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후서

[스크랩] 고린도후서 (10 : 1~1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5

고린도후서 10장


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ㅇ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 - 공동번역이나 RSV에는 주어 '나
바울'이란 표현이 문장 맨 앞에 나와있다. 그것은 이 부분이 강조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여 말을 시작하는 경우는 갈 5:2와
살전 2:18 뿐인데 이 두 부분에서는 바울의 강하고 확신에 찬 진술이 이어진다. 한편
본 구절은 바울이 자신에 대해 직접적으로 나타낸 표현이 아니라 바울 자신을 공격하
는 자들이 그에 대해 비난한 내용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바울은 멀리 떨어져있어 편지를 쓸 때는 담대하고 강한 어
조로 말하지만 막상 얼굴을 대면하고 있을 때는 비굴하고 우유 부단하다는 비난을 받
았는데(10절; 고전 2:3), 본문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ㅇ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 바울이 사람들과 마주 대할 때 자신의 태도 및 요구
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비굴한 사람이라는 평은 사실 바울의 온유와 관용을 잘못 이
해한 것이었다. 이 온유(溫柔)와 관용(寬容)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
수께서는 자신을 온유한 자로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마 11:29)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고 말씀하셨다(마 5:5). 혹자는 예수에게 있어서 '온유함'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
타적인 사랑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보았다(Lowery). 또 혹자는
'온유함'을 기독교의 특징적인 덕목 또는 은사로 여겼다(Barrett, 갈 5:23;6:1; 골
3:12).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든지 간에 이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한 태도로
나타난다. 바울 자신의 삶이 예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때 그는 예수를 본받아 '온유
함'과 '관용'의 덕목으로 규정되는 삶을 살고자 했고 인내와 용서의 삶을 살고자 했
다. 바로 이러한 그의 삶이 적대자들에 의해 오해된 것이다.

2 또한 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을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려는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ㅇ우리를 육체대로 행하는 자 - 여기서 드러나는 바 바울에게 가해진 또 하나의 악의
적 모함은 그가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이기적인 욕망과 육체에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1:17;2:17;3:5;4:2;7:2).
ㅇ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하고 관대하게 살아가
려고 하지만 그에 대해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하여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
해서는 담대(膽大)하게 대하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만큼은 그렇
게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
인들에 대하여 감정을 통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로 하여금 강경한 태도로 대하는 일이 없도록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그
들 스스로 잘못을 고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3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ㅇ육체에 있어 - '육체에 있어'(엔 사르키)라는 표현은 바울이 육
체에 종속되어 있다거나 육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
로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기 때문이다(롬 8:9). 다
만 그 말을 '속된 세상안에서'(공동번역, 고전 5:10), 또는 '인간 존재의 일반적인 상
황 안에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ㅇ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이 비신앙인들 혹은 가짜 신
앙인들과 다른점은 그가 육의 제한성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바울이 싸움을 하는데 있어 자기 중심적인 동기나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권세(權勢)를 확립하기 위하여 싸우지 않음을 뜻한다.

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ㅇ우리의 싸우는 병기는...강력이라 - 앞절에서 말할 바 육체대로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바울이 싸우기 위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
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하는 강력
한 것이다(엡 6:11-17).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육체에 속한 병기 즉 세상적 학문,
인간적인 영향력, 권위있는 추천서(3:1), 사람을 현혹시키는 수사학적 달변(고전 2:1)
등 인간적인 것들을 가지고 맞서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병기 곧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온유하고 관대한 예수의 성품을 가지고 대응(對應)한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의 무기는 약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전능
으로 덧입혀질 때 그 어떤 대적도 당할 수 없게 된다(고전 2:4, 5).

