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후서

[스크랩] 고린도후서 (12 : 1~2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6

고린도후서 12장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ㅇ무익하나마-자랑하노라 - 바울은 이미 앞에서 자랑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으며
어리석기까지 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11:1, 16-18). 그러나 바울은 불가피하게 자
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거짓 사도들에 의해서 오도
誤導)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ㅇ주의 환상과 계시 - 여기서 '환상'에 해당하는 헬라어 '와타시아스'
라는 단어는 바울이 일찍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을 아그
립바 왕 앞에서 간증할 때 사용되었던 말이기도 하다(행 26:19). 이 말은 초자연적이
며 기적적으로 어떤 실체를 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처럼 보는 것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인지 아니면 무의식의 상태에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혹자는 이것을 잠을 자는
상태라기보다는 깨어있는 상태라고 말한다(Farrar). '계시'
(아포칼류세이스)는 '베일을 벗기다'라는 의미를 갖는 단어로 환상이 직접적으로 보
여진 현상이라면 '계시'는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 감지(感知)하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환상은 대부분 계시이지만 모든 계시가 환상인 것은 아니다
(Harris, Tasker). 이런 점에서 계시를 경험된 환상의 이해 가능한 내용과 전달이라고
설명한 바레트(Barrett)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바울이 이시점에서 갑자기 자신이
체험한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바울이 지금 '자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의 자랑은 적대자들의 자랑에 대한 대웅책으
로서의 자랑이다. 적대자들은 자기들이 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랑했고(11:13), 자
칭 권위있는 추천서를 내밀면서 자기들의 자격을 자랑했다(3:1). 그리고 그들은 신비
적인 경험을 자랑했을 것이다(Barrett). 그러니까 바울이 지금 환상과 계시에 대해서
발하는 것은 그의 적대자들이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자랑한다면 바울 자신도 그런 것
에 대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는 의미로 신비적인 경험에 대해 진술하게 되었다.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ㅇ한 사람을 아노니 - 바울은 오래 전에 경험한 신비 체험을 말하는 방식이 있어, 자
기 자신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라는 간접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
한 바울의 태도는 '나'라는 말대신 '그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는 랍비적 표현법이 영
향이었거나, 또는 바울의 그 경험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이
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ㅇ십 사년 전 - 바울은 매우 오래 전의 경험을 되살리면서 특히 구체적인 수치를 제
시함으로써 증언의 신빙성(信憑性)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혹자는 갈 2:1과
연관지어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지만(Martin) 별로 신빙성이 없다. 이 경험이 다메섹
에서의 경험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부정적이다. 이 경험이 본서가
집필도기 14년 전이라면 A.D. 43년 경이었을 것이고 수리아의 길리기아에서 보냈던
'침물의 세월'(약 A.D. 35-43년)에 있었던 사건이라고 보는 것이 일리가 있다
(Harris). 그렇지만 혹자는 행 22:17에서 엄급된 바 대로 성전에서 본 환상을 가리킨
다고 추정한다(Hughes).
ㅇ세째 하늘 - 본문에 대해서는, 그 개념상의 특이성 때문에 여러 가지 견해가 제게
된다. 먼저 '세째 하늘'이 유대인들의 하늘 개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Salmond). 즉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12족장
의 유언). 그 중 세번째 하늘은 의롭게 죽은 자들이 머무는 처소라고 한다(에녹서
8:1-13;42:3). 그렇다면 바울은 바로 이 죽은 의인들의 처소에 다녀온 것이 된다. 이
경우 바울이 당시 묵시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동의
하는 학자들은 별로 없다. 오히려 본문은 공간적인 개념으로 보지말고 바울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그래서 언어로는 정확히 묘사할 수 없는 곳 즉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에 가서 말할 수 없는 체험을 환상 중에 했다는 것으로 이해함이 무난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째 하늘'의 개념은 엡 4:10의 '모든 하늘 위에'란 표현과 일맥 상통
한다. 혹자는 이것과 관련하여 본문의 표현이, 신자들이 마지막 날에 들어갈 하늘 혹
은 천국의 선취(先取)를 의미한다고 본다(Barrett).
ㅇ이끌려 간 자라 - '이끌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르파겐타'
는 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의나 자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붙잡힌 바 되
었음을 뜻한다. 즉 성령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ㅇ몸 안에...아시느니라 - 본 구절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여 자아가 몸과 분리될
수 있음을 바울이 생각했다고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다만 그 환상의
경험이 인간의 오성(悟性)과 관념의 범주로는 포착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아시느니라'는 진술에서
바울은 계시나 한상의 주체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임을 암시적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만약 적대자들이 그들의 환상 경험을 자랑하되 자신들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ㅇ그가 몸 안에...아시느니라 - 환상과 계시는 경험하는 자가 자의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요 주체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께서 보여주는 것을 수동
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의 일상사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초월하
는 경험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간적인 언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ㅇ낙원으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낙원'이라는 말은 '세째 하늘'의 다른 표현이
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유대인들의 '세째 하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낙원'에 해
당하는 헬라어 '파라데이손'은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된 단어
로 '동산'을 뜻했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다(Bruce). 구약성경에
서 '낙원'은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 동산(창 2:8;사 51:8) 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겔 28:13;31:8).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회
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눅 23:43) 또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계 2:7)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낙원'은 유대 랍비들의 견해와는 달리 구원
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ㅇ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
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구약
에서 보여지는 봉인(封印)된 계시에 관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사 8:16;단 12:4). 이
와 달리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그 체험이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내
용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Lowery)는 타당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바울
은 묵시 문학이나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체험을 자세하게 진술하는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더 이상 그 환상에 대해 진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ㅇ이런 사람을...자랑하겠으나 -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이 경험의 당사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여 자신을 은폐(隱蔽)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2절
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으나 여기서는 좀더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혹자
는 여기서 묵시 문학자로서의 바울과 인간 사도로서의 바울을 구별하여 생각하기도 한
다(Lietzmann). 다른 학자는 교회의 유익을 도모한다는 바울의 기본적 관점에서 이해
하기도 한다(Kasemann). 즉 바울은 '방언'이나(고전 14:9) '황흘경 체험'에 대해 말할
때(5:13) 교회의 유익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과 바울
자신만의 일을 말하는 것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 도움이 되지 일는다고 판단했을 것이
