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누가복음

[스크랩] 누가복음 (14 : 1~35)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08

누가복음 14장

 

1.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ㅇ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 '두령'(아르콘)은 '지도자'를 뜻하는  이
에 대해서는 (1) 바리새파에 속한 지배자(RSV,Creed), (2) 회당장(Marshall), (3) 바
리새인의 계층가운데 지도급 인물(NEB,NIV), 등의 견해가 있는데 세번째 견해가 무
난하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 바리새인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했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안식일의 회당의식이 끝난 후에 가지는 식사일
가능성이 높다. 안식일에는 회당의식이끝난 후에 가장 큰 식사를 하였으며 랍비들은
빈부에 관계없이 안식일에 손님 접대하기를 가르쳤고 그것은 종교적 의무로까지 여겨
졌다 .
ㅇ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 여기서 '저희'는 그 곳에 있던 다른 바리새인들을 가리키
며(3절) '엿보고있더라'(파라테루메노이)는 문법구조상
미완료로 되어있어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신학적인 오류가 있는지를 찾아내려
고 혈안이 되어 계속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
보건대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동기가 불순한 것이었던 것같다.

2.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ㅇ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
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
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
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3.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사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ㅇ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 13:10-17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병고쳐
주기 건에 먼저 질문부터 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먼저 질문하시는 것은 그들의
악의를 아셨기 때문이다(1절). 여기서 '합당하냐'(여세스틴)는 직역
하면 '그것이 율법적이냐'는 뜻으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예수께서 이미 간파(看破)하
셨음을 말해준다. 앞에서도 두 차례에 걸친 안식일 논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1-11;13:10-17) 또다시 안식일 논쟁이 수록된 것은 안식일 문제가 당시 유대인들에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4.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ㅇ잠잠하거늘 -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있는 율법 지식에 의거하여 당연히 합당
하지 않다고 대답했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이상 안식
일에 고치는 것은 랍비적 규례에 의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이 환자의 생명
이 위태롭다는 암시는 전혀 없기 때문에 생명의 위태함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
려웠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들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께서 그
들의 저의를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든지 예수께서
는 그 병자를 고쳐주리라는 결의를 감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ㅇ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 예수께서는 침묵하고 있는 율법사들과 바리섀인들 앞에
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그 병자를 고쳐주셨다.예수의 이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사
문화(死文化)된 율법 이해를 뛰어넘어 새로운 규범을 제시하는 의미가 있다. 즉 고통
받는 사람을 보고도 아무런 동정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안식일규범의 미신성을
거부함으로써 인간을 모든 형태의 고통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진정한의미에서
의 안식일 규범을 가르치신 것이다.

5.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냐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ㅇ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 예수께서는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구체
적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안식일에 대한 미쉬나의 규정에는 온건한 것이 있고 엄격한
것이 있는데 온건한 규정은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구해낼 수 있도록 하나 엄격한 규
정은 다만 구덩이에 꼴만을 넣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예수 당시에는 온건한 규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바리새인 보다 훨씬 엄격했던 쿰란(Qumran)공동체에
서는 구덩이에 빠진 사람만 구해낼 수 있고 짐승은 구해낼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채택된 규정에 의하면 우물에 빠진 짐승을 건지는 것이 
허용되었던 셈이다. 예수의 질문 속에 깔린 논리는, 곤경에 처한 짐승을 구하면서 고
통 가운데 빠진 사람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라는 것이다.

6.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ㅇ대답지 못하니라 - 이 말은 4절의 단순한 침묵과는 달리 반대 논리로 맞서 대답할
능력이 없었다는 뜻이다(롬 9:20). 그들은 예수에게 모종의 도전과 공격을 하려고 준
비하였지만(1절)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해지는 것들이 예수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
실 뿐이었다. 예수는 진리였으나 그들은 비진리였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적
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왜곡된  판단력을 지닌  인간 이상의 아무 것도 아
니었기 때문이다.

7.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ㅇ상좌 택함을 보시고 - 그 바리새인의 식사에는 예수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초청되
어 있었다. 아마 초청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상석에 앉으려는 암묵적 경쟁이 있었던
것으로 추축되며 이것을 본 에수께서 그들의 교만을 지적하시는 듯하다. 당시에는 음
식상에 앉는 순서가 손님들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정해겨 있었다(Marshall). 그리고
가장 귀한 손님은 대개 가장 나중에 도착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대인의 연회석은 따
자 형으로 배열되어 있고 상좌는 그 세 면의 중앙 부분을 각각 의미한다. 상좌에 앉
아서 섬김을 받기 좋아한다는 것은 바리새인의 교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이
다.(막 12:38,39).

