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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갈라디아서

[스크랩] 갈라디아서 (3 : 1~29)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9
갈라디아서 3장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ㅇ어리석도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에토이'는 돌이킬 수
없는 죄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죄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질책하는 것이다(롬 1:14;딤전 6:9;딛 3:3). 본절과 3절에
서 두 번에 걸쳐 사용되는 이 단어는 매우 도전적이고 통렬한 어투로 진술되고 있다.
바울은 앞으로 전개될 결론에 대하여 보다 준엄하고 냉정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ㅇ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밝히 보이거늘 - '밝히 보이거늘'의 헬라어 '프로에그라
페'는 '공적 선언으로 발표하다' '미리 기록하다' 등의 뜻으로
부정 관계형이다. 이는 이미 과거에 편지를 통해서나 직접 방문하여 복음에 대해 언급
한 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자신이 처음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때 선포하였던 복
음의 진리들을 상기시키면서 그때에 그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선명하게 전파하였음을
강조한다. 그 의미는 너무나 선명하여 마치 공공 계시판이나 그림과 같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끔 제시했다는 뜻이다. 특히 바울은 본절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에스타우로메노스)를 분사 완료형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이 과거에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 이것이 '밝히 보인다'고 하는 것은 그 십자가의 공효(功效)가 여전히 지속적으로
적용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전 2:2,10). 그 효과의 지속성은 갈라디아 교인들뿐만 아
니라 오늘날 성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의 핵심을 듣고 믿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
일하게 작용한다.
ㅇ누가 너희를 꾀더냐 - '꾀더냐'의 헬라어 '에바스카넨'은
'거짓된 칭찬이나 음흉한 눈으로 악을 가져오다' 또는 '악한 술책으로 타락시키다'라
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서 신약에서는 본절에서만 사용되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
아 교인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 거짓 교사들이 누구냐하는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명한 복음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에바스
카넨'은 '시기하다'는 뜻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즉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부러워하여 '너희를 시기 하느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
석은 전체적인 문맥이 의도하는 목적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Cole).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ㅇ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 '율법'의 헬라어 '노모스'는 구
원에 이르는 수단으로서의 '믿음'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율법은 그리스도
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24절)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지만 갈라디아의 율법주의자
들은 오히려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
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는 양자 택일의 문
제를 던진다. 이것은 곧 율법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들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암시한다.
여기서 '들음'은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
은 로마서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롬 10:14-17). 또한 베드로는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주장하며 전파하는 자의 소명을 강조한 바 있다(행
15:7). '들음'은 전파하는 자와 성령의 사역으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불완전한 인간이
행하는 행함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의 방편이다.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ㅇ'육체'(사륵스)는 본서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
되었다. (1) 할례를 자랑으로 여기는 자들이 내어보이는 인간의 신체를 가리킬 때 사
용되었으며(6:13) (2) 본절에서와 같이 성령의 하시는 일과 대조를 이루는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에서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두번째 의
미로서 육적인 자아(自我)를 십자가에 못박은 성도가(2:20) 어떻게 다시 그 육체적 자
아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은 성도는 성숙
한 신앙의 열매(5:22, 23)를 맺기 위해 부단히 정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며
