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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5 : 1~42)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2
  사도행전 5장


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ㅇ누가가 여기까지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온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
여진 그 단체가 사람들의 단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사들의 단체와 같았다는 사실
이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돈뿐 아니라  그
들의 토지까지도 내던졌다는 것은 견줄데 없는 덕행이었다. 이제 그는 실제로  다음의
사실을 보여준다. 즉 사단은 이 거룩한 고단(holy community)에 자입할 계략을 고안해
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고상한 미덕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교묘하게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놀라운 위선의 방편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
단은 공공연한 싸움에서 승산이 별로 없을 때 그런 위선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
는 방법을 삼는 것은 물론이다.
ㅇ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성령의 의도하시는 바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
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그는 첫째로 마음의 정절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
는 것인가 또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인가 그리고
둘째로는 교회에서의 순결하고 거룩한 정치형태를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가를 입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요점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에게 과하
신 형벌인 것이다. 그 당시에 그 중한 형벌이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처럼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가 성도의 겉치레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로 농락한
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불성실을 용납하실 수가 없다는 훌륭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
냐하면 우리가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서 전체면의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누가는 거짓된
헌금으로써 하나님과 교회를 기만하려고한 단 한 가지 죄 때문에  아나니아를  비난한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만의 배후에는 많은 악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비뚤어진 마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없
이 하나님을 멸시한 일, 둘째 그는 하나님에게 바쳐지기로 스스로 표명한 것의 일부를
절취함으로써 신성을 모독하는 부정을 자행한 일, 세째 그릇된 허영심과  야심,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이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환심을
사고자 한 일, 네째 불신앙,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러한 범행의 길
에 발길을 내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앙적이고 거룩한 계획을  망쳐놓
은 일, 여섯째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위선이 그 자체 안에 있는 큰 죄
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그의 계획적이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첨가될  수
밖에 없다.
ㅇ아나니아가 자기의 토지의 값의 절반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표면상으로
는 훌륭하고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고르게 분배해 주는 일은 실상 큰 미덕이다. 그러나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
하신다"(잠15:8) 그리고 마음의 지실함이 동반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과부가 드린 동전 두 푼을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저대한 재
산에서 끄집어낸 큰 액수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이
다(눅21:2)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에게서 매우 강렬한 징벌을 예로 만드신 이유이다.   
   이제 개개의 요점을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한다.

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ㅇ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 야심이라는 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  보
라. 아나니아는 자기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는 돈에 욕심이 있는 자이지만 그러면서도 사
람들 가운데서 스스로 좋은 명망()을 얻어내기 위하여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내놓
았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에 대하여, 또는  하나
님께서 그 거짓으로 인하여 자기를 형벌하실 것이라는 일에 대하여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실제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눈보다도 사도들의 발을 더  존경한  것이
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세인의 눈길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
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가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theatri plausum)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충고해 주셨다. 즉 우리가 구제할 때에  오
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거시 온당한 일이라는 것이다(마6:3)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ㅇ베드로가 가로되 - 베드로는 어떻게 아나니아의 사기행위를 알게 되었던가? 의시없
이 그것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사도들이 어느  정도까
지는 하나님을 대표하였고(sustinuisse Dei personam) 또 그의  대리로  행동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제 만일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죽어야 할 사람의  입을  이용하셔서,
비록 사람이 거짓된 미덕의 외관 속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그 위선자를 그처럼  즉석
에서 타격을 가한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출두하게 될  때
에 그 나팔의 날카로운 음향을 동반한 하나님 자신의 음성 앞에 어떻게 위선된 인간들
이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
에 가득 찼다고 말함으로써 그 범죄의 가공할 만한 것임을 지적해 준다. 왜냐하면  사
단의 독아에 마음이 찔림을 받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또 많은 유혹이 이들 개
개인에게 몰래 스며와서 그들의 마음속까지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이 그  마
음을 잡게 될 때에 마치 하나님은 거기서 추방되는 것처럼 되기 때문에 사단이 그  사
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머물만한 자리가 없을 정도
로 그가 사단에게 넘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표지인  것이
다. 거짓말한 일에 뒤따르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즉 그가 성령을 소유
한 것 같은 거짓 겉모양을 지은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가 성령을 거스려 거짓말한
것이거나 어느 것일 것이다. 그런데 실은(헬라어에) 문자적으로는 '성령을 속인 것'이
다(Spiritum mentiri) 그러나 헬라어의 *                 (프슈-데스다이)라는  말은
이중의 대격()에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본문에 더 적합
하므로 나는 차라리 아나니아가 자기의 불신행위로 성령을 조롱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조금후에  아나니아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비난함으로써 이를 확인한 것이다.  그러므
로 우리는 위선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대단히 자신을 수호하는  일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위선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악이요, 또 이를테면 속
담에 있듯이 생 눈을 빼가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조롱으로
써만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은 그 마음이 사단에
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은 자못 지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식별력과 이성을 잃지 않고서야 감히 그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모욕적인  행위를
가질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괴물에  관한  일인
양 그를 심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류의 무분별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ㅇ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 그에게는 아무런 필요 요건이 없었는데도 죄를  범하였
다는 그 사실이 그의 죄과를 더욱 크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그 범죄가 어떤 외부적
인 영향으로 인하여 자극되어졌다는 적당한 구실이 전혀 없는 까닭에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악으로 달려가 이를테면 일부러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를 유발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이 사실에서 우리는 거기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법으로써 그 재산을 양도하도록 강제된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추측한
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자기 돈을 남겨두거나 자기의 토지를 팔지 않고 소
유하거나 할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의 나중 부분
에서 팔린 밭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실제의 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
다. 그러므로 그가 자신의 소유재산이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불신
앙의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재산을 소
유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못 정신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
하다.