5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ㅇ모든 이론을 파하며 - 본문에서 '이론'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스무스'
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도모(圖謀), 사고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허황된 이론'이나 '궤변'을 뜻한다. 이럴
경우 바울이 지금 공격의 초점으로 삼는 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이라기 보다는 외부에서
침입한 거짓 사도들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ㅇ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 본 구절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오만'(공동번역)을 의미한다. 이 교만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
기는 것이고(롬 12:16)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롬 1:18-23). 그리고 교만의 가장
치명적인 불행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ㅇ모든 생각을 사로잡아...복종케 하니 -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 '노에마'
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되고(빌 4:7),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2:11;3:14;11:3).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이를 공동번역에서는 더 구
체적으로 '계략'으로 번역하여, 본절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라고 해석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위압적(威壓的) 권능이 암시되어 있
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사로잡아'(아이크
말로티존테스)는 '전쟁 포로'를 가리키는 헬라어의 명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를 '복
종케 하니'와 합하여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편 본절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써 적대자들을 굴복시키
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따르려는 바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복종시
킨다 함은 육체의 병기를 가지고(4절) 육체의 방식으로(3절) 싸우는 자들이 상대를 완
전히 파탄(破綻)시키는 것과 달리 선한 목적으로 상대를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ㅇ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 - 여기서 '너희'는 고린도 교인들 일반을 가리키는 것
으로 추정된다. 본 구절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대리자인 바울에게 복종
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ㅇ모든 복종치 않는 것 - 이 말에 해당되는 자들은 외부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이나 끝까지 이들에게 동조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된
다. 그렇다면 이들이 복종치 않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것인가 ? 혹자는 이것
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맺어진 선교 영역에 대한 약속(갈 2:1-9)에 불복
종하고 자신들이 침범해서는 안될 사도 바울의 선교 영역에 침입한 것이라고 본다
(Barrett). 이것은 당시 초대 교회의 상황에 비춰볼 때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5절과의 관계에서 볼 때 선교 영역에 관한 합의에 대한 불복종보다는 하나님
의 말씀 곧 복음에 대한 불복종이 더 강조되어 있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바
울이 본절의 진술을 하게 된 배경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일단의 거짓 사도들이 예루살
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합의된 바 있는 선교 영역의 구분을 무시하고 바울의 선교
지인 고린도에 침입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언동을 하였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는 메시지를 전하였다(5절). 그리고 어느 정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이들에게 동조하였을 것이며, 이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
의 사도인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은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디도가 그곳을 다녀가 바울에게 보고할 때에 비해 그리 나아진 것이 없는 상황임을 말
해준다(8-9장).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ㅇ외모만 보는도다 - 이에 대해 공동번역은 '여러분은 사실을 똑바로 보십시오'로 의
역했다. 즉 본문은 바울의 의모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바울의 행위에 대한 적대자들
의 근시안적 판단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서 '외모'는 외형적
인 것으로(5:12) 천거서(3:1), 수사학적 언변(11:6), 권위에 찬 태도(11:20), 환상을
보는 것과 같은 신비적 체험(12:1-7)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있다(Harris).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외부적인 징표(徵表)들에 쉽게 현혹되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이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들에 현혹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ㅇ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 본 구절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빈디
쉬(Windisch)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네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1) 단순히 그리스도인됨을 의미할 수 있다. (2) 역사적인
예수와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킬 수 있다. (3) 사도적 신분을 가리킬 수 있다. (4) 천
적(天的)인 그리스도와의 신비주의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관계를 가리킬 수 있다. 이 가
운데 첫번째 견해에 의해서 절의 요지를 파악하면, 바울의 적대자가 틀림없는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자부한다면, 우리도(물론 바울을 가리킨다) 그에 뒤지
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적대자가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확신에 찬 선전을 했다면 그것은 은연중 바울
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에 대해 적대
자들이 논한 적이 없다. 따라서 첫번째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그리고 신비주의적인
연합에 대한 것도 아니기에 네번째 견해도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
람'이라는 표현은 특수한 의미에서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뜻한다고 볼 수 있고 결과
적으로 사도의 권위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고린도에 들어온 적대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한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에 속한 사
람들이라고 말했고 그럼으로써 자신들이야말로 권위있는 사도라는 것을 과시했으며 그
에 비해 바울은 권위있는 사도가 아니라고 말했거나 아니면 적어도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암시를 주었을 것이다.