다시는 율법의 종으로 돌아갈 수 없다(Howard).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ㅇ괴로움을 - 헬라어 '에파데테'는 '파스코'의 부정 과거 형태이며
'파스코'는 '선한 또는 악한 경험을 하다'라는 뜻이다. 개역 성경은 '악한 경험을 했
다'는 뜻으로 번역하였으나 NEB는 '영적인 놀라운 일' 즉 영적인 축복들을 의미하는
'선한 경험'으로 번역하였다.'파스코'가 성경에서 주로 '고난당하다', '괴로움을
받다'(마 27:19;막 9:12;눅 22:15;24:46;고전 12:26;빌 1:29;히 2:18;9:26)의 의미
로 사용되나, 본절에서 선한 영적 경험으로 사용되었다는 주장도 정당성을 가질 수 있
다. 악한 의미에서의 괴로운 경험과 선한 의미에서의 영적 경험이라 해석하는 두 견해
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악한 경험, 즉 박해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본
문이 바울과 바나바가 남갈라디아 지방에서 교회를 세울 때에 받았던 고난을(행13:50;
14:2, 5, 19, 22 등) 의미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Lenski, Robertson). 비록 본절의
박해가 남갈라디아에서의 박해(행 14장)를 의미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울은 지금 유
대주의자들로부터 받았던 모든 박해를 회상하고 있다는 것이다(Cole). (2) 축복된 영
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너희가 그렇게 풍성한 영적 축복들을 받았는데 그것을
헛되게 하려느냐?'라는 의미로 본문을 해석한다(Boice).이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갈
라디아 교회가 성령의 풍성한 능력을 받았다고 말하는 5절과 본문을 연결시킨다. 또한
이들은 갈라디아 교회가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
고 육체의 소욕(所欲)을 따라 행하려느냐는 3절과 본문을 연결시킨다. 사실 본절과 긴
밀하게 연결된 문맥을 살펴본다면 하나님께서 성령 주심(3절),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사람들 가운데 능력행하심(5절)등 긍정적이고 영적인 경험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타당
하다고 본다.
ㅇ과연 헛되냐 - 바울은 여전히 '아니오 헛되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수사
의문문을 사용한다. '헛되냐'의 헬라어 '에이케'는 '아주 보잘것 없는 무
가치한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는 '믿음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Lenski). 진정 그들이 믿음에서 떨어져나간 상태에 거하게 된다면 그들을 부른신 하
나님의 사역과 성령의 풍성한 은사와 또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가졌던 사
랑과 수고한 모든 열심이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4:11).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ㅇ너희에게...행하시는 이 - 본절은 형식상 2절과 유사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몇
가지의 차이점을 가진다. (1) 2절에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신다. 즉
2절에서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던 근거가 무엇이냐에 관심을 두는 반면, 본
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떠한 기준에 따라서 성령을 주시느냐는 물음에 초점을 두고 있
다. (2) 2절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던 과거 사실에 역점을 두어 과거 시제
로 표현했지만 본절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 특히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고'
(에피코레곤), '능력을 행하시는'(에네르곤) 두
사역은 현재 분사를 사용하고 있다.이는 과거에도 사역하셨지만 지금도 사역하시는 현
재적인 의미를 보다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지속적(持續的) 의미를 나타내는
두개의 현재 분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음 회심할 때 뿐만 아
니라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한편 '능력'의 헬라어 '뒤나메이스'
는 '에네르게오'('행하시는')와 연결되어 현
재적 의미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능력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만 베풀어질 수 있다
는 제한성을 보여준다.
ㅇ성령을 주시고 - 바울 서신에서는 보통 '주다'라는 의미로 '디도미'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고전 12:7;고후 1:22).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인
용어인 '디도미'를 사용하지 않고 '에피코레곤'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21절에서 '율
법을 주셨다'는 의미로 사용된 '디도미'와 구별하기 위함인것 같다. 또한 '에피코레
곤'은 '값없이 제공하다' 또는 '지원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본절에서
'에피코레곤'을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보혜사 성령이 율법과는 달리 값
없이 주신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ㅇ본절은 바울이 4:7까지 믿음과 율법을 번갈아가며 전개하고 있는 순차적(順次的)인
논증의 첫번째 항목이다(Boice).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아브라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전제하고 구약의 내용에서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하고 있
다.
