). 본절은 '큰'의 헬라어 '펠리코이스'와 '쓴'의 헬라어 '에
그랖사'의 시제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1) '펠리코이스'를 '긴' 또는 '많은' 등의 개념으로 이해할 경우 바울이 지금까지 쓴
많은 내용의 편지를 가리키고 있는것으로 해석한다(Calvin, Luther). (2) '펠리코이
스'가 시각적으로 '큰'을 의미한다고 볼 경우 바울이 쓴 글씨체를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본절은 바울이 오랜 여행 기간 둥안의 박해와 노동으로 인하여 적당한 글씨체로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호소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Deissmann).
(3) 혹자는 바울이 글쓰는 사람에게 대신 쓰도록 하고 바울은 자신의 서명만 스스로
했다는 점(고전 16:21ff.;골 4:18;살후 3:17)에 착안하여 본 구절에서 바울 자신이 직
접 쓰는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한다고 한다. 이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바울 자신이 본서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직접 펜을 들
었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특별히 강조해야 할 부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Ridderbos). 한편 '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랖사'는 부정 과거로 발신자가 수신
자의 편지를 읽는 시점을 염두에 두어 집필 시점을 과거로 묘사하는 서신적인 용어이
다. 그러므로 본절에서는 헌재적인 의미로 '쓰고있는'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ㅇ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 -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율법주의자들
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율법을 진실하게 지키려는 유
대인이라기 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기회주의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
양을 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프로소페사이는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좋은 모양을 낸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로 봐서 그들은 인간
적인 겉치레만을 일삼는 자들이며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다.
ㅇ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 그들은 할례를 행함에 있어서도 언약적인 관계로
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모습만을 갖추기 위해 행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할
례는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께서 행하셨던 할례나(눅 2:21) 또한 디모데에게 할례받게
했던(행 16:3) 바울의 할례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그들은 단지 육신의 유익을 위해
할례를 행하였다. 본절의 '육체'는 부패한 인간 본성과 이웃을 경멸하는 종교적 자만
심을 뜻하기도 하며 인간의 신체 중에 할례받은 한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말
로서(Ridderbos) 그들의 자랑이 얼마나 편협되고 초라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를 지적
한다.
ㅇ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 할례를 요구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이 그리스도를 선생이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고 있어도 그리
스도의 십자가는 기피하고 싫어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크
게 두 가지이다. (1) 십자가는 유대주의자들이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적인 의의를 부인
한다. 그래서 자신들을 죄인으로 인정해야 하기때문이다. 게다가 나무에 달려 죽은 자
는 저주받은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문제 때
문이다(Boice). (2)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들이 십자가를 전파하게되면 그리스도의 사
역과 효력을 증거해야 되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할례를 부인해야만 한다. 만약 그
들이 할례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전통적인 유대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박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십
자가를 회피하고 할례의 정당성(正當性)을 언급하였을 것이다.

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ㅇ할례 받은 저희라도 - '할례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템노메노이
는 '할례를 행하다'는 뜻을 가진 '페리템노'
의 현재 중간태로서 '스스로 할례를 받은' 또는 '할례를 좋아하는'이라는 의미이다.
어떤 사본(P ,B, F)에서는 완료 수동태인 '페리테트메메노이'
를 취하여 이미 할례를 받은 거짓 교사들을 선명하게 지시한다(Ridderbos). 혹
자는 본문이 현재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자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
자들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들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시제를 현재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Huxtable, Howard). 또한 보다 오래된사본(A, B)
에서는 현재형을 취한다. 이처럼 현제형을 취하면 모든 거짓 교사들과 추종자들 다 지
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타당한 듯하다.
ㅇ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 '지키지 아니하고'의 헬라어 '우데 퓌랏수신'
은 고의적인 율법 파기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
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기위하여 할례를 행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율법
준수를 도외시하는 거짓 무리들에 불과하였다(12절). 그들은 유대교를 따르는 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며 자기의 육
체를 자랑하기 위해 모든 진리들을 마음대로 변질시키는 자들이었다.
ㅇ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 그들은 진리를 따른다거나 율법을 행한다는 것
을 자랑으로 삼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자했다. 그들은 자아 중심적인 교만에 빠져 육체의 흔적을 신뢰하는 거
짓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자신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멸망의 길로 가는것을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들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사람들이었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ㅇ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결코...없으니'에 해당하는 '메 게노이
토'는 70인역에서 주로 사용된 용법으로(수 22:22;24:16) 미래
에 대한 부정적인 소원을 나타내는 화구법이다. 이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십자가를 부
끄러워하면서 할례를 자랑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삶의 태도와 대조를 이룬다. 세상이 보
기에 십자가는 연약함과 불행의 상징이었지만(고전 1:25)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랑이었
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바울이 가졌던 진리의 본질과 삶의 동기와 목적을 선명하
게 대변한다. 한편 '내게는'(에모이)이라는 표현은 온갖 불의를 무릅쓰고
끝까지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의 열정을 나타낸다.