8.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ㅇ혼인 잔치에...상좌에 앉지 말라 -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고자 하는 요점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가장 엄격한 격식이 요구되는 결혼식의 잔치를 비유의 상황으로 설정
하신다. 여기서  '앉다'는 물론 유대인의 식탁 자세 즉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묘사한
다. 다른 자리에서도 그러하지만 매우 각별한 격식이 요구되는 혼인 잔치에서는 어디
에서나 상석에 앉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의례히 자기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고 여
겨 먼저 상석을 차지했다가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이 그 잔치에 참석하게 되는 때는
난처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한편 잠25:6, 7에는 본문과 유사하게 "왕 앞에
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의 자리에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
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
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겸손의 덕목은 고금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한 것임을 보여
준다.

9.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ㅇ말석...되리라 - 교만하여 상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
하여당하게 될 비참함이 희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결국 예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구분하여 그러한 차이에 얽매이지 말고 매사에 겸손
하라는 교훈이며, 그 교훈을 직접 말씀하지 않고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여 말
씀하시는 것은 바리새인들의 완악성이 그만큼 심각했기 때문이다.

10.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ㅇ말석에 앉으라 - 8,9절과 정반대의 상황이 제시되어 처음 경우의 참담한 수치와
지금의 영광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단순한 공식 석상에서의
예법 즉 소극적인 의미에서 볼 때 명예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방법과 적극적인 의미에
서 볼 때 영예를 얻을 수 있는 처세술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그보다는 상좌를 차지
하려는 바리새인들이 소아적(小兒的) 교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지적함과 아울
러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11.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높이는 자...낮추는 자 - 이  말씀은 18:14;마 23:12 에서도 보여지는데  인간의
높고 낮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지 인간의 자기 추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것은 "낮아지고"(will be humbled,NIV)와 "높아지
리라"(will be exalted,NIV).라는 문장이 '수동태'로 되어있는 데서도 분명해진다.사
람은 높아짐을 당하거나 낮아짐을 당할 수 있을 뿐 그것을 결정하시는 주체는 하나님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자세,가장 아름다운 자세가
바로 겸손임을 강조한다.

12.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ㅇ점심이나...청하지  말라 - '점심'(아리스톤)은 늦은 아침에 먹는
첫번째 식사를 뜻하고 '저녁'(데이프논)은 늦은 오후에 먹는 주식사
를 뜻한다(11:37 주석 참조). 아무튼 예수께서는 이런 식사에 벗, 형제, 친척,부한
이웃을 초청하지 말라고 하신다. 여기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 절의 가난한
자, 병신, 저는 자나 소경의 네 부류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본문은 이런 대비의 문맥
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여기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과 관계를 끊거나 사랑
을 나누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더욱 각별한 관심을
보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진정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은 바로 그
러한 사회적 약자들이며, 이들에게 은밀히 행한 자선이 곧 하나님께 대접한 것이기
때문이다(마 6:4).

13.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ㅇ가난한 자들...소경들을 청하라 - 여기에 언급된 네 부류의 사람들은 앞에서  언급
된 네 부류의 사람들과 달리 아무런 보답도 해 줄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린 이유를 오
히려 초청시 동기로 삼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 25:32-35의 천국 비유와도 의미가
통하며 6:32-35와도 통하는 말씀이다.

14.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ㅇ본절은, 구제와 자선을 단지 천국에 가기 위한 혹은 천국에서 보상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 보다는 곤경에 처한 자들에 대한 랑앙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가르친다.
ㅇ의인들의 부활 -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만인의 부활 즉 의인과 악인을 모두 포괄하
는 부활을 의미하며 계 20:5,6이나 살전 4:16처럼 단계적 부활 에서는 첫째 부활을 뜻
한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ㅇ하나님의 나라에서...복되도다 - 본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메시야 사상을 표현
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강림하시면 제일 큰 잔치를 베푸실 것인데 이
방인들이나 죄인들은 그 잔치에 참여할 수 없고 오직 유대인들만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사람이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했을 때 그는 유대인으로서 기기에다 바리새
인으로서 이 잔치에 당연히 참석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앞에
서 말씀하신 행위 기준에(12-14)자신이 충실하였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과연
이 사람의 생각이 옳은 것인가는 또 다른 기준 즉 그가 하나님의 초청을 진정으로 받
아 들이고 있는가에 의해 검증(檢證)되어야 할 것이다.이어지는 예수의 비유는 바로
이 사실을 검증케 하기 위함이었다.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ㅇ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 이 비유와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마22:1-14
에는 잔치를 베설한 사람이 '임금'으로 묘사되고 잔치의 성격도 '혼인잔치'로 되어있
다. 여기서 '큰 잔치'(데이프논)는 '오찬' 또는 '공식 연회'를 뜻하
며 여기서 잔치가 의미하는 것은 '구원'이다.
ㅇ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 유대인들의 풍습에 의하면 잔치를 여는 사람은 사전에
날짜를 정한 다음 종을 보내어 초청된 사람들에게 참석 여부를 물은 후에 그 수효에
맞추어 잔치를 준비한다.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주인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음을 암시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사실
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Marshall).