다. 그런데 무엇보다 바울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오해하는 것을 방
지하고 또 그런 자랑을 통하여 자신의 영광을 얻으려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왜냐하면 그가 취할 영광은 그 환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곧이어 언급한 자신의 약함을 통해서였기 때문이다.
ㅇ약한 것들 - 바울은 매우 현명하게 자신의 논리를 진전시켜 이제 정말 자기가 말하
고자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시실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 자신의 신비 체험을 말하는 것은 다만 적대자들이 그들의 사도직의 증거로서 황홀
경 체험을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 사도직의 증거라면 바울 자신도 얼
마든지 말할 것이 있다는 의미로 환상 체험을 진술했을 뿐이다. 바울이 결정적으로 말
하고자 하는 바는 사도로서의 자랑이 오직 자신의 약함이 있다는 것을 적대자들이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周知) 시키는 것이다.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ㅇ자랑도 모두 참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
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의 경험의 사실성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의 적대자들이 보지도
않은 환상에 대해 말했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ㅇ지나치게 생각할까...그만두노라 - 바울은 얼마든지 더 말할 것이 있었음에도 불구
하고 더 이상 자랑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곡해(曲解)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였다. 또한 바울은 과거에 그가 미쳤다고 악평하는 소리를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5:13) 이번에도 그런 것을 염려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본절은 자기가
피해를 업지 않으려는 소극적 의미에서 보다는 자기가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또는 다른 평범한 성도들에게 시험
이 될 수도 있었음이 우려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도모
한다는 바울의 원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이 높이 드러나
는 것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받고 자신은 오직 사도적 봉사를 통해서만 인정받기
를 바랐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ㅇ주沮?이 특수한 은총이 그를 교만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바울이 그런식으로 실족하게 되기를 원치 않았다. 이것을 통해 바을 자신이 하나
님의 세심한 배려 속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ㅇ육체에 가시 - 이것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가시'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콜롸스'는 '가시'라는 말 외에 '파편', '말뚝'등의 의미
를 갖는다. 바울이 이 가시를 육체에 지닌다고 할 때 이것을 그의 복음 사역을 방해하
는 적대자로 보거나 거듭나지 않은 영혼의 한 부분 때문에 생기는 육적인 유혹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Calvin). 그러나 이는 지속적으로 육체에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간질, 두통, 그리고 안질 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안질이나 간질일 가늠성이 높다고 본다. 안질일 가능성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강렬한 빛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고(갈 4:13-15) 간질일 가능성은
바울 자신이 '가시'를 가리켜 사단의 사자로 재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
(마 17:14-18;행 9:9;갈 4:14). 이 밖에 참고로 바울이 '복음을 위한 유대인 동료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Menoud)와 '언어의 장애'로 보는 견해도 있
다. 그 근거로 바울이 편지로는 유창하지만 첫 인상이 나쁘고(갈 4:13) 외모나 언변이
보잘것없다는 것을(10:1, 9-11;11:6)언급한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로 견해들이 많으
나 모든 것이 추측에 의한 진술들이다.
ㅇ사단의 사자 - 이렇게까지 표현한 데에는 바울이 그 '가시'로 인하여 당한 고통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가시가 그의 삶에 여러 모로 방해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사단도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서 성도의 보존을 위
해 사용됨이 나타난다.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ㅇ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 '세 번'이라는 숫자는 일정하게 여러 번 반복하여 드리
는 기도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의 경우에서와 같이 문자적 의미의 세 번을 뜻할
수 있다(막 14:32-42). 어찌됐든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질고(疾苦)를 벗
고 싶어서 매우 진지하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주께' 기도하였다
고 하는데 여기서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
리킬 때 헬라어 '호 퀴리오스'를, 하나님을 지칭할 때 관사없이 단
순히 '퀴리오스'를 사용했는데 본 구절에서는 전자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에게 기도한 것은 질고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사
53:4)구체적으로 자신의 질병을 거론하여 기도했음을 암시한다.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ㅇ이르시기를 - 이에 해당하는 '에이레겐'은 최종 판결문에 쓰이
는 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상당히 선언적이고 종결적이다.
ㅇ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주님의 응답은 바울이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것으로 나
타난다. 혹자는 이것을 가리켜 '매우 친절한 거절'이라고 해석한다(Bengel). 아무튼
바울은 뼈아픈 '가시'를 그대로 지닌 체 만족해야 했다. 향편 바울은 이 서신에서 '은
혜'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본 구절에서의 '은혜'는 그가 사도가 되고
또 사도로서의 활동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래 '은혜'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매
개(媒介)로 하여 하나님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반드시 인간의 고
난이 제거되는 것만이 은헤를 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아픔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늘 주님을 의지하고 또 주님께서 은혜로 그가 실족
하지 않도록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더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ㅇ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 주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거절하신 이유는
당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다. 즉 바울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다면 그의 사
역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잘못 이해되어 자고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약점을 지님으로써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능력이 오
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어 겸손하게 된다. 이로써 겸손한 자에
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은혜의 원리가 그에게도 적용되어 바울은 끊임없이 그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되는 것이다.
ㅇ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머물게 - 여기서 '머물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
노세'의 의미는 '장막에 확고히 머무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까 바울의 약한 부분들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의 능력은 확고하고 변함없이 머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즐거이 약한 상태에 머무를 수 있고 자기의 약함을 도리어 기
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진정으로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약함이었
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들의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강함을 과시하는 적대자들은 결국 주님의 능력이 자기들에게 나타나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 된다.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ㅇ그리스도를 위하여...강함이니라 -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강해지려고
했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는 감추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가 영광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영광을 취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
인되신 그리스도가 영광 받도록 철저하게 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았으며 그 삶의 결
과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약하고 비천(卑賤)하게 보였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리
스도의 능력으로 충만해졌던 것이다.

