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고린도후서

[스크랩] 고린도후서 (6 : 1~18)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55

고린도후서 6장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ㅇ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르군테스 데 카이'
는 문자적으로 '함께 일하는 자로서'라는 의
미이다. 여기서 '쉬네르군테스'는 현재 분사로서 '누구와 함께 일하다' 라는 의미를
지니므로 그 대상을 필요로 하나 헬라어 본문에는 이 대상이 언급되지 않는다. 그 대
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다른 교사들이다(Plummer).
이 견해는 타당치 않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1인칭 복수 주어 '우리'를 사용하
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그 자신을 다른 교사들과 구분하려 했다면 여기서 1인
칭 단수 주어인 '내가'를 사용했을 것이다. (2) 고린도 교인들이다(Chrysostom,
Allo). 이 견해는 문맥상 타당하지 않다. 바울은 바로 앞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
신을 진정한 복음 사역자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고(5:11-13), 이제 다시 이러한 권
면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3-12절;7:2-7). (3) 하나님이다(Calvin, Hodge,
Tasker). 전후 문맥상 이 견해가 지지를 받는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의
식을 가지고 있었고(고전 3:9), 5:20에서 그 자신이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도록 하나님
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고 고백하였으며 본절 하반절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
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나님의 사자(使者)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Martin).
ㅇ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본문의 '헛되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케논'은 '빈', '공허한'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구
원하시기 위하여 죽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참여하여 그리스도를 위하
여 사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에는(5:15-17), 개인의 결단과 선택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편 본문의 말씀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사항이 추론
(推論)된다. 하나는,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의 영과 육을 더럽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신
을 깨끗하게 지키는 것에(7:1;12:20, 21)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 중 일부가 그 가르침에 현혹되어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으리라는 것이
다(11:4, Bruce).

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ㅇ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 이 구절은 사 49:8의
인용이다. 사 49:8은 여호와께서 그의 종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으로 바벨론의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이 놓임을 받고 완전히 회복된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 이제 바울은
이 예언의 말씀을 복음 시대에 적용하고 있다. 혹자는 바울의 이 인용이 뜻하는 바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Lowery), 그보다는 하
나님의 구원이 성취되는 때가 도래(到來)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
하다(Harris, Barrett). 바울은 본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때가
도래했음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 때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다(Tasker).
ㅇ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본절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 바, 구원의 때가 도래
했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바로 '지금'(뉜) 바울이 전하는 화
해의 복음을(5:18-21) 받아들임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이 '때'는 항상 지속되지는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같이 임할 것이다(살전 5:2).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선포하는 그
순간은 곧 종말론적인 '결단의 때'라고 할 수 있다((Cullmann). 또한 이 '결단의 때'
는 각 개인에게 올바로 선택해야 할 책임이 부과된 '책임의 때'이다.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라는 외침을 듣는 사람들이 그 메시지와 메시지를 전하는 자들을 경멸한다면 그것
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며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Hughes).