17.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ㅇ잔치할 시간에...종을 보내어 - 최초의 초청을 수락한 사람에게 준비가 다 되었음
을알리기 위해 종을 보내는 것은 당시의 관례였으며(에 6:14;잠9:1-6) 이때 불가피한
사유가 아닌 한 잔치에 불참하는 것은 매우 큰 결례(缺禮)였다. 심지어 아랍인들에
게는 두번째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선전 포고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한다. 마태의 경
우 임금은 '종들'보내는 것으로 되어있고 초청받은 자들 가운데 더러는 그 종들을 잡
아 능욕하고 죽이기 까지하는데 이것은 선전 포고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마
22:3-6). 한편 마태의 본문에 복수로 표현된 '종들'은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뜻한다고 보고 누가의 본문에 단수로 표현된 '종'은 예수를 뜻한다고 보
는견해가 있는데(Lenski) 일리가 있다 하겠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ㅇ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 '일치하게'(아포 미아스)는 '당장', '곧'
이라는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만장일치로','한결같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초청을 사양하고 있는 것은 국면(局面)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며 의외의 사태가 발생할 것같은 암시를 준다.
ㅇ밭을 샀으매 - 첫번째 사람이 초청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
나 이는 다소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밭을 이미 사고난 후에 밭에 가보는 일이 
그토록 긴박한 일인지에 관해서는 의아하기 때문이다. 밭을 먼저 확인한 후에 매입
하는 것이 당연한 순서라고 할 때 그의 거절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ㅇ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 두번째 핑게 역시 첫번째 경우처럼 농경생활과
관련된 내용이다. '다섯 겨리'는 '다섯 쌍'을 뜻하는데 이 정도의 소를 살 정도면 상
당한 부농(富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보통의 토지를 소유한 사람에게는 한
두 겨리의 소로 충분했기 때문이다(Jeremias). 또한 '시험하다'(
도키마사이)는 '테스트해 보다' 또는 '검사해 보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소를 살때는 그 소가 일을 하기에 적합한 소인지 아닌
지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정한 순서이기 때문이다.혹 불가피하게 소를 먼저 사게 되
었다 하더라도 그 소를 시험해 보는 일이 약속되어 있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까
지 해야 할 만큼 급한 일은아니었을 것이다.

