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28:1-10, 막16:1-8, 요20:1-10 비교하라 1절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사복음서가 똑같이 언급하고 있는 이날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마치고(토요일 일몰이 되면 끝이 난다) 밤에는 아무 일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새벽까지 기다려, 어둠이 거치기도 전에 달려갔을 것이다. 이날은 현재의 일요일 새벽이 된다. 기독교의 주일은 이 날을 기준 한 것이다.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예수의 시체에 바르고 장례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2-3절 마가는 이 여인들이 걸어가면서 안식일전에 그 무덤을 확인할 때 굴려 닫은 돌을 어떻게 옮길까를 염려했다고 전한다. 누가는 이미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무덤으로 들어갔다. 무서운 마음으로 무덤으로 들어갔는데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다. 4절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여인들은 예수의 부활은 생각지도 못했다. 시체를 누가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로 근심했다(마27:64). 그 순간 갑자기 나타난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행1:10 참고)은 천사임이 분명했다. 마태는 돌문을 치운 한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마가는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간 후에 흰옷 입은 청년이라고 언급한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말한 흰옷 입은 두 천사를 말한다. 5절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그렇지 않아도 떨고 있던 여인들에게 갑작스런 천사의 등장은 "경이로운 두려움" ejmfovbwn(엠포본) 그 자체였다. 놀라움이 그치기도 전에 천사의 말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는 것이다. 이 무덤은 새 무덤이기 때문에 다른 시체들은 없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6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두 천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 선언되었다. 누가는 부활의 증거로 빈 무덤을 제시한다. 누가는 여인들이 발견한대로 시체가 없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옮긴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만에 살아나리라"고 하셨다(눅9:22) 이 말씀은 갈릴리를 떠나서도 계속하셨다(눅17:25, 눅18:32-33). 10절 누가는 이 여자들의 이름을 밝히는데 최소한 5명 이상의 여자들이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주님을 처음 본 여인으로(막16:9) 사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여기 외에는 눅8:2에서 한번만 나타난다. 요안나는 이곳과 눅8:2에서 나타난다.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막16:1에 나오며 마28:1에 있는 여인은 다른 마리아이다. 다른 여자들(막16:1에 살로메를 포함)로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을 사도들에게 말했다.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
막16:12-13 비교하라 이 이야기는 조금 전까지 긴박하게 이어진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 한적한 곳에 조용히 나타나신 예수를 그리고 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부활일에 있었지만 누가는 먼 훗날 이 때의 사건을 정리해서 기록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제자들이 향하던 엠마오는 정확하게 어떤 곳인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3절 그 날에는 바로 부활한 그 날을 말한다. 저희 중 둘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잘 알려진 제자가 아닌 12제자들 중의 둘이라고 본다. 14절 이 모든 된 일은 빈 무덤과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15-16절 부활하신 주님은 이야기를 나누며 엠마오로 향하던 이 두 제자들과 동행하기 시작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바로 알아보지를 못했다. 그 이유로 누가는 눈이 가리워져서 kratevw(클라테오) "고정되어 변동이 없음"라고 기록한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주님의 부활이 바로 인식되지는 못했다(마28:17, 요20:14, 요21:4).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쉽게 인식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부활의 육체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몸을 입으신 것 같다. 제자들이 같이 걷는다고 해도 주님이 계시하고자 아니하시면 알 수 없었다. 31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로 보아 더욱 그의 몸은 신비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해석할 때에 영적인 해석을 한다며 마치 제자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어서 예수가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바른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제자들의 어떤 영적인 문제가 있다기 보다는 예수께서 신비스러움으로 부활의 육체를 입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24:36-43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마28:16-20, 막16:14-18, 요20:19-23 비교하라 예수의 신비스러운 나타남과 육체는 제자들로 하여금 37절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게 했다. 그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영으로만 생각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38절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고 기록했는데 이 말씀을 마가는 "꾸짖으셨다"(막16:14)고 보았다. 그리고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고 하신다. 영만은 육체가 없되 온전히 부활하신 예수께는 육체도 그 전에 제자들이 알고 있던 그대로임이 분명한 것이다. 예수의 육체를 확인한 제자들은 41절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이는 부정한 것이 아니라 너무 기쁜 나머지 믿어지질 않을 정도의 감격과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43절 잡수시더라 생선 한 토막을 잡수심으로 더 완벽하게 육체의 부활을 확인시켜 주셨다.
24:44-49 예수의 마지막 분부
44절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는 구약에 예언을 총칭하는 것으로 신약에서 구약을 가리킬 때,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서신서들)" 이라고 할 때가 많았다(눅16:16, 29, 31, 눅24:27, 마5:17, 행28:23 등).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예수의 부활을 확인한 제자들에게 자신이 말했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준다(눅9:31, 눅18:31-33, 눅22:37). 45절 마음을 열어 nou'n(누운) "이해력, 판단"을 말하는데 예수를 의심하던 마음이 믿음으로 변화되어 dihvnoixen(디아노이젠) "완전히 열렸다"고 말한다. 48절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메시야(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말씀과 복음에 대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성취시킨 분으로의 증인이 된 것이다. 증인 mavrture"(말튀레스)는 mavrtu"(말튀스)의 복수형이다. "순교자"(martyr)라는 말이 이 단어에서 나왔다. 이 증인들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붙여지게 된 것이다. 49절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이곳에 성령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성령으로 해석하는데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요한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기록했다(요14:26, 요15:26). 이 예수님의 약속은 사도행전 2:1-4에서 이루어진다.
24:50-53 예수의 승천
막16:19-20 비교하라 50절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누가에 의해서 예수님의 승천 장소가 밝혀지고 있다. 그곳은 베다니의 감람원(행1:9-12)이었다.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손을 들어 축복기도를 하시며 거의 동시에 하늘로 ajnefevreto(아네페레토) "올리우셨다". 52절 경배하고 proskunhvsante"(프로스퀴네산테스)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예배의 대상임을 말하고 있으며 이 때부터 예수에 대한 예배가 시작된 것을 말한다.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제자들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49절에서 당부하신 대로("예루살렘" 성에 유하라) 돌아가고 있다. 53절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이모임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동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은 후 "성전"에서 "교회"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변화하게 된다.
* 51절 [하늘로 올리우]시니와 52절 [그에게 경배하고]에 [사각 괄호]로 묶은 것은 어떤 사본(스테판)에는 있고 어떤 사본(알라드본)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