3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ㅇ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거리끼지 않게 하고 - 바울은 5:12에서 언
급한 바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훼방(毁謗)
받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았던 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에 거리
끼지 않도록 노력했다. 여기서 '거리끼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스코펜'
은 '실족할 계기', '범죄할 기회', '걸려 넘어짐'의 뜻을 갖는다
(stumbling block, NIV) 바울은 자신의 인격적인 문제로 인해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방해받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바울은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가령
그는 자신을 자랑하는 자라거나(3:1), 어리석은 자라거나(11:16), 미쳤다는 오해를 받
았다(행 26:24).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직책을 수행할 때 발생한 모든 문제
들은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일 뿐(고전 1:23) 바울의 인격적인 문제나 그의 잘못
된 신앙 생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절의 '훼방을 받지'에 해당하는 헬라
어 '모메데'는 '조롱을 받다'는 뜻을 지닌 헬라어 동사 '모마오마이'
의 가정법으로서 '의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
동사가 본래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비난', '책망'이었다. 이 동사의 어근인 '모모
스'는 헬라의 조롱과 냉소의 신(Momus)을 가리켰던 것이다. 바울은 고
린도 교인들이 다른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迷惑)되어 자신의 진실성을 의심했던 행위
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Martin).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ㅇ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감히
'자천'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자기를 천거(薦擧)할 의사가 없다고 말한 것(3:1)
과 모순되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이 자신을 천거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과시하거나, 어떤 외부적 권위에 의지하여 자신을 보증 받고자 하지 않
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지금 바울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이나 인간적 권위에 의존하
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에서 사
역하며 그리고 그것을 위해 그가 견디어 낸 무수한 고난들에 의거하여 자신의 정당성
을 말하는 것은 앞의 언급과(3:1) 모순되지 않는다. 특히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
신이 당한 곤경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자신에 대한 천거는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적 행
동으로 보여주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ㅇ많이 견디는 것 - '견디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모네'
는 일반적으로 '인내'를 뜻하나,이 말 속에는 시련을 체념적으로 수용하거나 수동적으
로 참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어 낸다는 뜻이 있다. '많이 견디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홉 가지로 열거되는데(4, 5절), 이것들은 세 부분으로 분류
될 수 있다(Bruce, Harris). 첫번째로 본절에는 일반적인 시련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환난과 궁핍과 곤난이 그것이다.
ㅇ환난(들립세신)은 본서에서 특징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로(1:4,
8;2:4;4:17;7:4;8:2, 13),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압박받는 체험을 말한다
(1:4-11).
ㅇ궁핍(아낭카이스)은 역경이 끊임없이 닥쳐오는 상황에서 겪는 고통을 말한다
(행 20:34).
ㅇ곤란(스테노코리아이스)은 좌절을 강요하는 극한 상황을 가리킨다(1:7, 8;4:8).

5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ㅇ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 - 이것은 두번째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
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육체에 가해지는 핍박들이다. '매맞음', '갇힘', '요란한 것'은
사도행전에 상세히 나타나는데 사실상 그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행 13:50;16:19,
22;20:34).
ㅇ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 이것들은 세번째로 분류되는 것으로, 외부로
부터 강요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짊어진
것들이다. '수고로움'은 열성적으로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한 일과, 바울이 교회에 재
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노동을 했던 것
(행 18:3;살전 2:9)을 가리키고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은 영적인 내핍 훈련을 위
해서가 아니라, 자고 살고 먹고 싶은 상태에서 그러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11:27). 바
울이 이런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마주쳐 견디어 나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미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기꺼이 그렇게 했다(5:13).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ㅇ5절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시련들을 견디어 나간 것이 사도의 외적 자질이라면 본
절과 7절에 열거되는 항목들은 사도의 직분을 이행하는 동안 줄곧 지향했던 내적인 자
질을 말한다.
ㅇ깨끗함(하그노테티) - 영적인 순결 즉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과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실을 가리킨다(살전 2:10).
ㅇ지식 - 여기서 '지식'(그노세이)의 의미를 분명히 가리기는 쉽
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구원에
대한 지식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5:20, Hughes).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시대
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구속적 의미를 분명히 알고 있
다(5:16, 18-20). 뿐만 아니라 이러한 지식을 가진 성도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
의 뜻을 민감하게 분별하여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식'은 하
나님의 구속사에 대한 삶과 그 앎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 모두를 포괄한다(Barrett,
Kelly).
ㅇ오래 참음(마크로뒤미아) - 혹자는 이를 모욕이나 상해
(傷害)를 당했을 때 노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으로 이해한다(Plummer). 또
한 혹자는 본절의 '마크로뒤미아'를 4절의 '휘포모네'('견디는
것')와 구별하여 '견디는것'은 교회 밖의 대적들로부터 오는 시련에 대한 인내를 가리
키며, '오래 참음'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Hughes). 실제로 바울은 사심 없는 순수한 동기와 목숨을 돌보
지 않는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생겨나는 오해와 불신, 분란과 열매 맺지 못함
등에 대해 끊임없이 참고 언제나 사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엡 4:2;골 1:11;딤후 4:2).