ㅇ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의로 정하셨다 -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은 무엇으
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는가? 그리고 그 '의'의 성격은 어떠한 것인
가? 바울은 로마에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기 이전에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설명하였
다(롬 4:10). 바울이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특별히 아브라함을 논쟁의 중심
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무할례시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사실 때문이다. 그
렇다면 본절의 '의'(디카이오쉬네)는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1) '법률적인 칭의'를 의미할 수도 있다(Boice). 아브라함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 의
롭다함을 인정받기에는 부적합한 것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의 '의'역시 선언적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다. (2) 또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그의 올바른 태
도를 의미할 수도 있다(E.D. Burton, Cole). 창 15:6에서 볼 수 있듯이 아브라함이 자
기를 부정하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 것이 하나님께 의로 인정되었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다. 즉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아브라함
이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한 태도를 보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여겼다고 본
다. 두 견해들 모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의롭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을 근거로 하지 않
는다는 사실이다. 의롭다하시는 이는 바로 의롭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
의 '의' 역시 신약 백성이 우리의 의와 같이 대속하신 구세주의 은혜로 얻게 되는 것
이며 단지 아브라함은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선취(先就)된 '의'일 뿐이다
(고후 5:21). 시간상으로 아브라함의 의는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인정되었으며 아들 이
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한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기 이전임을 상기시키면서 바울
은 자기 교만과 의를 자랑하는 유대주의자들을 책망함과 동시에 할례의 무용성을 강조
하고 있다.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ㅇ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 - 바울이 할례받지 아니한 믿음의 무리
들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주의자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다. 여기
서 바울이 '아들'(휘오스)이라고 한 것은 '아이'(테크논)라
는 말과 의미상 차이가 크다. '아들'은 일차적으로 육신을 통하여 태어난 자손들을 의
미하지만,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조직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가계(家系)와 상
관없이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마 12:27에서는 종파의 일원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본절에서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을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들을 동격으로 취급하기 위함이다(Lenski). 그들은 아
브라함의 영적 자녀들로서 아브라함에게 부여된 구원의 약속을 상속받는 자들이기 때
문이다(29절;롬 4:13;엡 3:6)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ㅇ정하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계획하신다(롬 3:21). 하나님의 작
정은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에 세워져서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함없이 지속되는 영원한
것이다(엡 1:11). 따라서 한번 작정된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거나 죄인의 반항에 의하
여 실패하거나 좌절되지 않는다(사 46:10). 하나님의 포괄적인 작정은 아브라함의 구
원 계획을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셨다.
ㅇ성경이 미리 알고 - 보통 구약을 인용할 때에는 '말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레게
이'나 '에이페'등이 사용되나 본절에서는 '알다'
(프로이두사)라는 보다 의인화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의인
법(擬人法)은 22절의 '다두었느니라'는 단어에서 더 선명하게 나타난다. 성경을 의인
화시키는 것은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더 밀접하게 묘사하기 위함이며,
또한 두 개의 주어, 곧 하나님과의 말씀이 동격에 있음을 보여준다.
ㅇ복음을 전하되 - 아브라함에게 작정되고 전하여진 복음은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
는 있지만, 그 주된 내용은 '너를 통하여 모든 이방이 복을 받으리라'(창
18:18;22:18)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이 장래에 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믿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며 그것이 곧 복음의 내용임을 보여준다.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ㅇ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 일반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복'(베라
카)은 말로써 부모가 자녀에게 빌어주는 것으로, '건강', '장수', '재산' 등 다분히
현세적이며 물질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었지만(신 28:6), 본절에서의 '복'
(율로기아)은 영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아브라함
과 같이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구원을 의미한다(벧전 3:9). '복'은 어느 개인이나 특
정한 민족들에게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방민족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
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롬 4:24)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ㅇ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저주 아래 있는 자라 -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방
편으로 삼고자 하는 자는 모두 저주 아래 있다는 바울의 말은 죄의 보편성(普遍性)을
전제하고 있다. 이말은 '율법을 따르는 자들은 칭의를 받을 수 없다'라는 율법 자체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라기보다는 율법을 따르려는 사람들이 모든 율법을 지키더라도 하
나의 율법을 어기면 저주 아래 놓이게 된다는 인간의 완벽할 수 없는 연약함을 보여주
는 표현이다. 만약에 인간이 하나의 율법도 어기지 아니하고 모든 율법을 지킨다면 그
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아와 같이 말하는 것은 율법
의 기능이 인간의 죄인됨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이 율법을 따라야 하는 필
연적인 의무를 가졌음에도(레 19:2) 불구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7:24). 인
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은 단지 정죄와 진노의 기능을 가질 뿐이다
(롬 4:15;5:16, 18).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ㅇ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으로 칭의를 설명해 온 바울
은 이제보다 긍적적이며 적극적인 시각으로 칭의에 접근한다. 바울이 구약에서 인용한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는 구절은 구원에 관한 여러 구절들 중에 하나이다.