ㅇ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 이 문귀는 다르게 구성되었다 할지라도 나는 그
것이 앞의 글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선자란 많은 덮개
로 가려져서 자신을 감추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아나니아는 교회를 속였기 때문에 베드로는 참으로  분명하게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도 그 가운데 계셔
서 주재하신다"(마18:20)는 사실을 그는 고려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  그  모임에서는
마치 자기가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지배권을 잡기 원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
로 어떤 존경을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써 행사하시는 그 통치권을  우
리는 철저하게 존경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러
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들의 사사로운 일은(privati) 행동하지 않았다. 한편 우리는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여
야 한다. 즉 성령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말의 표현
으로 성령의 신성이 확실히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울도 동일한 생각으로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고 말한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ㅇ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 아나니아의 죽음은 참으로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  것임
을 확증해 준다.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고후
2:16)라고 말함으로써 이 말씀의 능력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실상 혼의  영
적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아나니아의 몸에서는 인간의 눈에는 숨겨져 있는
그 형벌의 가견적인 상징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칼로나 세력으로나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생명을 빼았긴  것이
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복음을 박해하는 일의 두려움을 알아야 하며  또한
우리도 동일한 운명을 경험할 것에 대비하여 재빨리 스스로 겸손해져야 한다.  왜냐하
면 그리스도에 대해서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다"(사11:4)라고 선언된  사
항은 악인의 우두머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요 또한 각자 개인 개인에게도 해당되
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씀의 고유의 본질은 구원하는 것이었으므로 말씀이  제공
해 주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만일에 누구에게라도 사도가 육체적 형벌을 준 것이 부조리하게 여겨진다면 나
는 이렇게 대답한다. 첫째로 그것은 나의 비상()한 일이었으며 둘째로 그것은  고
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밝혀진 대로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마술사 엘루마(Elymas)가, 바울에 의하
여 소경이 된 까닭인 것이다(행13:11) 그러므로 베드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주어진 화살을 적당한 때에 쏘았는데 그것은 그의 직책에 벗어난 일은 아니었다. 그러
나 어떤 이들이 그형벌은 너무도 잔혹한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들이
아니니아의 죄과를 하나님의 저울로 달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의 것으로 달기 때문이
요, 떠 따라서 우리가 그처럼 많은 죄악으로 가득찬 것으로 이미 나타난 중대한  범죄
를 아주 하찮은 허물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것은  신
빙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날마다 그들은 대단히 많은 위선자들이 아
나니아 못지 않게 하나님을 조롱해도 처벌이 면제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실상 그
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할만 하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지독한 하나님  모독자들
이지만 자기들의 불경 때문에 형벌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처음에 그의 교회 위에 눈에 보이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써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
었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신앙 경험에 의하여 내적으로 실감한 바를 외적
인 표적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은 하나님 자신과 교회를 조롱하는 모든 위선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두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벌에 의하여 명시하신 것이다.
ㅇ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 한 사람의 형벌로써 다른 사람들을 두려웁게 위협하는  일
이 하나님의 의도였다. 그로써 그들이 의식적으로 모든 허위를 단념하게 하려는  것이
었다. 그리고 누가가 그들이 두려워한 일에 대해서 말한바는 우리에게도 또한  적용된
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실할 것을 배우게  하
기 위하여 모든 세대에 대해서 일반적인 경고를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가련한 사람의 형벌은 그 후에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재산을 하나님과 가난한  자
들에게 바치는 일을 더욱 풍성하게 하도록 장려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선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일이며, 그 일을 더럽히는 일은 그처럼 엄하
게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 오니

ㅇ하나님께서 삽비라에게 과하신 형벌에 대해서는 그것이 본보기를 위한 보다 큰  효
력을 더해준 것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다. 더구나 그들 갖가의 배신적인  의향과  그
완강한 악의를 따로따로 교회 전체가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에  의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똑같이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 관한 정보를 동시
에 접하게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매우 분명히  나타냈다
고 하는 것이 교회의 선도를 위해서 더욱 적절하고 유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이 그런 식으로 가끔 생겨나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남편의 목전에  있는  일이
삽비라의 위장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녀의 범죄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
각될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압력이 그녀에게 가해짐이 없이 자신의 자
유의사에 의하여 행동하였기 때문에 그녀는 남편보다 나을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다. 또한 그녀는 베드로의 심문에서 자기들의 사기행위가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악의의 거짓말을 하는 데 있어서 동일한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ㅇ내게 말하라 - 하나님은 고질적인 자들과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의 경우를 제외
하고는 복수하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하여 돌발적인 충동으로 형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먼저 적당한 조사를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된다. 그것은 삽비라가 그 사건이 사
람의 눈에 뜨이지 않은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그런 심문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 앞에 소환된 것과 같이 간담이 서늘해지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제 정신에 돌아올 만한 시간이 주어졌다. 실상 그것은  회
개할 수 있는 조용한 초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없이 행동함으로써 자신
이 치료될 수 없는 인간이며, 또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ㅇ그러나 이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운 것이다. 즉 우리가 죄인들을 정상
적인 길로 데려오는 데는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
령은 이러한 절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고집스럽고  완강
한 모욕이 그 범죄에 첨가될 때에는 그것은 이미 형벌해야 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이
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과도한 엄격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지나치게
거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차라리 어떻게 우리가 장래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
에 서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반영시켜 주는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일 형벌받는
일이 없이 하나님을 기만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지나치게  그
의 거룩하신 존엄을 무시하는 일인 것이다.
ㅇ한 걸은 더 나아가서 내가 위에서 서술한 그 모든 상황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
나의 죽음에 해당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첫째로  위선
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지극히 싫어하기 때문이요,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을  속이려
는 그들의 의도는 최고의 경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 모임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신앙에 파렴치함
이 첨가된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선량한 모습을 과시해 보여  주려고  했던
그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불명예를 면해 보려는 마음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
의 명백한 악을 부인한 일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기들의 죄상에 대한 완강한 부정이 모든 것의 극치점이다(veluti  summus  cumulus)
그런데 무수한 위선자들이 날마다 이 두 사람 못지 않게 하나님과 교회를 속이지만 그
러면서도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왜 부조리로 여겨지지 않는가 하는  것
은 내가 이미 설명한 바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심판자이시기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결정대로 각 개인을 형벌하시는 일은  그
분에게 달려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서 형벌의 어떤 특정한 방법을
규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신체적 형벌에는  아
직도 숨겨져 있는 영적 심판의 중대성이 거울 속에 비치는 것처럼 우리 앞에 보여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일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의 눈 앞에서 넘어져 죽었다는 것이 재앙중의 최악의 것
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고린도전서  10장  5절을
보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ㅇ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 그는 자기가 조금 전에 한 말, 즉 그들이 불신앙적으
로 또는 경멸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조롱한 일을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마치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분(cognitor)이 아닌 것처럼, 조심없이 자기들의 사기행위를 고안해 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성령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들이  범죄에
서 서로 공법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가리워지신  것처
럼, 서로 자기들의 계획을 자기들만이 알고 있는 것같이 생각한 것은  너무도  경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제거되거나 그의 전지()가  무
시될 때에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성령을 말할 때에 그분은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지배하시는 분을  의
미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요16:8)라고  그리스
도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의 마음에 생각하신 지배권은 그가 교회의 선교를 통하여  행
사하신다는 바로 그것 뿐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이다.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ㅇ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 한 사람의 형벌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종이었
다고 그는 다시 반복해 말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분명히 두 종류의 두려움을  설명
하고 있다. 신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경고를 받음으로써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것이 없을 정도로 그처럼 완전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일찌기 없었기 때문에  그
는 교회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악한  자들에
게 가하셨던 그 모든 형벌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일고, 또 오늘도 날마다 실제로 악
인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볼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인하여  범죄
의 유혹과 방종에서 돌아서도록 자주 경고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란 그처럼  계
속적으로 점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굴레만으로는 그 목적을  이
루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인 것이다.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었
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까지는 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는 안되도록 강요한 것이다.