ㅇ자비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레스토테티'는 하나님
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결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태도로 대하는 것을 말한다
(갈 5:22;엡 2:7). 바울은 고전 13:4에서 사랑을 '오래참고 온유하며'라고 묘사했던
바 실제로 그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다른 사람을 온유하게 대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혹자는 본절의 '자비함'을 '행동에 있어서의 선함'으로 보았던 바(Tasker),
이는 성령께서 주신 결과요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유래되는 삶을 변화시키는 증거이
다(Martin).
ㅇ성령의 감화 - 혹자는 본절의 '성령'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티'
를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으로 이해하나(Barrett) 이는 '감화'에 해당하는 헬
라어 '하기오'를 동반하므로 타당치 않다. '프뉴마티 하기오'는 그 용법
상 '성령'(Holy spirit, NIV)을 의미하며, 여기에 특히 정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능력' 또는 '성령의 은사'(NEB)를 암시한다(Hughes, Tasker). 바울이 본절에서 이 용
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변증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서, 고린도 교인들이 문제삼고 있
는 그의 인간적 유약함은 바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실로 바울의 삶은 성령의 능력으로 점철된 삶이었다(롬 15:18,19).
ㅇ거짓이 없는 사랑 - 이는 성령의 사역의 최대 열매이다(Bengel). 여기서 '거짓이
없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뉘포크리토'는 부정 접두어
'아'와 '가장하다', '속이다'는 뜻을 가진 '휘포크리토스'
가 합성된 단어로 '위선됨이 없이'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
의 사랑은 전적으로 위선이 아닌 순수한 것이었다(12:15;고전 8:1).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ㅇ진리의 말씀 - 복음 곧 화해의 말씀(5:19)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바울은 적대자
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선포하였다(4:2). 바울이 선
포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즉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설교와
행위 속에 현시(現視)됨으로써 증명된다(롬 15:19;고전 1:18;2:4,5).
ㅇ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영적 정비가 완
벽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잘 사용하는 로마 군대의 무장법(롬 13:12;엡
6:13-17)을 비유로 들고 있다. 여기서 '의의 병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치 않으
나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의' 즉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고결한 인격,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포괄한다고 본다(Harris, Tasker). '좌우하고'에 해당하는 헬
라어 '톤 덱시온 카이 아리스테론'
은 문자적으로 '오른손과 왼손에'라는 의미이다(in the right hand and in the
left, NIV). 이는 양손이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어 언제라도 적의 공격에 대해 적절하
게 대응할 수 있는 태세가 완비되어 있음을 말한다(Barrett). 이 묘사는 마치 적군의
화전(火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두 겹의 나무에 짐승의 가죽을 덮어서 만든
방패를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검을 든 로마 병사를 연상케 한다.바울은 엡 6:16,17
에서 그리스도인의 무장으로서, 공격용으로 '성령의 검'과 방어용으로 '믿음의 방패'
를 갖출 것을 언급하였다.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ㅇ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 바울은 그의 사도 직무를 수행하면서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으나(갈 4:14) 오해와 비방을 받을 때도 많았다(10:10;11:23-33;고전 4:10;
빌 1:15-18;살후 2:2).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한 것으로 여
기지 않았기에 어떠한 난관에 부딪쳐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직책(5:18)을 묵묵히
수행할 수 있었다.