본 구절은 원래 하박국이 갈대아인의 침공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즉 사악한 자들
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과 신뢰로 이와
같이 고백하고 있다. 바울과 하박국의 입장이 다른 것은 사실이나 필할 수 없는 위기
와 저주 가운데서 믿음으로(롬 1:17) 여호와를 바라는 것은 동일한 것이다(Boice). 결
국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앞에 살고자 하는자는 오직 '믿음'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ㅇ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 바울은 갈라디아의 유대주의자들 앞에서
구약을 인용하여(레 18:5) 믿음과 율법이 조화될 수 없는 관계임을 증거한다. 율법으
로 행하려는 자들은 끝까지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율법을 행치 않으면 저
주를 받는다(27:26). 결국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구원하시
지 아니하는 심판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저주를 깨닫게 될 것이다(딛 3:4, 5).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ㅇ속량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 '엑세고라센'은
'값을 치르고 사다', '되돌려 사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본절에서 이 말은 율법의 노
예가 된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값을 치르고 사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대가는 십자가의 피였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전(贖錢)의 개념에서
해석되며(출 21:30)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는 저주(신 21:23)까지 받게 하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다(사 53:6).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ㅇ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으로 성도들을 구속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 (1)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2) 믿는 자들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널리 미치게 되었고(9절 주석 참조), 성령의 약속
은 예수의 부활 이후 성취되었다(요 14:16-18;행 1:4). 이처럼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성령을 선물로 얻는 것은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같은 성격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에게
미치는 아브라함의 축복이 하나님의 약속이듯이(8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
게 되고 성령을 받게 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눅 24:49).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ㅇ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 '언
약'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주로 '유언이나 유언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나 70인역에서는 몇번의 예외를 제외하고 대분분 '언약'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말이 '유언'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으나 본절에서 '유언'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유언은 유언자가 죽어야 그 효력을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유언이 되려면 하나님의 죽으셔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죽
으심을 가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이 단어를 '유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
가 따른다. 바울은 본절에서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견고성(堅固性)을 예로 들어 하나님
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불변성(16절)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이 맺은
언약과 큰 차이가 있다. 창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 정황을 살
펴보면 그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계약자들을 쪼갠 짐승 사이로 지나가
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주권자로서 기필코 하신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강한 의
지의 표현이다(히 6:13-15).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사람의 언약을 예로 들어 하나님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
로 성취된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ㅇ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 '자손'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페르마
티'는 복수형인 '스페르마신'과 함께 집합
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럼에도 바울이 '오직 하나'라는 강조 문구를 덧붙인 것은 바울
이 헬라어를 잘 몰랐다거나 바울 자신이 랍비적 논증 방식을 사용하여 랍비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득하려고 했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바울은 '스페르마티'를 집합적
인 의미로 사용한 예도 있지만(롬 4:16-18;9:6-8), 본 구절에서는 단수의 의미로 사용
함으로써 궁극적인 메시야의 축복이 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Boice).