12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ㅇ그는 복음과 보다 일치하는 다른 종류의 기적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를테면 그리스
도께서 자기의 능력만이 아니라 그의 자애까지도 그것으로써 입증하신 것인데, 그래서
자신의 은혜의 즐거움에 의하여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려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
면 그는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이다(요3:17) 그러므
로 벙자들이 고침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마귀에게서 놓임을 받을 때에 그들의 육체
에 주어진 그러한 축복은 그리스도의 영적 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 먈의
그런 표현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그의 본래적인 기능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ex genuino officio)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수행된 그 무서운 기적은 이를테
면 뜻밖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누가는 그러한 기적들로 인하여 신도들의 수가  증
가되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적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음
의 준비를 시켜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확신을 줌으로써 신앙에 대한 시녀의  역할
을 하였기 때문이다(fidei subserviunt) 그러므로 내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기적이란 결코 말씀에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이 일로서 입증되는
것이다.
ㅇ누가는 병자들이 사방에서 고침을 받으려고 거리의 광장으로 데려와졌다고  보도함
으로써 많은 기적이 행해졌음을 지적해 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특히 그  초기에
서 그의 아들의 복음을 이로써 실증하려고 하신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그처럼 자주 약속되어온 만물의 갱신이 이제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명확
하게 해 주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고백
을 따라 자기들의 전체 희망을 걸어왔던 것이다. '요'(couches;15절)라고 번역된 말은
옛 사람들이 그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버릇이 있던 작은 침대를 가리킨 말이라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일이다. 그것은 가지고 다니기가 용이했으므로 사람들은 병자를  그
위에 눕혔다.
ㅇ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  이 말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시간에 함께 모이
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기도하는 일이나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만
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재는 대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다.  물
론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 특정한 장소에서  늘  모임을
가졌던 것이다. 그것은 실상 교회의 단체가 다른 방식으로는 존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
이다. 왜냐하면 만일에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가르치기를 원하고 각각 따로따로  기도
하기를 원하였다면, 그래서 공동집회라는 것이 없었다면 교회가 아무리 잘 조직되었다
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쇠약해져서 얼마 안되어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이
다 한 마음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즉
그들은 모두 그러한 결정을 존중하였고 또 누구 한 사람도 그 공중집회를 경시하여 자
기 집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만큼 다루기 힘든 개인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방
식으로 그들은 예의범절만이 아니라 결단력의 시범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장소가 사람들이 잘 모이는 곳임을 알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러한 위험을 무릅쓴 이의없는 일치는 더욱 크게 찬양할 만한  일이었
다.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ㅇ그 나머지는 감히 - 그 기적의 둘째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믿지  않는
이들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에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감히  사도들을  얕잡아보지
못하였고,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교회를 높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
면서 그들은 기적으로 인하여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회피하려
고 한 것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다. 거기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하여 우리를 자기에게로 나아오도록 초청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일이기  때문
에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죄책감으로 인하여 접근하는 일이 방해를  받은  것이었다고
(culpa) 그러므로 그 기적 안에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거운 마음으로  끌어  안는
데까지 나아오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나빠진 양심으로 인하여 뒤로 물러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ㅇ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뽑아 내 주시기
때문에 이 경우에 약간의 효과가 있기는 하다. 누가는 비록 그것을 기적 때문만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고, 차라리 교회의 존엄을 증대시켜 줄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시켜 생각
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가운데는 어떠한 하나님의 존엄성이  빛
나도록 모든 것들이 잘 정돈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사가 사람과 다르듯이 신도들은 다
른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성한 규율과 진지한  신앙수련에는  악한
자들의   의사를   거스려서까지라도   그들을   제한하는   어떤   비밀한    존엄(*              
;셈노테-스)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
고 있다. 실상 우리는 제 맘대로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교회도 우리의 세속적인 방종
과 나쁜 생활로 인하여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의 형벌이 불신앙의 인간들에게 겁을 주어 하나님께서 그처럼 엄격한 형벌을 주신
그 사람들과 무모하게도 짝패가 되려고 덤벼드는 일을 억제하게 하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여기서 극악한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우유부단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유의할 필
요가 있다. 확실히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기적이라든지 혹은 성도들의 천사같은 고결함
이라든지에 아무도 접촉도 가져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는  하
나님을 두려워하는 어떤 씨가 그 안에 숨겨져 있었던 온건한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일을 본다. 즉 이 세상의 허영에 사로잡혀 그리
스도의 멍에를 메는 일에 방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서 어떤 신성한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볍게  다루
는 일을 꺼려하였다. 그렇다고 해도 동시에 사단은 어떻게 치명적인 쇠사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제지하는가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하여 그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을 위한 치료법을 고의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거룩
하고 유익한 그런 것들을 보고 동의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훨씬 더 나쁜 상태에  밀려
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불결 가운데 여전히 누워있거나 하는 것이다.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ㅇ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순교자의 무덤에서 행
해진다고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그 거짓된 기적을 지지하고 찬양할 뿐 아니라  순교자
들의 유골을 우리에게 자랑해 보이기 위하여 이 대목을 잘못되게 이용함으로써 기만하
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베드로의 무덤이나 옷이나 혹은 그의  뼈를  만지는
일까지라도, 어찌하여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에 덮이는 일보다 치료의  능
력이 없다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라고. 거기 대해서 나는 대답한다. 즉 순수한 신
앙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모
두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단언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보다
확실한 반증이 따로 있다. 그것은 사도들이 바로 복음의 사신들이었던 까닭에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의 신앙을 촉진함에 있어서  효과
를 나타내는 한도 안에서 그 은사를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힘을  사도
들의 입에 두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그림자에도 두셨던  것이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있는 기적들 가운데는 그와 비슷한 아무 것도 없다기 보다는  차
라리 정반대 쪽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적의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성자들에
게 보호를 구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기  때문
이다.