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ㅇ주께서 주신 권세는...부끄럽지 아니하리라 - 진정한 권위는 성도들을 망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양육(養育)하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주님께 받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적대자들이 자랑하는 것처럼 자랑하
자면 아무리 지나쳐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
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1:6;11:21-23). 하나님의 진리만을 전하였고(2:17), 항상 공평하게 행하였으며
(11:1-15), 무엇보다도 고린도 교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했다(7:3). 만약 누가 사
도라고 자처하면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면서 자신의
권세를 내세운다면 그 사람은 결코 사도가 아니다. 도리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 3:17).

9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지 않게 함이니

ㅇ편지들로...않게 함이니 - 본절은 앞절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본문의 뜻
은 바울이 편지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협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
이다. 그렇다면 앞에서(8절)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말한것과 본절은 어떻게 연결되
는가 ? 이것은 바울이 보낸 편지에 대해, 그가 편지를 쓸 때는 강하고 담대한 것 같으
나 만나서 말할 때는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이 있었다는 10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한다. 아마 그 편지는 '가슴아픈 방문' 후에 쓴 '준엄한 편지'였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적대자들은 바울이 면전(面前)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편지로 위협
하려 한다고 악선전을 하였을 것이다. 이런 비난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바울은 미리
해명하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에게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으나 편지를 통해 위협하는
것과 갈은 방식으로 그 권위가 행사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결코 그는
그런 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왜냐하면 권위는 성도를 세
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위해서는 행사되지 않아야하기 때문이다.

10 저희 말이 그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하니

ㅇ그 편지들은...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 - 바울이 위협용 편지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랐던 그 편지는 곧 '준엄한 편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편
지를 쓸때의 상황이 그랬던 만큼 그 내용이 매우 강한 어조로 쓰여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그러나 적대자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나 그렇게 강하게 말할 뿐 직접 만
나보면 그의 외모가 약해보일 뿐더러 말도 시원치 않다는 악선전을 하였다. 본문의 표
현대로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바울의 풍채가 나약해 보였음
을 말하는데 실제로 바울은 고질적이고 만성적 질병을 갖고 있었다(12:7; 갈 4:13-14)
또한 초대 기독교 전승(傳承)에 따르면 바울은 병을 갖고 있는 것 외에도 외모가 그리
보기에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그 한 예로 2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
울과 데클라 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작은 키와 왜소한 체형, 'O'자형 다리와 양쪽 다
찌부러진 눈썹, 그리고 매부리 코를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런 기록이 얼마만큼
의 사실성을 지녔는지 분명치 않으나 바울의 외양이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런 외부적인 것들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었겠으나,그것이 바울의 세
련되지 못한 행동과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한 말솜씨(11:6) 등과 연결되어 그
의 사도적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한 악선전의 재료로 사용되기에는 충분했다.

11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자가 어떠한 자이면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자도 그와 같은 자인줄 알라

ㅇ이런 사람은...알라 -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깎아 내리려고 악선전하는 자들은 바
울이 결코 이중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떨어져 있을 때나 함
께 있을 때나 언제나 온유하고 관대한 면에서(1절)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편지로
쓴 말에 대해서는 만났을 때에도 그대로 실행할 것이다(6절;13:2, 10).

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ㅇ자기를 칭찬하는 자로...없노라 - 본문에서 바울은 적대자들을 가리켜 '자기를 칭
찬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찬(自讚)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아마 자기들을 내세우기 위한 추천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적대자들은 추천서의 권
위에 의존하여 자기들이 진정한 사도임을 과시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지만 바울은 스
스로를 추천하지도 않고 추천서에 의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3:1;5:12). 적대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사도라고 자랑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사도
이다(갈 1:1). 그들은 비교를 통해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것
이 어리석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ㅇ자기로서...헤아리고...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 사실 적대자들이 만든 표준이나
척도 즉 인간적인 지혜, 사도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위압적인 태도, 수사학적인 웅
변술 등은 당시에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갖는 것이었다(Barrett)). 그러나 바울은 그런
기준들을 이미 오래 전에 하찮은 것으로 버렸다(4:5; 고전 2:1-5). 바울이 보기에 그
런 척도들은 천박한 것이었고 그 척도를 가지고 자신을 추정하고 과시하는 것이 지극
히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13 그러나 우리는 분량 밖의 자랑을 하지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ㅇ분량으로 나눠 주신 그 분량의 한계 - 바울은 적대자들의 자랑이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선교의 영역을 무시한 것이므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노노스'는 '길이를 재는 막대기',
'줄자'라는 뜻인데 규범이나 표준의 의미로도 쓰이고(갈 6:16), 일정하게 한정된 영역
을 가리키기도 한다(10:14-16). 본절에서 이 말은 후자의 의미이며 바울이 여기서 문
제삼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교 영역의 준수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
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고(행 9:15; 롬 1:5;15:18), 그에게 이방(異邦)을 선교
영역으로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도 합의된 바 있다(갈 2:9).
이런 한계에 입각하여 바울은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한 곳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
다(롬 15:20).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복음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 것은 하나님
께서 정해주신 한계를 지키면서 행한 것이었다