ㅇ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자신에
게 적용시킨다. 그도 한때 세상의 영광들을 구하며 인간적인 성공을 바라보며 살았던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빌 3:3-6). 그러나 이제 그는 냉철하게 세상과 자신을 구
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생명을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고'
라는 절대적인 표현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자아(自我)
는 절대로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 살아갈 수 없다. 여기서 '세상'(코스
모스)이란 인간들의 자기 주장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악의 총체를
의미한다. 바울이 '세상'과 '나'를 배타적인 관계로 여기고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오
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과 생명의 근거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Ridderbos).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ㅇ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 바울은 구원의 조건으로 무할례를 강조하지 않는다.
할례와 무할례는 상대적인 요소들로서 절대성을 지닌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아무
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5:6;고전 7:19). 바울이 앞절에서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
다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로 관심을 돌린 것은 매우 흥미있는 전황이다. 이 말은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Ridderbos). '지으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티시스'는 하나님의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며 '피조물'을 뜻
하는 '크티스마'(약 1:18)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특히 '크티시스'
는 본절에서 '새로'의 헬라어 '카이네'와 함께 쓰여 그리스도로 말미암
아 재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을 강조한다(엡 2:10).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
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도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성도는
현재의 삶 속에 미래에 이루게 될 종말의 삶을 도입하며 살아간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ㅇ이 규례를 행하는 자 - '이 규례'는 바울이 앞서 말한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성령 안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새 언약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이처럼 본절에서는
본서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다. 한편 '행하는'의 헬라어 '스토이케수신'
은 '행렬에 맞추어 나가다', '규칙을 굳게 지키다'라는 뜻을 가진 '스토
이케오'의 미래 직설법으로 5:25에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을 의미할
때 사용된 것처럼 새 규례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존된 것임을 보여준다.
ㅇ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 새 언약의 규례를 따르는 자들
에게 베풀어진 축복은 본절에서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
난 자들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참된 이스라엘 족속이 될 수 있다
(3:29;4:28, 29). 참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이며 전통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복음을
믿어 순종케 된 자들로 구성된 '새이스라엘' 곧 '약속의 자녀'를 말한다(롬 9:7). (2)
'평강'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진다. '평강'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레네'
는 5:22에 제시된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신약에서 일반적으로 미래
에 이루어질 축복과 행복을 뜻하는 말로 쓰여졌는뎨(눅 2:14) 본절에서는 종말론적인
구원을 함축한다(Ridderbos). 한편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레오스'
는 구약의 '헤세드'의 번역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한번 택한 백성
을 버리지 않는 변함없는 은혜'등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예
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큰 은혜를 가리킨다. 특히 바울은 이와 같은 축복을
특정한 무리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않은 무리들에게도 같은
축복 속으로 초대하고있다(Huxtable).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ㅇ나를 괴롭게 말라 - '괴롭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푸스...파레케토'
는 '내면적인 고통이나 슬픔'을 의미한다(마 26:10;눅 11:7).
바울이 당한 괴로움은 유대주의자들로부터의 직접적인 폭력이나 폭언이라기보다는 갈
라디아 고인들이 유대주의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안타까움이다. 따라
서 '괴롭게 말라'는 구절은 더이상 갈라디아 교회 속에서 이단자들에 의하여 미혹(迷
惑)되는 자들이 없기를 바라는 호소의 성격이 강하다.
ㅇ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 '흔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티그마타'
는 소나 양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거나 종이 특정한 주인의 소유임을 나
타내기위하여 '자국'이나 '소인'을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이
'흔적'을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의 상처가 그대로 바울에게도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일례로 아씨시의 프란시스(Assisi Francis)가 이런식의 거룩한 흔적을 받았다고 전해
진다. 그러나 본절에서 '흔적'을 신비적 체험으로 이해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
다(Ridderbos, Huxtable, Cole).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서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수많은 고난의 흔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1) 수
많은 육체적 고난으로인하여 실제로 남겨진 박해의 상처들을 뜻하며(고후 11:22-27),
(2)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의 실천적 의미로서 수많은 고난에 동참하였음과 고난과 박
해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를 따랐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바울이 소유한 예수의 흔적은
예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 얻은 거룩한 증표로서 율법주의자들이 육체의 자랑을 위해
스스로 행한 '육체의 모양'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것이다(행 20:24).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ㅇ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 모든 형
제들에게 거룩한 인사를 함으로 시작했던(1:2) 본 서신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모든 성령의 약속과 구원을 함축적인 의미로 표현한 것으로서
저들의 구원이 자의적(自意的)인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달려 있
음을 다시 한번 확증한다. 특히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메타 투 프뉴마토스)라고 표현한 것은 외형적인 모양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들의 내적인 존재 전체에
영향을 끼치길 기원하는 의미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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