20.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 지라

ㅇ장가들었으니 - 세번째 사람은 아마도 최근에 결혼했던 것같다. 모세 율법에 의하
면 결혼한 남자는 1년간 전쟁터에 나가는 것이 면제되었다(신 24:5). 그러나 생사가
걸린 전쟁에 나가는 것과 잔치 석상에 참여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하겠다.
그는 단지 신혼의 재미를 깨트릴 수 없다는 하찮은 이유로 정중한 초대를 일언지하(一
言之下)에 거절하고 있다.어쩌면 이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할 복음
사명을 일신상의 하찮은 일을 핑계로 도외시하는 우리들의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ㅇ가지 못하겠노라 - 대답자들의 태도가 점점 더 무례해져 가는 것을 볼수 있다.
첫번째 사람은 비록 납득할 수 없는 사유를 제시하기는 하지만 "불가불...나를 용서하
도록 하라"는 예의를 갖춘 형식으로 정중히 사양하고 있고, 두번째 사람은 약간 퉁명
스럽게 자신의 불참 사유를 단순히 통보하며 용서를 구하는 반면 세번째 사람은 전
혀 사과의 뜻도 표시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불참을 통고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에로의 초대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점점 더 완악해져 감을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ㅇ집 주인이 노하여 - 종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주인은 그들의 사유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핑계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그들의 행위는 상호간의 인격적 관계를 노골적으로
깨트리는 것으로 판단하고 매우 분노한다. 마태의 본문에 의하면(마 22:6, 7) 마치 전
쟁을 방불(彷佛)케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를 거
부하는 자들에게 닥칠 비극상이 어느 정도일 것인지를 분명히 나타낸다.
ㅇ시내의 거리와 골목 - '시내의 거리'(플라테이아)는 다양한 사람들
이 걸어다니는 '넓은 길'을 가리키며 '골목'(뤼메)은 사회적으로 소외
된 사람들이 은밀히 다니는 길을 암시한다.
ㅇ가난한 자들...저는 자들 - 여기 언급되고 있는 네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적으로는
멸시를 당하며 경제적으로 아무런 능력을 갖지 못한 버려진 존재들이다.이들은 돈이 
없어 말이나 소를 사지 못하고 장가도 가지 못하며 잔치에 초대받지도 못하는 자들
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22.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ㅇ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 주인의 분부대로 행하였지만 그럼에도 남은 자리가 있
다는 종의 보고에서 그 잔치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거할 곳이 많다(요 14:2).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ㅇ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 여기서의 '길'(호도스)은 성밖의 공용도로를 가
리키고 '산 울'(프라그모스)은 '둘러 막다'의 뜻을 가진 '프라쏘
'온 말로 '울타리'를 가리킨다. 21절의 '거리와 골목'이 성내의 영역
을 뜻한다면 본문의 '길과 산울'은 성밖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초청
잔치에 이방인들을 포함한 만백성이 초대됨을 뜻한다. 이렇게 볼 경우 앞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자들은 유대인 가운데 소외되고 율법주의자들에 의
해 정죄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ㅇ강권하여 - 헬라어 '아낭카손'은 '필요하다'의 뜻을 가진
'아낭케'에서 온 말로 물리적인 강제력(compulsion)을 이용하여 데려오
라는 의미가 아니라 끝까기 설득하여 데려오라는 것이다. 이 말에는 초청을 받은 사람
이 엉겁결에 사양한다 하더라도 친철한 자세로 끈질기게 초청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동
양적 예법(禮法)이 배경에 깔려 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ㅇ내가 너희에게 - 갑자기 '너희에게' 라는 복수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니희에게' 라는 말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1) 최종적으로 잔치
에 참석한 사람들을 가리킨다(Bengel,Marshall).(2) 본 비유에 대한 결론적 적용으로
서, 비유를 듣게 된 최초의 청중들 즉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시는 것으로 본다
(Bruce,Greed). 이 중 전후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타당한 듯하다.
ㅇ전에 청하였던...맛보지 못하리라 -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한 유대인들이 맞게 될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해석함에 있어 문
자적으로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보아서는 않될 것이
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민으로서의 모든 특권이 무효화 됨을 뜻한다고 봄이
낫겠다. 유대 민족이 A.D.70년에 예루살렘 파멸이라는 징표를 받은 것도 이 사실에 대
한 한 징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예수께서 쟤림하시기 전에 회개하
고 하나님께 돌아올 사람이 있을 것이다(롬 11: 25,26). 이것은 유대인들의 거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창 17:7),이삭(창 26:24), 야곱(창
28:13-14)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실 것이며 그분은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25.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ㅇ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 바리새인의 집에서 떠나 예수께서는 게속해서 예루살렘
으로 여행하고 있으며 수많은 무리들은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여기서 '허다한 무리
'(오클로이 폴로이)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상당히 많았
음을 시사하며 아울러 예수의 인기가 대단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늘 예
수께 현세적 축복을 갈구하는 무리들이었다. 혹자는 이 무리가 절기를 지키기 위해 갈
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레자들 이었고(Farrar),이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서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등극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따랐던 것이라고 한다
(Plummer).
ㅇ돌이키사 - 예수의 가르침이 사작 될때 많이 사용되는 용법이다(7:9;9:55;10:23;
22: 61; 23: 28 ). 예수께서 이 시점에서 진행을 정지시키신 것은 무리들의 빗나간
기대에 제동을 걸어야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ㅇ미워하지 아니하면 - 예수에게 나아오는 것이 그의 부르심에  대한 일차적인 응답
이라면 본절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 보여야 할 이차적인 응답에 해당한다. 일차
적인 응답 으로부터 이차적인 응답으로 발전하기 의해서는 수행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의 모든 혈육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할 수 있어야 한
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미워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미세이'가 '조금사랑
하다', '덜 사랑하다'의 뜻으로, 상대적로 다른 것보다 덜 귀히 여기는 것을 표현한
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마 19:29). 결국  예수의 말씀은 무리들이 당신을 따름에
있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예수의 뜻을 추종하려는 것인지를 분명히 하
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일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 중 후자의 것에 궁극적(窮極
的)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면 예수를 따르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한편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고 있는 '형제자매' 및 '아내'와의 단절을 서술하고 있
는데 이 중 특히 '아내'에 관한 부분은 20절과의 관계에서 누가가 특별히 기록한 것
이라고 본다(Marshall).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ㅇ자기 십자가를 지고 - 본절의 문구는 9:23에 표현된 진리를 부정적 형식으로 바
꾼 것이다. 여기서 부정적인 형식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은 지금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
이 십자가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예
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여기서 '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바스타조'는 요19:17에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지신 것처럼 그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나' 
십자가를 져야 하며 당시에 죄수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자신이 져야 했듯이 예수를
따르는 자도 자기의 십자가를 자기가 몸소 져야 하는 것이다.