ㅇ누가는 이미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즉 교회에는 신도들의 수
효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 각종의 은사가 훌륭하게 갖추어졌다는 사실, 기적에도 탁
월해졌다는 사실 등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거기에 모든 면으로 번
창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제 다음과 같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즉  그러한  일들
때문에 악한 자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어서 그 잔인성은 전보다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
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이 어떻게 그들을 구사하여 맹목적인  격노를  일으켰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분명한 능력이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들이 더욱 더 뻔뻔스러워지고 격렬하게 덤벼들어 마치 자기들이 하는 자체를 뒤집어
엎을 듯이 날뛰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단한 무분별을 일종의 하나님의 두려원 형벌
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리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모두에
게 하나의 경고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도 역시 단지 자기들이  대항
하여 밀어 붙이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되
도록 현기증으로 휩쓸릴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영적 은혜로써  채워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괴롭혀지는  일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싸울 준비를  하
고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오늘의 상태가 그들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할 만한 하나님의  은사를  자인하는
일은 악한 자들의 열광과 완강으로 인하여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에게 용기를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ㅇ그와 함께 있는 사람 - 그는 대제사장과 더욱 가까이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을 의미
하고 있다. 대제사장은 그들의 충고를 따르는 습관이 있었고 또 이를테면 전체 성직자
계급 가운데서 그가 선발한 사람들이었다. 실상 재판의 목적 때문에서가 아니요 그 파
당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열광 때문에 뽑힌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들은 자기
들 자체 안에서 서로 지독한 원수들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당시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고 다시 반복해서 말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하나의
분파가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회의 전체 정치가  무서운  황페로
인하여 일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소는 그의 교회를 회당으로부터 분리시키신 이후로 그회당을 그처럼 극단적인 치욕 속
에 잠겨져 있도록 분명히 허용하셨다. 그것은 복음을 업신여기고 또는 그처럼  쓰레기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더우기 또 장차 올  생
명의 일은 조금도 엽려하지 아니하는 그들 욕심장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탈취한
그 지배권에 대한 노출된 야심과 거기 매달리려는 욕망 이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ㅇ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 나는 이 헬라어 *         (젤-루-;시기-특히  그  말이
다른 방식으로 너무 흔하게 사용되기 때문에)를 '경쟁'(emulation)으로 번역하는 대신
에 차라리 원어대로 두는 것을 좋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위선자들이 자기네들의
미신을 방위하기 위하여 정신이 없고 가슴을 태운 그 괴퍅하고 폭력적인 세력에 대해
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열심(라는
말을 '열심'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역자 주)이라는 것이 이성과 신중성으로
조종되지 않을 때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으로써 지도를 받지 않게 될 때에 하나
님 보시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며 무슨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인가가 분명해진다.
ㅇ사람들이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신앙적이라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면서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려는 잔인한 정열을 가지고 악마적인 광포로 흥분하
고 있는 자들을 우리가 오늘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이 말한 것같
이, 많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무분별한 열심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하여야 한다. 다만 우리는 차라리 열렬하고 난폭한 공세로 이해하는 바이
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참된 신앙을 박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아무리 많이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기할 일은 반대하는 것이 옳은 일
이라고 잘못된 종류의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거
의 모든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역시 자기들의 배를 위한 열광자이면서도 단순
히 그 열심에 근거해서(solo zeli momine)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
하는 것이 진실하다고 허용하더라도 그 무분별이 그들을 몰아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무엇이나 복수를 감행하도록 놓아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것처
럼 여기는 그 불타는 잔인성을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는가? 그러나 겸손한 행동을 취
하려는 순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
인가를 구별하는 일이야말로 해야할 첫째의 일이다.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ㅇ주의 사자가 - 주께서는 사도들이 적의 손아귀로부터 영원히 구원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감옥에서 데려 내오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얼마 후에 주는 그들이
다시 감옥으로 끌려 가는 것을 허용하셨고 또 채찍으로 맞게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 기적으로 인하여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게 하기 위하
여 그의 수중에 두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신 것이다. 한 편으로는 교회
가 그 사건을 통하여 생기있는 용기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요, 또 한 편으로는 악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핑계거리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께서 우
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바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아야하며 다만 우리들
의 생명이 그의 손에 의하여 그럴 필요가 있는데도 보호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 일의 목적을 위하여 주께서 천사를 사용하신 일에 관해서
는 그의 관용적인 관례대로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서의 여러 곳을 통하여 천사는
주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자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허한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
신다는 것뿐이 아니요 또한 하늘의 영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유의하고 있다는 것
을 아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유리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
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 우리의 안전을 돌보아 주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보통 언약이 아니다. 더구나 그 천사는 밤에
감옥 문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적이 행해진 뒤에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불신자들이 그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
기 때문이다.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ㅇ가서 성전에 서서......말하라 - 그들을 석방시킨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
파하는 일에 불굴의 노력을 계속하게 하려 함이요, 또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용감
하게 그들의 적에게 도전하는 일을 계속하게 하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달려갈
길을 다고 하나님의 손이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죽음으로 끌려갔
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특정한 시기에 주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옥문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임무를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하셨다. 그 사실은 크게 유의할만한 가
치가 있다. 왜냐하면 어떤 박해로부터 모면하게 되면 자기들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의 의무를 지고 있지 않은 양, 그 후로는 자기들의 입을 다물고 마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도망칠 길을 찾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유케 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시작한 진로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차라리 장래를
향하여 더욱 큰 열정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실상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반대이유
를 들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우리가 위험이 따르지 않고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는 만일 우리가
고집스럽게 나오는 것을 안다면 이 후에 적의 격노가 얼마나 더 크게 불타오를 것인
가?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을(롬14:8)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
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의무를 관심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단순한 계명으로 만족하고 일의 결과를 그에게 맡기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용기를 약화시키는 많은 일들을 가끔 만나게 될 것이다.
ㅇ이 생명의 말씀을 - 복음이 여기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생명 부여의 교
리로 훌륭하게 설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 있으며"(롬1:17)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희생으로, 부활의 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양자로 하시는 보증으로, 그 복음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에게 분명히 이야기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영원한 구원의 사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복음 때문에 발생되는 모든 싸움
에 더욱 더 대담하게 참여하게 된 것이다. 지시 형용사인 '이'라는 글자가 모든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첨가되었다. 마치 천사가 자기의 손가락으로 그 생명을 지
적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입에 또는 우리의 마음에 소유할 때에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고 분명히 멀리 가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
다. 혹시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이라고 하는 대신에 환치법이 사용된 것처럼 '이 생명
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나는 그러한 견해를 거
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가 내게는 더 좋게 보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시가 있으며 그 안에는 생명이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ㅇ그것은 만일에 그가 자기의 일파만의 명예에만 사로잡혀 다른 파를 무시한다면 자
기가 그러한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두려
움이 그로 하여금 전체 의회를 소집하게 한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또는
정확하게 법의 형식을 유지하였다. 감독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장로들이 소집되었는데
그것은 의회의 결정과 권위에 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
었다. 이렇게 시작된 회의에서 누가 온건한 결말을 희망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분명히 폭력이나 횡포로써 지니리를 탄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구실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
를 들었을 때 그들은 사도들이 인간적인 어떤 기만행위로 감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해서 나온 것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려는 뜻을 멈추
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들의 사악한 행동이나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만
이 아니요, 역시 무서운 광기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은 아무리 공정한
것 같은 외관을 그럴싸하게 꾸밀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자기들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감옥 문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써 열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려면서도 그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날뛰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이다.