14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ㅇ미치지 못할 자로서...이른 것이라 - 본절에는 두 가지 요점이 제시되어 있는데 첫
째는 바울이 고린도에 갈 자격이 있고 고린도는 바울이 정당하게 선교할 수 있는 지역
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고린도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바울 자신이라는 점이다. 여
기에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남의 선교 영역에 손을 뻗치고 있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
다. 게다가 이들은 참 복음이 아닌 것을 가지고 들어와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
다(11:4).

15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
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

ㅇ남의 수고를 가지고...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 바울은 결코 남이 수고한 것의 결과
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롬 15:20). 고린도 교회는 다른 어느 누구도 복음
을 전하지 않았을 때 바울이 최초로 복음을 전하여 설립되었기에 고린도에 교인들이
있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신 결과였다.그러나 적대자들은 남
의 선교 영역에 들어와서 바울의 업적이 자기들의 것인 양 자랑하였다.
ㅇ믿음이 더할수록...바라노라 - 바울이 바라는 것은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여 믿음을
갖게된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과 비례하여 자신의 선교영역이 더욱 확장되기
를 바라는 것이었고(롬 15:23, 24), 그것과 더불어 복음으로 말미암는 그의 영향력이
확대되기를 원했다. 이로써 그는 자기에 대한 성도들의 존경도 심화되기를 원했던 것
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그의 선교 영역을 준수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16절).

16 이는 남의 한계 안에 예비한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경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ㅇ너희 지경을 넘어 - 본문의 의미는 고린도 지역을 넘어 로마와 서바나에 이르는 지
역에까지 복음을 증거하려 한다는 것이다(행 19:21; 롬 15:19, 22-24). 그 지역들은
남의 선교 영역이 아니며 그 누구도 복음을 증거하지 않은 불모지(不毛地)였다.

17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ㅇ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 본절은 고전 1:31에서와 같이 렘 9:22-24
를 인용한 것인데, 그 내용은 사람이 자기가 가진 바 지혜나 용맹이나 부함을 자랑치
말고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며,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자신을 자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 논
리가 적용될 수 있다. 누구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이고 참된 사도라면 그는 자기를 자랑
하기보다는 자기를 통해 섭리하신 주님을 자랑할 것이다(공동번역, RSV). 바울은 적대
자들의 허위적 자랑에 대응하기 위해 자신의 업적을 정당화 하였지만 그는 그런 것이
궁극적으로는 어리석은 일임을 알고 있다. 이런점에서 본절은 바울이 자랑하는 자가
된 것은 주를 더 자랑하기 위함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18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ㅇ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 본절 '자랑'에 관한 주제의 핵심이 드러나고 있다. 바
울은 진정으로 자신을 통해 인정받아야 할 분이 누구인지 알고있다. 그렇기 때문에 적
대자들이 자기들이 만든 기준을 가지고 자신들을 자랑하는 행위가 어리석다는 것도 알
고 있었으므로, 결코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다(12절). 참으로 주님께 인정
받는 사도는 자신이 언젠가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을 알아(5:10) 자중하는 자이며 사
람들로부터 안정받기보다는(마 6:2 ,6, 16) 하나님께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이다(고전
4:5; 롬 2:29). 고린도 교인들은 자기들 앞에 전개되는 일들을 똑바로 보아야 하며 이
러한 기준에 의해 바울과 적대자들 중 누가 진정으로 권위있는 사도인지 구별할 수 있
어야 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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