11 내가 어리석은 자가 되었으나 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내가 너희에게 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ㅇ너희가 억지로 시킨 것이니 - 이제 바울은 그의 어리석은 자랑(1절)을 끝맺음 하면
서 자기가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결국 고린도 교인들의 침묵 때문이었음을 밝
히고 있다. 즉 적대자들이 여러 가지로 자랑을 하고, 상대적으로 바울을 비난했을 때,
당연히 바울을 옹호했어야 할 고린도 교인들이 침묵했으므로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자
기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밖에 없었다.
ㅇ칭찬을 받아야 마땅하도다 - 공동번역은 본 구절을 보다 구체적으로 번역하여 "사
실 여러분은 나를 인정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까?"로 되어있다. 바울이 고린
도 교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어리석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스스로를 자랑하기 전에
고린도 교인들이 먼저 바울을 인정했어야 했다. 사실 고린도 교인들이 스스로 그리스
도인으로 존재하는 것 그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해주는 산 증거였다(고전 3:6,
10;4:3, 4, 15). 그러나 그들이 사실을 망각하여, 당당하고 심지어 오만하기까지 한거
짓 사도들(11:20)에게 바울이 보잘 것 없고(11:7-11) 언변이 모자라는 자임을(10:1,
10;11:6) 침묵을 통해 그들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
ㅇ아무것도 아니나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 '아무것도 아니나'란 표현은 혹 적대자들
의 비난을 인정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위에서 말한 바대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그런 존재로 여길 수 있다는 사실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큰 사도들과 비교하여 조금도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이다(11:5 주석 참조).