ㅇ이러한 사실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들어 맞는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교회의회는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금언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다. 더구나 그들이 합법적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합법적으로 받아 들여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란 모든 외적인 형식이 완전하
게 되어 있는 그러한 모든 의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누가가 여기서 이야
기하고 있는 의회란 우리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멸절시키기 위
하여 모인 그런 모임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제사장들이 제 아무리 부정수단
에 의하여, 혹은 운동을 해서, 은밀히 직책(honorem)에 나아가서 다른 나쁜 계략이나
뇌물수여 또는 피차의 살인행위 등 폭력수단에 의해서까지 자기들의 직권을 행사한다
해도, 그러면서도 제사장직의 직책(dignitatem)이란 그리스도께서 아직 나타나시기 전
이기 때문에 여전히 계속 존재했던 것이다. 장로들의 회의에 교회가 대표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추구되지 않았으며 전체의 외양은 단순한 하나의 가면에 불
과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이 방패의 그늘 아래서 자기들의 추행을 은혜
하려고 시도한다 해도 헛수고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면 교회의 지배권을 가진 자들이 회의를 소집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기 때문
이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자신을 '빛의 천사'(고후11:14)로 위장하는 것이 그의 전
형적인 술책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의 칭호 밑에 악마가 바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숨을 곳을 그에게 제공해 주는 일이 될 것이다.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ㅇ성전 맡은 자가...저희를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 우리가 앞서 성전맡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말해왔다(4:1에서)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성전맡은 자를 자기들 마음
에 드는 대로 임명할 수가 없었고 그것은 소속된 지방의 총독이 결정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강제로 잡혀온 것이 아니고 연행되어 왔다고 그는
말한다. 즉 민중의 폭동이 발생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폭력으로 끌어
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사도들의 행동의 분별력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드러난다. 즉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소란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관속들이 끌어가는 대로 자신들을 맡겨 두었다.

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ㅇ대제사장은 사도들에게 두 가지의 죄를 씌웠다. 그것은 그들이 의회의 결정을 따르
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에게 관명항거의 죄를  물은 것이다. 그의 선언의
둘째 부분에서 그는 그의 악의를 보여준다. 혹은 적어도 하나의 법정에서 그는 공적
사항을 다루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속에서 행동하고 있다
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오명을 제사장들
과 율법학자들에게 전가하려고 하고 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괴롭
혀 주는 것은 사악한 살해의 복수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
들의 가르침을 핑계삼아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결론을 보면
그가 그처럼 염려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의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사도들을 폭동 교사죄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리스
도는 정당하게 사형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자명한 것으로 그는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고소의 주요점은 그들이 제사장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것이다. 대제사
장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그런데 전체의 명령을 일축하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죄일 것인가?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볼 때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자기의 걸머진 책임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자기의
권력을 마치 그것이 모든 법의 구속을 받지 않은 권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폭군처럼 그
권력을 남용하였다. 오늘의 교황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그
는 구속받지 않는 최고의 권력을 가로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명령이 우리로 인하
여 거부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우리를 종파분리자로 정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기 때문
이다. 그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눅10:16)고 하는 말씀을
갖고 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ex Christi ore) 이제 그가 공개적으로 사단의 사
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또는 허락도 없이 그리스도의 이
름에서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대제사장이 사용하는 말의 형식까지
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제한없는 권력을 강탈해서 어떻게 영적 폭군이 되어
있는가를 증거해 준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나 자유롭게 기탄없이 감행
하는 것이다. "우리가...엄금하였으되"라고 그는 말한다. 자기들이 명하는 바는 무엇
이나 이의 없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 아니라면 어디에 그러한 결정적
인 단호함이 생겨났을 것인가?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ㅇ이것이 바로 변호의 요점이다. 즉 사람은 인간보다도 하나님 편을 택하도록 되어
있다. 실상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우리를 잠잠하도록 명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는 말이 타당하
다는 이 선언에 관해서는 4장 19절에서 내가 설명한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권
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하는 범위 안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어 우리를 지배하게 하신
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사
람들의 뜻을 이행해야 한다. 권력의 행사가 정당할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를 비교하
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 어느 성실한 복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무엇을 명하거나
혹은 금하거나 한다면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 하여야 한다고 반대하고 나
서도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하
시기 때문이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만일에 어
떤 행정장관이 충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누가 그를  하나님과 대립시키려고
조작한다 해도 그 행정장관은 하나님과의 불일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반대의 결과가
될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법이 행해질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
서 그의 대행인 교직자에게 순종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부모나 주인의 경우에서
생겨나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ㅇ그러나 통치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복종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
즉시로 그들은 불경하고 완강하게 하나님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제 위치를
지켜서 하나님과 그의 권위가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하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직무의 모든 영향력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 자
신의 영광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영예로운 관직을 그들에게 주시려고는 생각지 않으시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아버지되는 자가 자기의 신분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아
버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인간이
요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만일에 어떤 왕이나 군주나 행정장관이 하나님의 영예와 권
위를 약화시켜서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해도 그도 역시 하나의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똑같은 생각이 역시 목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아무라
도 자기의 직무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기 때문
에 그 직책에 해당한 칭호는 벗겨져야 하는 것이다. 그가 겉치레와 속임수를 쓰게 될
것에 대비해서이다. 목사의 직책은 영예롭고 교회의 권위는 위대하다. 그렇지만 하나
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의 지배를 손상하는 일이 되어
서는 안된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쉽게 교황의 거만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추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동시에 그는 그리스도의 전체 주권을 자기 발 밑에 유린하고 있으
며 또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이름 밑에 숨어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ㅇ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 이 귀절에서 사도들은 교회의 수호자들로 자부하
면서 최고의 영예를 원하고 있던 자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에게는 최소의 권위조차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저 사람들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일을 자발적
으로 또는 자유롭게 찬양할 때에 하나의 확신의 증표인 어떤 장애를 말한 것이다. 말
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욕적인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영광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소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음과 같이
말해질 수 있는 사실이다. 즉 "실상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요, 그리고 당신들의
잔인성은 단순한, 혹은 평범한 죽임으로써 만족하지 못하여 그를 나무에 달아 죽인 것
이요, 그러나 죽음이 그의 능력을 소멸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요, 또는 당신들이 그에
게 가했던 불공정한 치욕도 그의 영예를 파괴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
님의 부르심은 견고하게 확실하게 존속되는 것이요"라고, 그러므로 사도들은 제사장들
이 범한 그들의 죄과, 그리고 그들의 사악함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할 때, 그들은 역시