ㅇ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 본문은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
나'(공동번역)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뒤에서 비방(誹謗)하는 자들이 있음에
도 불구하고 성실하고 사랑하는 태도로 일관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좋은 평가를 받
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결국 교만과 자기 만족으로 이끌
뿐이므로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서 '악한 평판이 잘못되었다 하더
라도 결코 그를 해칠 수 없고, 좋은 평판이 참되다 할지라도 결코 그를 비뚤어지게 할
수 없다'는 결연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ㅇ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 예수께서도 생전에 미혹하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
었다(마 27:63;요 7:12).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그의 대적들은 그
를 가리켜 거짓말을 한다고 비난했고(고전 15:15),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속임수라는 비난을 하였다(12:16-18).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결코 거짓말하는 자가 아님을 하나님 앞에서 강력하게 증거한다(4:2;5:11;11:31).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ㅇ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 '무명한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그노우메노이'
는 '무시당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바울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바울이 무시당했다는 것은 아마 그의 사도직과 관
련이 있을 것이다(고전 9:1;15:8, 9). 고린도 교회에는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이 바울
의 사도직을 부인하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반(反)하는 자기들의 견해를 주입시키
려 하였던 상황이 전개되었었다(10-13장). 그리고 사실상 바울은, 열 한 사도들처럼
생전의 예수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외부적 조건을 갖추지는 못하였으나 모든 사도
직의 유일한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도직은 부여받았다(갈 1:1, 12, 16). 뿐만 아
니라 예루살렘의 중심 사도로부터도 인정받았고 (갈 2:7, 9),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인
정받았음이 틀림없다(5:11).
ㅇ죽는 자 같으나...살고 - 본절은 바울의 역설적인 표현으로 실제적인 의미와 신학
적인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바울은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고
(행 14:19;고전 15:30) 거의 죽게 된 상황에까지 이르렀었다(1:8, 9). 또한 그는 예수
의 죽음을 그의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4:10-12). 여기에는 자기 안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신학적 의미가 있다(5:14, 15;롬 6:1-14;갈 2:20). 본절
에서 바울은 그 자신이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께 헌신(獻身)된 도구가 되었음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지시키고 있다(Martin).
ㅇ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징계는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행동에 비유되는 바,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
심의 증거로 이해되었다(욥 5:17;시 94:12;119:67;잠 3:11, 12;렘 31:18, 19등). 본절
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그와 같이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바울의 적
대자들은 바울이 여러 가지 고통과 시련을 당하는 것은 그가 과거에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심히 핍박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고
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랑의 표시임을 인식하였고
실제의 삶에서 이를 체험하였다(1:9;4:11;고전 11:32).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자로다

ㅇ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 적대자들의 사도 시비, 그것에 의해 흔들렸던
일부의 고린도 교인들, 그리고 전체적인 이스라엘의 불신앙 등은 바울을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늘 기뻐하였고(2:3;7:4;롬 12:12;고전 16:17)
그의 성도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인 특징이다(Barrett).
ㅇ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 바울은 세상의 부(富)를 거의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경제적인 가난의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
가 고린도 교인들의 영육이 부해지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교회의 보수받기를 피했
지만(5절;11:7-10;고전 9:12, 15, 18), 그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영적인 의미의 가
난이다(Collange).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였는가 ? (1) 바울
은 그리스도를 아는 고귀한 지식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부요한 자라고 생각하였다(빌
3:8). 바울이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하나님
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인간의 부요함을 위해서 스스로 가난한자가 되셨다(8:9).
ㅇ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바울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세상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관한
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이 세대'가 진행되는 동안만 쓸모 있고,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에는 전혀 가치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
었고 '새로운 세대'를 얻었으므로 사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다(고전 3:21, 22).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고전 3:23)라는
의미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 즉 예수 그리
스도를 주인으로 섬기기 때문에 오직 주 예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심을 믿
고 살아간다(Barrett). 한편 본절의 내용은 영적인 것에 자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의
초점을 맞춘 철저한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 사도의 자화상(自畵像)을 보여준다.