28.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내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ㅇ망대 - 이는 13:4에도 언급되는데 그와 달리 여기서는 '농장 건물'을 뜻한다고 본
다(A.G.Marshall). 이러한 건물을 지을 때는 기초 공사만 놓는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
었을 것이다.
ㅇ먼저 앉아 - '앉아'(카디사스)는 정밀한 계산을 위해서 정좌하여
앉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건축을 시작하기 전에 거기에 소요(所要)되는 비용을
철저히 계산하여 자기가 확보한 돈으로 건축을 시작해도 될지 잘 판단해야 하는 것처
럼 예수를 따름에 있어서도 그길은 결코 부귀 영화를 누리는 길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 까지도 희생해야 하는 길임을 알아 냉철한 판단에 의해 따르기를 결정해야 한다
는 것이다. 한 때 주께로 향한 뜨거은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얼마가지 않아 작은 시
험조차 이기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때,이 말씀은 더욱 깊이 상고되
어야 할 것이다.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ㅇ기초만 쌓고...이루지 못하면 - 아마 당시에는 치밀하고 완벽한 준비없이 건축을
시작하여  기초만 쌓고 건축을 증단하거나 또는 건축 중간에 비용이 없어 중단하는
미련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빌라도가 수도 공사를 진행시키
던 중 공사비 부족으로 중도에 공사를 중단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이상근).
ㅇ비웃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피이제인'은 '놀림
감'을 만들다', '조롱하다', '우습게 보다'의 뜻으로 어리석은 건축자가 당하게
될 부끄러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 겠다고 하고 신
앙인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실패가의 모습을 보
인다면 그것은 애초에 따르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스스로 망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욕되게 하눈 죄악조차
범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0.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ㅇ이 사람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후토스 호 안드로포스'    
는 경멸적 또는 풍자적 용법으로서 '이친구' 라는 뜻이다. 예수를 따르
려는 자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잘못된 비전(Vision)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렇게 시작될 경우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는 참다운 제자가 될 것이라 기대할 수 없
기 때문이다. 시작의 귀중함은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히 6:11).

31.또 어는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ㅇ싸우러 갈때에 - 정확한 판단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주제의 비유가 연속하여
이어지고 있다.여기에는 앞의 비유처럼 '너희중에'라는 서두가 없는데 이는 거기에 있
던 무리가운데 왕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임을 당할 수
도 있는 상황인 만큼 더욱 정확한 판단이 요구된다.
ㅇ헤아리지 - 만명을 거느린 임금이 이만명을 이끌고 공격해오는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을 때 승산이 있는지의 여부를 빨리 판단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조속히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집단 몰사할 가능성이 많겠기 때문이다. 적군의 숫자가
아군에 비해 두배나 많은 것으로 언급된 사실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살아가는 일이 마치 중과부적(衆寡不敵)과도 같은 상황처럼 어려움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로써만 감당 되어질 수
있다(히 2:18).

32.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ㅇ화친을  청할지니라 - 이는 순수한 전쟁의 상황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선과 악의
싸움 또는 영적인 싸움에서 걱과 타협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비유의 초점은 화친을 하고 안하고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임하는 자
의 냉철한 판단력에 맞춰져 있음에  유의하자.