그 범죄의 장본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승리나 얻은 것처럼 날뛰게 될 것에 대비하여,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수치스러운 죽음의 방식을 언급하면서 하나의 양보하는 방식으로
미리 처리하는 것이다.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ㅇ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 그들은 자기들이 제사장들의 명한 일들에 중요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경솔하게 생각하고 이를 폐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기들의 해명(hypothesis)으로 나아간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이야기한 바와 같이 어
떤 종류의 대립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과 사람과를 비교할 만한 여지가 없
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제사장들이 금지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명령을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우선 첫째로 성경이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용구는 성경의 곳곳에 보여진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위대한 일을 이루시려고 하면서 그들을 사용하려고 결심하셨던 예
언자들이라든지 사사들이라든지 혹은 그밖의 교직자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셨다
는 그러한 논법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어떤 비범한 또는 훌륭한 일을 맡
기시려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사로써 무장시켜 주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뛰어난 재
질을 가진 자라도 여전히 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ㅇ베드로가 자기의 첫 설교에서 인용한(신18:15,행3:22) 저 모세의 유명한 말을 아마
그들도 역시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어떠한 새로운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그 창시자로(as the Author)
명백하게 내세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거짓된 비난을 받고 있음을 자기들도 잘 알고
있는 대로 자기들이 백성들을 율법과 신자들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책
임 지우려 한다는 그 거짓된 비난을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화되지 못한 사람들이(profani) 조상들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가르쳐 준 하나의
주제를 계속 되풀이하고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의 습관이나 의식을 따르는 일 이외에
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 것처럼 사도들은 자기들의 선조들에게서 받은 예배의식
을 무엇이나 승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여기서 의미하는 조상들이란 하나
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계약을 맺은 사람들, 옳고 순수한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 참된
신앙과 함께 구원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 이를테면 자기들의 기원이 하늘 아버지께 있
다고 믿고 또는 그 독생자를 통해서 그들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31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ㅇ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 여기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
장하신 그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가 그의 백성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죄의 용서
를 통하여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는 것이다. 더구나 복음의 전체 내용이 이
두 선언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들은 여기서 자
기 자신들을 변명하기 위해서만 역설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직무를 훌륭하게 밝
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들은 그 신앙의 위험한 적들 가운데서
라도 몇몇 사람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ㅇ그런데 우리는 이미 '회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한 바 있다(2:38에서)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 전향이요 나중에 그것은 외적인 행동으로
자체를 나타내주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또는 그 마음과 생각의 갱신이 새로운 생명을 일으켜 주게 하기 위하
여, 또는 그 마음과 생각의 갱신이 새로운 생명을 일으켜 주게 하기 위하여 중생케 하
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때문이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는 기능이 그리스도
에게 속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 되는 것이
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
을 회복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 종으로부터 의에 복종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개혁을 일으켜 주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개심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도 없는 것이 되는 일이다.
ㅇ회개란 자발적인 회심인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정을 변화시키셔서
돌과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단단하고 뻣뻣한 것을 부드러운 것으
로 만드시며 그래서 마침내 꾸부러진 것으로부터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그러한 자발성의 의욕을 일으켜 주는 근원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
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때에 생겨나는 것
이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가 아니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께 이끌려지기까지 날마다 더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가 육체를 벗어버릴 때에만 달성될 것이다.
ㅇ일찌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이 자기자신과 세상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
활을 시작할 때 그것은 확실히 회개의 시초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출발했을
뿐 아직 목적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정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안에서 회개를 시작하신 바와 같이 또한 우리에게 인내심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이지만 그것이 죄의 용서와 연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열시키는 원인
이 되는 결함이 언제나 붙엉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에게 대하여 은혜로우시기보다는
적대시해도 좋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
게 돌리시지 안흔 놋에 의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이 후자의 은혜는 결코 전자의
은혜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그 반면에 복음이 이 두 부분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면,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써 하나님과 화해
된다는 사실, 그리고 중싱케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이 터득하지 않고는 그것은 불완전하게 될 것이요, 또는 부
패하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얻어지는가를 간
단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ㅇ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 불신앙의 사람들이 무슨일
을 고안해 내거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위탁받으신 직책을 성취하는 일
에 방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사도들은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의 '하나님의 오른손'이
란 그의 능력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가 앞서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또는 다른 곳에
서 가끔 보게 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올리워지셨다고 말해졌을 경우
와 같은 그런 동일한 은유가 여기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의
미하는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그리스
도는 천사들과 인간들 위에 군림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높이 올리워지셨다
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단과 세상의 모든 음모에 대하여 조용히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독생자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셨고 또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으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그들이 훼방할 만큼 그렇게는 결코
높이 올라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계략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그가 말하는
것과 같다. 어쨌든 동시에 그 목적이 첨가되었는데 그가 임금과 '구주(saviour)'가 되
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셨을 때마다 군주
나 왕을 약속하신 것이 언제나 있는 일이었는데 그들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께서는 모
든 것을 회복하시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의 역할을 다른 말로써 좀더 분명하게 설명한다. 요점은 바
로 다음과 같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또 그것 뿐
이 아니요 자신이 구원을 가져오는 주님으로서의 혹은 구원의 창시자로서의 역할을 수
행하시기 위하여 최고의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셨다는 것이다.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ㅇ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진 것이
라는 사실을 증거한 다음에 이제 다른 논점으로 옮겨간다. 즉 저들이 사태를 성급하게
단언하는 방향으로 갈 것에 대비해서 자기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자기들
에게 명령하시기 때문에 말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받는 것만을 공중 앞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다음으로는 자기들이 그 일을 하도
록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지 않고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회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복음의 일군들에게
필요한 것이니 만큼 그들에게도 역시 자기들의 변호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사항
이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ㅇ누가는 여기서 히브리인의 어법을 따라서 '사물들'(rebus) 대신에 '말들'(   
verba)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누구라도 만일 그것을 말 자체(speech itself)
로 해석하기를 원한다 해도 나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요점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증인으로 세워졌을 때에 그에게 등을 돌리는 일은 옳지 않은 처사요, 오직 그가 명령
하시는 바를 알려주도록 말해야 하는 것이다.