바울은 실로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하나님의 신실한 사역
자였다.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ㅇ고린도인들이여 - 혹자는 이 칭호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관심을
나타낸다고 하나(Chrysostom), 그 용법상 이는 타당치 않다. 오히려 바울이 편지를 쓸
때 독자들의 칭호를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로 매우 격한 감정의 상태에서 그런
표현을 쓴다(Collange). 가령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유대주의 교사들에 미혹되어 율법
으로 회귀하는 가슴 아픈 상황에 직면하여(갈 3:1),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친절을
칭찬할 때(빌 4:15) 독자들의 칭호를 직접 불렀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인들이여'라
고 불렀을 때, 그의 심정은 아마 진리의 영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충만하여 어떤 문제
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ㅇ우리의 입이 열리고 - 그리하여 바울은 '숨김없이 다 말하였다'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본문을 '나는 여러분에게 숨김없이 다 말하였고'로 번역하고 있다.
실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항상 공개적이었고 신실했다
(1:12-14;4:2).
ㅇ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정직하게 숨김없이 말하였고
그들을 향하여 마음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어떠한 비밀도 없었다. 또
한 그는 고린도 교인들의 어떠한 잘못도 자비로 덮을 수 있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7:3).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ㅇ너희가...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 본절은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는 뜻
이다(공동번역). 분명히 바울과 고린도 교인들 사이가 소원(疏遠)해졌다. 이는 아마도
거짓 교사들이 바울이 그들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선동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1:11). 아무튼 문제는 바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이 좁아진데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거나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기보다는 자신
이 여전히 예전처럼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부드럽게 호소하고 있다
(Barker).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ㅇ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
적 자녀들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Hughes, Tasker). 이처럼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
랑을 주장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다(Plummer).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에게 자존심
이나 권위를 내세워 옹졸해지는 법이 없듯이 바울 자신도 단순히 가르치는 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ㅇ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 바울은 오해를 하고 불평을 한 고린도 교
인들을 나무라지 않고 그에게 사랑의 마음을 가지라고 호소하고 있다. 이는 사도의 권
위로써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주는 호소였다. 혹자는 바울이 본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오직 '공정하게 행동할 것'(fair play)을 요청하고 있다고 본다
(Bruce).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ㅇ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마음을 열
지 못하는 것(13절)이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했
을까 ? 갑자기 서신의 주제가 바울과 고린도 교인과의 관계에서, 고린도 교인들과 믿
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본절의 '믿지 않는 자'
(아피스토이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세 가지 견
해가 있다. (1) 바울의 적대자들을 가리킨다(Rensberger, Collange). 이 견해를 주장
하는 자들은 근거로서 본서의 주제는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을 대적하는 거
짓 사도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2) 문자 그대로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Filson, Barrett). (3) 믿음의 순수성을 해치는 세상과의 타협을 가리킨다(Hughes).
(1), (2), (3)의 견해가 모두 일면 타당성을 지니나, '아피스토이스'의 어의상, 그리
고 전후 문맥상 (2)와 (3)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한편 성도들의 순결을 요구하는
본문은 신 22:10의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와 레 19:19의 '네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라는 구약의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문의 '멍에'는 믿음의 순수성을
저해하는 불신자와의 결혼(고전 7:39), 우상숭배(고전 10:14), 도덕적 타락(고전
6:8),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11:4)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바
울은 본절을 통해 신앙과 윤리적인 면에 있어서 성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
ㅇ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 '불법'(아노미아)은 불신자와 적그
리스도의 특징이다(롬 6:19;살후 2:3, 7). 반면에 '의'
(디카이오쉬네)는 신자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의 '의'는 그리스도와
의 관계에서 칭의의 차원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Martin, Collange). 이와 관련하여, 혹자는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이
쿰란 문헌에 나타난다는 점에 착안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직면한 문제는 율법주
의가 아니라 '불의'였다고 추론하기도 한다(Schlatter). 그러나 바레트(Barrett)는 이
견해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가 윤리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법은 바울
에게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며(7절;11:15;롬 6:13-19;빌 1:11), 바울이 '의'를 윤리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쿰란 문헌의 영향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영향이라고 보기 때문이
다.