ㅇ곧 그리스도라 - 바울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의 중심을 그리스도에게로
끌어온다.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언약은 당대의 육신적인 자손들이나 율법에 의하여 성
취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본절을 궤변
적인 랍비적 논쟁 방법에 의한 삽입구로 간주하려고 한다(Howard, Cole). 그러나 본절
에서 바울이 분명하게 주장하는 바는 약속의 성취는 그리스도에게 집약되어 이루어졌
다는 사실이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ㅇ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 - 이것은 출 12:40에 근거한 기간이다. 그러나 이 기
간은 접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설명된다. (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기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히브리어 본문을 기초로 한 번역본들에서 나타나고
있다(Boice). (2) 아브라함과 모세 사이의 기간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헬라어
사본(LXX)에 근거한 견해이다(Hendriksen). (3) 아브라함의 언약이 확정된 야곱때로부
터 시내산 율법을 주신 때까지의 기간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2)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야곱에게와서 확증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본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주어지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는 사실이다
(Lenski, Howard, Cole).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ㅇ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아브라함에게 은
혜로 주신 것이라 - 바울은 다시 한 번 율법과 약속을 대립시킴으로 율법이 약속을 파
기할 수 없다는 것(17절)을 강조한다. 율법과 약속이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이유는 율
법이 행함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행함은 구원을 이룰 수 없으며 가까이 가면 갈수
록 더 큰 저주를 초래할 뿐이다. 한편 '은혜로 주신'의 헬라어 '케카리스타이'
는 '카리스'('은혜')에서 온 말로 구원이 값없는
은혜임을 보여주며,이 말이 완료형인 것은 구원의 영원 불변성을 나타낸다(Boice).
또한 '유업'(클레로노미아)이 약속에 의하여 주어졌다는 사
실은 구원이 율법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율법은 구원을 이루는 수단으
로 주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ㅇ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 지금까지 율법이 약속을 폐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증명한 후에 이제 바울은 율법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한다. 율법의 목
적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고 한다. 공동 번역은 '범법함을 인하여' 대신에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절에서
'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사용하지 않고 '파라바시
스'('범함')를 사용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도 율법의 목적을 논하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에서는 '하마르
티아'를 사용했고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 4:15)에서는 '파라바시
스'를 사용하였다. 본절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인간들은
'죄'가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죄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
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죄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인식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롬 5:20 주석 참조).
ㅇ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 율법이 주어질 때 천사가 함께 했다는 암시
는 신 33:2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스데반은 율법을 천사가 전한 것으로 언급한다
(행 7:53). 바울은 스데반이 따랐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천사가 중보자가 되었다는 사상이 아니라 율법이 누군가에 의하여, 즉
최소한 천사와 모세에 의하여 전달되었다는 사실이다(Boice).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ㅇ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 본절은 본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들은 견해도 250-300여개 정도로 너무 많이
있어 하나의 견해를 취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수많은 견해들을 세 가지 부류로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1) '중보'(메시테스)는 일반적인 의미로 앞절에
서 제시한 중보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율법은 중보를 통해 사람들에게 간
접적으로 주어졌으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보를 내세우지 않고 직접 세우셨다는 것이다
(15-18절).(2)'중보'를 모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는 문맥에 비추어본 해석으로서
앞에서 줄곧 모세 율법에 관해 언급한데다가 본절에서는 정관사 '호'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정관사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꼭 한 개인을 지칭한다고 볼
수는 없다(Boice). (3) '중보'를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바울이 딤전 2:5
에서 '중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에 관해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Jerome,
Chrysostom, Cole). 그러나 이 해석은 문맥에 비추어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 결국 위
의 여러 견해들이 일치를 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본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중보에 의
하여 전달된 반면 약속은 하나님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한다. 이는 약속의 직접적인 전달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일방적인 언약 체결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 준다. 또한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었든지, 천사나 모세가 중보자가 되
었든지 간에 율법이 직접 주어지지 아니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에 바울은 약속이 창
15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무조건적인 일방성(一方性)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면서 율법보다 약속이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ㅇ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율법이 약속을 폐
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율법과 약속은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 왜냐하
면 양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율법과 약속이 서로 대립된다면
하나님의 속성이 내부에서 서로 대립되는 것이 되고 만다. 약속과 율법은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하여 주어졌다.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면, 약
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다른 역할
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구속 경륜에 필요한 요건이 되었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나라

ㅇ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 '성경'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그라페'