ㅇ성령도 그러하니라 - 그들은 자기들의 소명을 그 따르는 결과로써 확인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을 때에 그들의 가르침을
승인하는 하나의 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상 복음의 신앙이 하나님께 시인을
받고 또 그를 기쁘시게까지 한 것이라는 점을 이로써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나는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말로 생각한다. 그 말은 이렇게 되었어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
들의 순종의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후하게 보상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
리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교직까지도 그 점에서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어쨌든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즉 "우리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믿음을 얻는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서는 신앙 이후에 성령이 주어진다
고 말해지는 것인가?" 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성령이라는 말은 하나님
께서 그 당시에 자신의 교회를 풍부하게 하신 방언, 예언, 통변, 병고침, 또는 그와
유사한 은사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마치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너희가 성령
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라고 물었을 때에도 같은 의
미를 찾을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령의 조명은 신앙의 원인이 된다는 것
을 볼 때 그것은 신앙을 앞선다. 그러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된다"(마
13:12)는 말씀대로 볼 때 나중에 그밖의 은혜가 우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계속 뒤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만일 계속 성령의 새로운 은사로 풍성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의 가슴(the bosom of faith)을 비워 놓아야 한다. 그
러나 오늘 우리의 불신안은 우리에게 훨씬 다른 대가를 받게 한다. 그것은 대부분의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결핍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며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33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ㅇ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 제사장들은 비록 철판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해도 깊이
감동을 받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이론을 전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데는 조그마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속
에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외적인 가르침은 귀를 때리는 일일 뿐 다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적들을 꺾어서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만 그들의 거친 성품이 굴복되거나 교정되기는커녕 그들은 더욱 더 미친 사람들처럼
날뛰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그 말씀의 효과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나아지도록 변화시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
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양심을 움직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심판자
로 인하여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사실에서 그들의 분노가 솟아났기 때문
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무슨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복음의 전부를 기꺼이 비
웃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주할 수가 있었다. 그러
나 그들의 경솔한 행동을 맹렬하게 쓸어버리는 어떠한 숨은 존엄이 복음 속에 숨어 있
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오도록 나팔소리가 그들을 소환할 때에 그
들의 광기가 분명해 질 것은 사실이다.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ㅇ이제 누가는 주께서 어떻게 그 악한 자들의 광기를 씻어버리셨는가를 이야기해 준
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가말리엘이 양자 사이에 끼어들
어서 그 무모한 의논을 저지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어떻게 단 한 사람이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게 하기 위하
여 그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한 바리새인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 파는 우리
가아는 대로 가장 존경을 받고 있었던 파였다. 그는 국민 전체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
다고 누가는 전해준다. 그러나 또한 당국자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고도 전해준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그의 의견을 감히 반대하지 못한 이유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들 앞에 돌발적인, 또 예기하지 않은 공포의 원인을 성정함으로써 원수들의 폭
행을 저지하시는 일 등을 행하시는 것이다. 게다가 가말리엘은 자기 말이 사도들을 한
층 더 대담하게 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들을 밖에 나가 있도록 명령한다. 왜냐하면 가
말리엘은 자기가 복음의 가르침을 시인했거나 혹은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변호하기 원
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격분에 불타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점잖고 온건한 인품을 지닌 그는 그들의 지나침
을 온건한 말로써 누구러뜨리는 것이다.
ㅇ어쨌든 만일 아무라도 그 모든일을 적절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의 견해는 우리가 신
중성있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실상 나는 많
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로도 충분히 밝혀진다. 즉 만일 그렇게 된다
면 사람은 아무도 형벌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든 범죄는 처벌되지 말도록 되
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의 생명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하는 일이 우리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모든 것도 거부되어야 한다는 뜻이 된
다. 가말리엘이 말한 두 가지가 다 분명히 옳다. 즉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에게
서 나온 것을 깨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 그러나 한편 '사람에게서 나온'것은 무엇이든
지 언제까지나 존속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 이 둘은 다 사실이
다. 그러나 거기서 끌어 낸 결론으로서 대체로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태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차라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찾아내야
만 한다. 왜냐하면 물론 하나님은 악행이 벌을 받게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
한 목적 때문에 그는 행정장관들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검으로 무장시키신 것이다. 그
러한 목적 때문에 교회에 장로들을 세우셔서 다루기 힘든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요한
다. 그래서 그들은 제 멋대로 빠져들거나 제한받지 않고 날뛰는 죄가 허영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악을 제거하시기 위해서 자신 혼자서 넉넉하기 때문
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쨌든 그의 전체 권
고는 그와 같은 것이다. 가말리엘은 율법학자들이나 장로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전쟁
을 수행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일에 대해서 의심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로써 다음의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그는 그 사건의 진가에 관해서 이
미 근본적으로 불확실하여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감히 그
의 마음을 확정짓지 못하고 그 상황이 자연히 좀더 잘 밝혀지기까지 얼마동안 시간이
연기되어야 한다는 저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ㅇ요약한다면 가말리엘은 올바른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을 끌어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앙에만 적용해야 할 것을 외적 행사나 행동방식에 잘못 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것을 우리의 논리가 되게 하도록 하자. '하나님에게서 나온'것은 비록 전 세
계가 그를 대항한다고 할지라도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써
확증되고 있는 신앙은 사단이나 인간의 어떠한 공격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존
속될 수밖에 없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내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창조자요 수호자
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켜주
시기 때문에 어떠한 세력도 그것을 전복시킬 수가 없을 것이다.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
님에게 그 기초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를 대항하여 싸우며 흔들지라도
여전히 안전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더구나 악한 자들이 아무리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
여 전력을 기울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대적하여 제 아무리 치열한 싸움을 도발
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승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도를 타
격주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요, 또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무모
함에 형벌을 가하시기 때문이다. 그 두 선언이 다 신앙에 잘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종들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덜 열심이
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자기들의 게으름 때문에 교회를 파멸에 떨어지도록 내버
려 두어도 좋다는 이유도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고 시도하는 사람
들의 악행을 못본 체하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 있을 수 없다.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ㅇ드다가 일어나 - 만일 우리가 요세푸스(Josephus)를 신빙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
면 가말리엘은 여기서 역사의 참된 진로를 거꾸로 만든것이 된다. 왜냐하면 요세푸스
는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즉 가말라(Gamala) 성에서 태어난 유다 가울라니테스
(Judas Gaulanites)는 퀴리니우스(Quirinius) 혹은 싸이레니우스(Cyrenius)가 총독으
로 있을 때에 인구 조사의 실시를 막기 위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
이다. 드다(Theudas)는 쿠스피우스 파더스(Cuspius Fadus)가 총독이었을 때에 자기 스