ㅇ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 바울은 신자들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극단
적인 대조법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다. '사귀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니아'
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일치의 교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
던 말이다(9:13;고전 1:9;10:16). 빛과 어두움이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은 구
원 얻는 자들과 멸망하는 자들(2:15)이 동반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꼐
서 '세상의 빛'이시며(요 8:12;9:5) 세상은 멸망으로 귀착할 어둠에 속하기 때문이다
(마 8:12;25:30).

15 그리스도와 밸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ㅇ야알'의 음역으로 본래는 '무가치함', '악함'을 뜻하는 말이다. 구약성
경에서 이 말은 매우 나쁜 뜻으로 사용되었다. 예컨대, 개인에게 적용될 때는 불량하
거나, 방탕하고, 거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고(삿 19:22;삼상 10:27), 다른 단어와 함
께 사용될 때는 , '악심을 품은 허위 선전'을 뜻하는 '벨리알의 말'(신 15:9;시
41:8;101:3), '거짓 증언자'를 뜻하는 '벨리알의 증인'(잠 19:28), '음모를 꾸미는
자'를 의미하는 '벨리알의 충고자'(나 1:11) 등으로 적용되었다. 이 말이 사해 사본에
서는 '악마의 왕'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그리스
도를 대적하는 '사단'을 가리킨다고 본다(Robertson, Barrett).
ㅇ믿는 자와 믿지 않는자가 어찌 상관하며 - '믿지 않는자'(아피
스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킬 때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이다(14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서로 상충하지 않은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근본적으
로 병립할 수 없으며, 운명을 같이 할 수가 없다(2:16).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ㅇ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오 -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14절)는 주제에 대한 논증이 본절에서 절정을 이루며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
는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고 있다. 본문에서 '일치'로 번역된 헬라어 '슁카타데시스'
는 '함께 찬성의 투표를 하여 승인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과 우상이 함께 동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라.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언급한 바 있
다(고전 3:16;6:19). '성전'에 해당하는 헬라어 '나오스'는 구약 시대의
성전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지성소'를 가리킨다. 성도들의 몸이 곧
하나님이 온전히 임재하시는 성전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우상이 있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야 한다(고전 10:14).
ㅇ하나님께서 가라사대 - 바울은 자기가 진술한 것들에 대한 정당성을 더 강화시키기
위하여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레 26:11, 12이며
같은 내용을 가지는 구약의 구절들은 출 25:8;29:43-46;삼하 7:14, 27;사 52:4,11;겔
20:34 등이다. 이와 같은 구절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순결을 강조하는 것들
이며 새로운 관계에 대한 약속이기도 하다. 사실상 바울은 이 약속이 그리스도가 거하
도록 허락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ㅇ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 본문은 이사야가
그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떠나 그곳의 이교주의와 단절하라고 권고한 사 52:11의 인
용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기 위해서는 백성으로서의 순결성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성전이려면 음행, 토색, 우상숭배 등으
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고전 5:1-13).
ㅇ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 개역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헬라어 본문에는 본
구절 앞에 '그러면'(카이)이 있다. 이는 앞의 조건이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영접한다는 의미가 된다.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ㅇ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 본절은 바울이 구약성경의
여러 구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삼하 7:14;사 43:6;렘 31:9).여기서 주목
할 만한 것은 바울이 삼하 7:14과 사 43:6을 나름대로 수정 인용함으로써 '남자'
(휘우스, '아들')와 '여자'(뒤가테라스, '딸')를 명시
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을 때 남
자들과 여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갖게 된다(갈
3:28;4:5, 6;엡 2:18).
ㅇ전능하신 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 판토크라토르'
는 삼하 7:8;렘 51:7등에 나오는 '야웨 쉐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에 대한 70인역(LXX)의 인용으로 바울 서신에서는 본절에서
만 발견된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약속
의 성취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Martin).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