33.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ㅇ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 27절의 구체화이자 두 비유(28-30,31-32절)
의 결론으로서 본문의  말씀은 매우 증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리들은 예수를 따르며 
그의 제자가 되려고 결정할 때, '모든 소유'를 버려야하는 상황마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 후에 냉철한 판단을 해야 한다.결국 소유에 대한 집착은
제자가 되는 것 그리고 구워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18-20절).
본문에서 '버리다'(아포타쎄타이)는 말은 사용되는 대상에 따
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될 때는 작볕 인사를 뜻하고 사물에 대
하여 사용될 때는 '포기하다', '버리다'의 의미가 된다. 특히 '아포타쎄타이'는
현재형으로서 그 '포기'가 지금 당장 결단해야 할 성질의 것임을 말해준다. 한편 본
문에는 18:22의 부자 청년에게 주어진 명령과는 달리 포기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언급
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본문의 말씀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 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무소유의 상태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에 대한 의식을 버리는 것 또는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을 강조하는데 집중하
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남용하는 것
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위임(委任)된 것이라고 여기는 청지기 정신을 가지라는 말
씀으로 이해된다(Liefeld).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ㅇ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 소금은 음식의 맛을 조절하는 양념으로 사용되었
그 종교 의식상의 용도 곧 소제(레 2:13)와 번제(겔 43:24)의 예물 위에 뿌리는데
도 사용되었다. 또 성전에 피우는 향의 성분 속에 소금이 들어갔으며(출 30:35)
새로 태어난 아기를 위해 의학적 목적으로 소금을 뿌리기도했고(겔 16;4) 방부제로 
쓰기도 했다. 이중 특히 소금의 역할로 중요한 것은 맛을 내는일이다. 본문도 이
점을 중요시하고 있다. 그런데 소금이 그 맛을 잃는다는 표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
분하다.(1) 본래 이 말씀은 소금이 맛을 잃을 수 없듯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복음도 없어지거나 그 영향력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씀
이 전승과정에서 제자들의 변절 가능성을 지적하는 말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G.Bertram). (2) 가축의 똥을 연료로 땔 때 소금을 촉매제로 함께섞어 사용했는
데 일정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는 소금의 촉매력이 없어져 화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본다. (3) 팔레스틴에서 만들어진 소금은 사해(死海)의 소금물을 증
발시켜서 만든다. 그런데 사해의 물에는 염화나트륨 외에도 여러가지 성분이 있기 때
문에 수분을 증발시키면 거기에는 소금과 광로석 및 찌꺼기가 남게 된다. 이 때 소
금이 먼서 결정되므로 그것들을 모으면 순수한 소금이 되지만 쓴 맛을 내는 광로석을
소금으로 착각하여 채취하기도하였다. 이렇게 잘못 채취된 광로석의 표면에 묻어
있던  염분이 용해되어 버리면 그것은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는 것이다
(J.Tinsley,Marshall). 이 세개의 해석 가운데 (3) 의 해석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
인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관련지어 이해할 때, 이는 소금도 그 맛으로 소금됨을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들도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참다운 제자됨을 확인받을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35.땅에도,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ㅇ땅에도,거름에도 쓸데없이...버리느니라 - 소금이 땅과 거름에 어떤 용도로 쓰였는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소금이 비료나 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부정과 긍정의 견해로 갈리기 때문이다. (1) 부정하는 견해-팔레스틴에서 소
금을 거름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한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Jeremias). (2) 긍정하는 견해-현대 이집트에는 소금기 있는 홅을 비료로
사용한 증거가 있다(H.Gressmann). 소금은 잡초를 죽일 뿐만 아니라 땅속깊은 곳에서
사해의 소금이 가지고 있는 칼슘성분을 용해시켜 토양을 개량시키고 아울러 인분의 
부패를 억제하늘 작용을 한다(E.Deatrick). 이러한 양 견해에 대해서 어느것이 옳은지
를 판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그러나 이러한 것들의 사실성 여부에 관계없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즉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는 것
이다.이에 대해 마태는 누가의 본문보다 더 강하고 경멸적(輕蔑的)인 표현인 "밖에 버
리워 사람에게 밝힝 뿐이니라"로 서술하고 인다(마 5:13).
ㅇ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 매우 의미있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이제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25절) 필요한 말씀을 충분히 해주셨다.이제 남은
것은 무리들이 예수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 현명한 결단을 하는 일이다.그 결단은 강요
에 의한 것도 구걸에 의한 것도 아니요 다만 듣는 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결정되
는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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