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벌어졌다. 이곳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예수, 그리고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 이로 보아 예수님과 친척이 되거나 아주 가까운 신분의 사람의 혼인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형제중 하나나 제자들 중의 가까운 친척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혼인잔치였는가에 너무 치중할 필요는 없다. 저자 요한이 그것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게 알려주었을 것이다.) "갈릴리 가나"라고 밝힌 것은 두로와 시돈 사이에 있는 '수리아 가나'와 구분하기 위해서 정확히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하게 이곳의 위치를 알지 못한다. Kana;(카나)는 "갈대"라는 뜻으로 갈릴리의 갈대가 많았던 어떤 지역으로 보인다. 또한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으로 보아 시골의 작은 마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4장의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하룻길의 거리로 나온 것으로 보아 가나와 벳새다와 인접한 곳임은 추측할 수 있다.
3절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님의 때가 도래하고 있었다. 1장 35-51절까지 제자들은 예수의 이적을 보고 따라온 것은 아니다. 서로의 전도에 의해서 예수님을 뵙고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이 일어나는 때가 왔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1-2주간에 걸쳐 길게 진행되었다(창29:27, 삿14:12).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 잔치에 예상외로 많은 손님이 왔었다고 볼 수 있으며 혼인 잔치가 끝날 무렵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다. 포도주가 없다는 것은 막바지에 이른 잔치의 흥을 깨뜨릴 수 있는 주인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직까지 예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일이 없기 때문에 마리아가 기적을 기대하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대보다는 자신에게 당면한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낙담스럽게 투덜거렸을 것이다.(이러한 입장은 칼빈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이미 공생애가 시작되신 예수님께 마리아가 기적을 베풀 것을 기대하고 말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4절 여자여 예수께서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한 이 말은, 한글성경을 보는 독자들에게는 매우 어색한 표현으로 들리게 번역되었다. guvnai(귀나이) 존칭 호격으로 "여성, 부인"을 뜻하며 그리스에서는 자신의 아내를 다정스럽게, 그리고 최고로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또한 왕후를 부를 때도 이 말이 사용되었다. 마1:20절에 천사가 요셉에게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에도 사용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모친 마리아를 부를 때(요19:26), 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를 부를 때(요20:15)도 이 용어를 사용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은 포도주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마리아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다. 이 부분의 한글개역성경은 KJV와 함께 원문 직역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했다. 다시 표현한다면 [나에게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다면 그것은 마리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한에 의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묻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물음에 대해서 우리들 중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마리아도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자신의 육신 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두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의 여러 경우를 예수 이상으로 신격화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격렬한 어조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거의 다 빼앗아버린 미친 헛소리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런 일을 염두 해둔 예수님의 질문이었을 것이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w{ra(호라) "정한 때"는 일반적으로 지정된 시간을 말한다(눅14:17, 행3: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를 말하는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이로 보아 예수께서는 공생애의 시작을 자신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있음을 보여주고 지금까지 그 때를 기다려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때를 회피하거나 서두르지는 않으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마리아의 지시에서 마리아는 4절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섭섭하기보다는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또한 자신의 입장과 인간적인 모든 것을 포기한 체 전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6절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유대인의 집 입구에 놓인 이 항아리는 민19:1-22에서 유래한 정결 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는 매우 큰 항아리로 약 70-120리터 정도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항아리가 6개이면 적어도 420리터에서 720리터에 달하며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충분히 마실 양이었다.
7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Gemivsate(게미사테) "가득하게 채우다"로 '모자란 지라'(3절)와 반대되는 말로 넘칠 정도로 채웠다는 말이다.
8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예수께서 이 항아리의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일에 어떠한 행위나 말도 필요 없으셨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라!"라든가 이런 명령도 필요 없었다.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기적에 대해서 예수께서 말씀을 많이 하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부분 미리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거나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행함이었을 뿐이다.
9-10절 연회장은 신랑, 신부를 잘 아는 동네의 어른이었으며 잔치에 제공되는 음식을 감별하는 임무도 연회장에게 있었다. 이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먼저 갖다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에 의해서 좋은 포도주임이 증명되었다. 11절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첫 번째 기적을 통해서 기자는 이 후 결혼식의 주인공들과 하객들이 어떠한 표현을 했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고, 이 일로 제자들이 예수를 확실하게 믿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13 성전을 청결케 하심
이와 비슷한 사건이 공관복음에서는 예수 생애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에서 나온다(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성전 청결 사건은 신학자들 사이에서 두 개의 다른 사건으로 보는 견해와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다른 사건으로 보는 견해는 시간적으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사건은 공생애 초기에 나타나 공관복음이 말하는 후기 사건과 다르다는 견해이다. 같은 사건으로 보는 견해는 너무나 사건의 유형이 비슷하여 다른 사건으로 보기 어렵고 예수 생에 초기사역에서 이와 같이 부담스러운 일을 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시간적인 차이의 설명을 저자 요한이 실수하지 않은 것이라면(실수했다고 보기에는 더욱 어렵다. 그는 의도적으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비슷한 경우로 기록되었다해도 다른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유월절은 매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전에서 같은 사건이 두 번 반복된 일은 너무 이상한 일은 아니다.
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서의 율법을 지키셨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잘못되지 않은 율법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으셨다. 율법도 하나님의 의해서 시작된 것이지만 많은 생활율법 즉 사람들이 만들어내고 원래 없는 것들이었는데 만들어낸 잘못된 율법은 지적하시고 지키지 아니하지만 유월절은 지키셨다. 또한 자신의 공생애의 출발을 알리기 위해서 올라가셨다고 볼 수도 있다. 유월절 절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것은 정해진 것이었다(레23:5, 민9:2-14, 신16:1-8).
14절 성전 안에서 iJerw'/(히에론) "성전, 성소"를 가리키는 이 용어는 성전 건물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랑을 포함한 예루살렘 성전 전체를 말하며(마12:5, 마21:12, 막11:15, 막12:35, 눅2:46, 눅19:47, 눅22:53, 요11:56, 행2:46, 행22:17). nao;n(나오스) "성전건물"만을 가리키는 용어와 구별된다(마26:61, 마27:5, 40, 막14:58, 막15:29, 눅1:9, 요2:19, 계11:1, 계21:22).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은 ☞ 마가의 것을 참고하라 예수께서 분히 여기며 철저하게 상을 업으실 때 17절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의 시편 69:9절의 말씀을 떠올렸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런 행동에 제대로 반항하거나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런 일을 정당하게 행하려면 자신들이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18절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19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런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부활을 두고 한 말이다(21-22절). 그들은 이 영적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에는 46년 간 18,000여명이 동원되어 공사를 했는데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엄청난 성전 건축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22절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 말씀은 그 자리에서는 제자들도,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러나 부활 후에 이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다.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동일하게 나열한 것이 특이하다. 구약성경 전체나, 예수께 대한 예언부분과 예수님이 인용한 구약의 성구들을 말하고 있다(시16:9-11, 이사야 53장 등).
25절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예수께서는 전능하신 분이었다. 여기서 사용한 "아시므로"는 ginwvskein(기노스케인) "이해하다, 확신하다"의 뜻으로 사물들 자체에 대한 실질적인 속을 아는 지식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