12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ㅇ사도의 표 - 이는 사람이나 어떤 인간의 권위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도로서의 초자연적인 자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초자연적인 능력과 행위도
포함된다. 바울은 이전에 이미 몇 달 동안 적대자들의 훼방을 참으면서 고린도 지역에
선교(宣敎)함으로써 사도된 증거를 남겼다(행 18:6).
ㅇ참음 - 이것은 육체적인 피곤함과 외부로부터 오는 극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
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인내력을 가리킨다(6:4-6).
ㅇ표적과 기사와 능력 - 이것들은 각각 다른 유형의 능력을 나타낸다기보다는 일반적
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고려된 능력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즉 '표적'은 복음을 확증하
는 능력이며, '기사'는 하나님에 대하여 경외심을 갖도록 하는 능력이고, '능력'은 하
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는 초자연적인 힘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예수뿐
아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사역을 특징적으로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행 2:22, 43).
이는 바울의 사도직을 더욱 확증해준다.

13 내 자신이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한 일 밖에 다른 교회보다 부족하게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너희는 나의 이 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ㅇ공평치 못한 것을 용서하라 - 바울은 사도직에 관한 논의에서 사도직의 권리에로
그 초점을 옮겨가고 있는데, 이는 부드러운 풍자로 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선명하
게 드러내려는 독특한 표현법이다(11:5-12;고전 9:1-18). 그리고 이 풍자는 바울이 고
린도 교회에 재정적 부담을 주지 않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11:9). 바울은 사도에게 요
구되는 모든 자격을 구비했으나(1-4절, 12절) 복음 전도자에게 부여되는 재정 지원에
대한 권리는 행사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문제가 되었다. 아
마 문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긴 오해였을것이다. 하나는 바울이 재정적 권리를 요구
하지 않은 것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이 혹시 정당한 사도권이 없기 때문에 그
런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갖도록 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다른 교회에서
는 재정적 지원을 받으면서 고린도 교회에서만은 받지 않음으로써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이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미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으
리라는 추측이다. 바울은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폐가 되
지 않으려고 재정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바울의 불공평한 사랑의 표현으
로 오해되었기에 바울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14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끼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16 하여간 어떤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18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

19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ㅇ우리를...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 10장에서부터 본장에 이르도록 바울이 여
러 모로 자신에 대해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적대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말한 것이 혹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의 자기 변호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결
코 그는 배심원들 앞에 선 초라한 피고처럼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ㅇ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 이 표현은 2, 3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은 아시느니
라'는 말보다 더 강조적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로 자신의 결백성을
증거할 수 있으며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일꾼임을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입증
해 주실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ㅇ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 바울이 때로는 오해롤 받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교회의 덕 세우는 데서 비롯되었다
는 사실이다. 결국 바울이 자신을 변호한 것처럼 보인 것도 바울 자신에 대한 오해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오해로 이어겨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로 설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한 데서 비롯되었다.

20 내가 갈 때에 너희를 나의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원치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하며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ㅇ나의 원하는 것...너희의 원치 않는 것 - 만약 바울이 사전에 고린도 교인들의 오
해와 잘못된 가르침과 소문에 의해 오도된 상태를 바로잡지 않고 그들을 대면한다면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은 피차 기대에 어긋난 상태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결국 서로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 바울은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자기의 개인적인
오해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의 가르침에
서 떠나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고, 고린도 교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바울이 그들에
게 징계의 채찍을 휘두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ㅇ다툼 - 이느 경쟁이나 불화를 뜻하는데 다른 사도를 매장(埋葬)시키면서 자기를 높
이려는 거짓 사도들의 영향이 원인일 수 있다.
ㅇ시기 - 이는 잘못된 동기와 목적을 지향하는 그릇된 경쟁심에 근거한 미움의 감정
이다(갈 5:20).
ㅇ분냄 - 이는 이성없는 짐승과 같이 일시적인 흥분으로 분노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
한다. 거짓 사도들에 의해 고린도 교회가 미친 자들처럼 절제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ㅇ당짓는 것 - 개인적인 이기심의 발로로, 편협한 당파심으로 파벌을 조성하고 음모
꾸미는 것을 뜻한다. 당파에 대한 문제는 이미 첫번째 서신에서 언급되었는데(고전 3:
4) 이는 다툼, 시기, 그리고 분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전 3:3).
ㅇ중상함과 수근수근 하는 것 - 이 말은 남을 욕하고 험담하는 것을 가리키는 바, 당
파로 인해 고린도 교회내의 사랑이 식어졌음을 단적으로 입증해 준다.
ㅇ거만한 - 이는 자신만이 최고라고 하는 우월 의식으로 당파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
러 서로 자기의 당이 옳다고 주장함을 지적한 표현이다.
ㅇ어지러운 것 - 공동 번역에는 '난동을 부리는' 것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모임에서 조차 보기 힘든 폭력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이는 아마 자기
가 속한 왕이 그 교회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1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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