스로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더스는 글라우디우스 가이사
(Claudius Caesar)에 의하여 유대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전자의 이야기는 고대사
18권에 수록되어 있고 후자는 20권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가
"그 후...유다가 일어나"라고 말할 때에 유다가 나중에 나온 사람인 듯이 연대적인 순
서를 지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이 유사한 두 실예를 내세웠기 때문에 그는
시기를 생각하지 않고 그는 이 쪽을 저쪽 과 바꿀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post)라는 말은 '그 위에'(above) 혹은 '한편'(besides)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ㅇ더구나 가말리엘이 자기의 견해를 입증하는 그 실예들까지도 현재의 주제에 적절하
게 해당되지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다에 대해서 즉각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선동했던 폭동은 많은 재난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국 군대의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드다는 쿠스피우스 파더스의 분투로
써 재빨리 타도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해를 입혔을 것이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단
지 사람들이 결과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있을 추진 할 때 모든 일이 좋지 못하게 뒤집
힌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형벌에
의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 불신아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충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당황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갈팡질팡함으로써 무
가치한 이론과 함께 자기들의 이지를 박탈당하는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것 사도들이 매를 맞은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적어도 12년은 경과한
때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시간을 계산해 봄으로써 추론하게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Tiberius) 치세의 남은 5년에 칼리굴라(Caligula)가 지배한 3년 반이 가산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더스(Fadus)가 클라우디우스(Claudius)에 의하여 유대로 파
견된 것은 그의 재위 2년이나 3년 이내에는 아니었다. 가말리엘은 그 사건이 마치 어
제나 그저께 생겨난 일처럼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지적한 그 시
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도들의 끈기가 그만큼 더  훌륭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처럼 오랜 동안 잃지 않았으며 또는 자기들
이 가야 할 그 길을 쉬지 않고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ㅇ스스로 자랑하매 - 어떤 사본에는 "자기가 상당한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되었다.
그러나 의미는 같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요단강을 마르게 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
로 하여금 통과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가말리엘
이 얼마나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나중
에 자기의 말을 누그러뜨리고 또 좀더 호의적인 견해로 기울어지면서 이 사건이 하나
님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단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짓지 못한 채 나겨두기는 하
였지가 그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직자들을 협잡군들과 약탈자들과 비교하였기 때문이
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좀더 사건을 조사
하도록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에서 인정
받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은 그가 악한 자들로 하여금 불신앙적인 무모함에서 기가
꺾어지게 한 일이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보다 더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이
다.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ㅇ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 가말리엘의 충고가 받아들여졌
다고 누가는 말한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또 가르치는 일을 금지당했다.
이로써 우리는 그들의 적이 얼마나 크게 격분하고 있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
면 비록 그들이 이제는 가라앉혀졌거나 혹은 적어도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이처
럼 과격한 방법으로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진리는 무
시되고 인간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던 그러한 불명확한 권고가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
져왔는가가 분명하다. 가말리엘은 확실히 사도들의 생명을 아끼는 일을 생각한 것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사람들의 수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수치를 당한 것
이다. 복음의 진리는 그들의 원수들에 관한 한 영원한 침묵 속에 매장되는 것이다. 하
나님께서는 확실히 이처럼 그의 말씀을 기적 적으로 선포하시는데 그러나 그 복음이
끊임없이 의곡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이 일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
늘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 때문에 위험 속에 빠진 사람들의 생명을 아껴주기
만 한다면, 혹은 그렇지 않으면 피를 흘릴 수 있는 형편에서 약간 부드러운  방식으로
돌아선 적이 된다면 자기들이 적지않게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불명예스럽게도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을 두려움없이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귀한 일이다. 그러나 참된 신아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인간적인 선행의 의무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 속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ㅇ사도들은...기뻐하면서 - 사도들은 자기들이 부당하게 다루어졌을 때에 그로 인하
여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고통조차도 느끼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그렇게 무감각하
였다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성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원인을 생각했을 때에 기쁨이 우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래
서 신도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될 때마다 언제나 두가지 방면으로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확실히 형벌의 아픔으로 인하여 시달림을 받는다
하더라도 영적 기쁨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타고 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쁨
에서 생겨나는 열정이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성급한 후회를 하
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에 있어서 죽음이 쓴 것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선
언하셨지만 역시 죽음이 왔을 때에 그가 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했을 것이라는 사실
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등에 십자가가 지워질 때에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서(ad obeundam crucem) 계속 지고 가도록 고난과 불안과 더불어 싸워야만
할 것을 배워야 한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이라는 말은 누가가 불명
예스러웠던 것을 영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얼른 보아서 불합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 세상 사이의 상이성으로 인하여 인간들 사이에서
는 최고의 치욕으로 생각되는 사항이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는 큰 존엄과 영광
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견뎌 내신 그런 종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그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고상한 승리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 순응하게 될 때에(참고;
빌3:10, 롬8:29)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치욕의 대상이 된다 해도 실상은 우리가 뛰
어남의 표시가 되고 있음을 훌륭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공공연하
게 그 그리스도의 흔적을 이야기하였다(갈6:17)
ㅇ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는 일의 근거에 대하여 우리의 관심을 기울
여 보아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치욕을 자기의 영광으로 흡수할 뿐 아니요, 모욕과
불명예와 조소를 최고의 영예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다. 이리하여 비록 십자가를 지
는 일에 용감하고 민첩한 사람이 그처럼 소수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거의 모두 육체의
감각에 희하여 압도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실을 그다지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은 없다. 실상 백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세상의 모든 승리보다 훨씬 뒤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 위
로의 기초가 됨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의 영광의 동참자 또는 동
반자가 되기 위하여 현재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응하게 된다는 이 문구에 대해서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된다(참고; 롬8:17, 벧전4:13)

42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ㅇ저희가 날마다...쉬지 아니하니라 - 그들의 기쁨과 함께 또한 번함없는 견지성
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 제 승리의 결과를 앞질러 자기 마음에 가지려고 또 지구
력을 야기시키기 위하여 아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러 올리지 않는다는 그 사
실이 우리를 약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켜 주는 박해의 원인이 아니겠는가? 그
러나 자기가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에 스스로 축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괴로운 싸움을 싸워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탈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죽음을 향해 용감히 진군하기 위하여 채찍맞는 일로 무장
을 한 것이다. 정말 우리의 길이란 미묘한 길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극히 사소
한 박해를 통과해 욍으면서 우리는 마치 이미 퇴역군인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즉시 그 횃불을 넘겨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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