는 '율법'(노모스)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Bruce, Cole). 바울은 앞 구절에서의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히
보여준 뒤 본절에서는 율법이 가진 실제적인 기능은 모든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 가두
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기 때문에 사람이 율법주
의를 통해 하나님께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
ㅇ모든 것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판타'는 중성으로 쓰였는
데 이는 가장 포괄적(包括的)인 범위를 뜻하는 용법이다.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이례적이다. '타 판타'가 지시하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 유대
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2) 타락한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 즉 말, 행위, 생각 등을 가리킨다. (3)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타락
된 모든 피조 세계(롬 8:22)를 가리킨다. 아담의 타락에 의하여 모든 피조 세계가 타
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타 판타'가 이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유추하는 것은 무리
가 있다(Boice). 오히려 본절에서는 '모든 것'이 하반절의 '믿는 자'라는 인칭 대명사
와의 연관하에 이해됨이 타당하다. 물론 본절에서 바울이 이방인에 대한 율법의 적용
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말이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될 자들의 옛 상태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ㅇ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 '매인 바 되고'의 헬라어 '에프루루메다'
는 '프루레오'의 미완료 수동태로서 '점진적으로 조
여오다'는 의미이며 때로는 '보도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의 시상이
미완료인 것은 매여있던 상태가 모세가 율법을 받은 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었음을
암시한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ㅇ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 율법의 한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몽학선
생'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아이를 돌보는
자', '어린아이에게 시중드는 자'라는 의미로 원래 6세에서 16세까지의 아이들을 돌보
는 노예 신분의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몽학 선생은 가정 교사로서 가정의 예법
(禮法)을 가르치기도 하며 아이가 학교에 오고 갈 때에 길을 인도하는 노예로 이해 되
기도 하였다. 몽학 선생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교사'(디
다스칼로스)로서의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보다 낮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율법을 몽학 선생에 비유하고 있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ㅇ믿음이 온 후로는 - 믿음이 오기 전까지(23절) 율법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
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에 의하여 율법의 임무는 끝났
다. 율법으로부터 믿음으로 옮겨지는 역사적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모든 자들
에게 있어서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궁극적인 목표가 성취
된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숙한 자녀들을 지배하지 못한다(롬 7:6).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ㅇ막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는 것은 곧 '양자'(휘오데시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1) 죄 아래 놓여 있던 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창
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모든 만물을
만드신 자이시며(행 17:28)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시나, 죄 아래 매인 인간들을
이제 죄로 부터 해방되어 회복된 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2)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에 대한 약속
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14절).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바 아버
지라고 부르도록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시기 때문이다(롬
8:14-1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 곧 성령의 약속이
성취된 증거이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ㅇ세례는 복음의 핵심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본절에서
세례는 할례를 대신하는 구원의 방편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세례는 믿음을 통해서 이
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내는 외적 의식(儀式)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즉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연합하게 되고 이로써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약속된 성령의 사역으로서 구원의 인치심을 확증한다.
ㅇ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 '세례받는 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옷 입었느니라'의
헬라어 '엔뒤오'는 일반적으로 '겉옷을 입는다'는 의미로 사용되나 바울
서신에서는 새로운 인격과 연합한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였다(롬
13:14).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세상 가운데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따라 그리스도
를 드러내는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은 세상의 정욕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며(엡 6:11,14)구원
의 옷을 입는 것이다(사 61:10).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ㅇ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
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하나가 된다. 즉 '믿음'을
공통 분모로 하는 자들은 인종이나 신분이나 성별의 차이에 상관없이 하나이며 믿음으
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헤이스)라는 표
현을 사용하여 교회가 통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아마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
회가 혼란과 분쟁 가운데 빠져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방인들에게 할
례를 요구하는 유대주의자들의 독선적인 우월주의(優越主義)를 의식하였을 것이다.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ㅇ그리스도께 속한 자면...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 -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통해서
만 유업을 이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유대인이 되려면 먼저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확신
했다. 할례를 행하는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업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율법이 갖는 역할과 의미를 아브라함의 약속과 견주어 설
명하고 나서 지금까지의 논쟁을 결론짓는다. 곧 진정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
로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나 인종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의 주(主)로 영접한 자를 가리키는 관용구였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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