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4장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ㅇ그때에(토테) -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ㅇ성령에게 이끌리어 -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성령은 그 예수
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
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
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
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
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
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ㅇ마귀(디아볼로스) -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
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
소시켜서는 안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
인이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장이(요 8:44)요, 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본
문 강해참조).
ㅇ시험을 받으러(페이라스데나이) - '페이라조'('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
5)일 뿐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
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 결단(死生決斷)의 시험
이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
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
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ㅇ광야 -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사 13:21;34:14;마 12:43;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
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산으로 보
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
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ㅇ사십 일을 밤낮으로 -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
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
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왕상
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수(神性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o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
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
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 받았던 것이다. 그러
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
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ㅇ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예수께서는 40일 밤낮동안 모든 음식
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동안
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
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등).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
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인
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
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
(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당신의 공생
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
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
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
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
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
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Godet).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ㅇ시험하는 자(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
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
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
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
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
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
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
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
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ㅇ나아와서(프로셀돈) -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ㅇ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
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
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
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단
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했다기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
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
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
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ㅇ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
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
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야적 권능을 메시야
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문제(허기)를
해결하는대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
(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된다. 이스라엘
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
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
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가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단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
(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앙을 하든 그것은 손으로 집어 들을 수 있
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아르토이)은 유대인
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
(loaves)을 가리키는 것 같다(Thayer).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ㅇ기록되었으되(게그라프타이) -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
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벧
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
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
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
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
다.
ㅇ사람이...말씀으로 살 것이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
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에
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
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
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
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
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
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단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
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 생활의
헛점을 파고 드는 사단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
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원
(元)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
나님의 말씀'(레마 데우)그 자체인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인간
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한다(Trench).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ㅇ데려가다(파라람바네이) -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
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
을 가리킨다.
ㅇ거룩한 성...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
로 가서 성전...'이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
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
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
(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
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를 뜻하는 '프테
뤼기온'이 '작은 날개'를 의리하기도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우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 위장하
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
의 메시야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ㅇ세우고(에스테센) -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를 이
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
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
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ㅇ뛰어내리라 -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
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
심으로써 메시야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
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익
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ㅇ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
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
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
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나꿔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
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
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
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
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
케한다. 이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
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
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
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
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
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ㅇ또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
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
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
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
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
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
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Bengel, Calvin, Luther;Scriptura explicanda est). 신
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르
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
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ㅇ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 -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
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사건에 근거한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
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
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
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
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을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
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ㅇ지극히 높은 산 - 누가복음에는 이같은 기록이 없다(눅 4:5).
어떤 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 내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지켜보
았던 느보산(신 34:1-3)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모든 나라를 보실 수 있는 산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천하 만국의 영광'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
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
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귀와 시험의 객관적 실재(實在)를 부인하지는 않
는다.
ㅇ천하 만국과 그 영광 -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
고(Clarke). 사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De Wette, Meyer).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
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천하 만국'을 지도상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초자연
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
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 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가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實際)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
세상의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
고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것이지 '영광'
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the former)를
버리고 후자(the latter)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이
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
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
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6:23).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ㅇ경배하면(프로스퀴네세스) -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
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
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 당착(自家撞着)이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奸計)였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bow)이면 된다는
사단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속담
을 연상시킨다.
ㅇ네게 주리라 -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 만국'의 정당한 소유
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14:30;16:11), 공중의 권세잡은(엡 2:2) 타락
한 신(고후 4:4)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이다. 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endurance)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
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
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천하 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
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使嗾)한 사단과 함께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ㅇ사단아 물러가라(휘파게 사타나) - 시리아 사본(Syrian)
이나 서방 사본(the Western)에는 16:23의 영향을 받아 '오피
소 무', 곧 '내 뒤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단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여하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단
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決然)에 찬 예수의 명
령이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
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단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
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personal name)인 '사단'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막 1:13;3:23, 26;4:
15;눅 22:3;요 13:27 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
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야 왕국이
사단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 온 것이
다(12:25-28;눅 10:1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敵)인 사단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이다(고전 15:25, 26).
ㅇ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섬기라 -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
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다. 예수는 사단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
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한편 여기서 경배'
(프로 퀴네세이스)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禮)
를 갖추는 행위이다. 한편 70인역(LXX)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
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티라', 곧 '경
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섬김'(라트류세이스)이란 원래 고용
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
(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경배'
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교호적(交互的)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
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모노) 하나님만을 섬겨야(shall
serve) 되는데 그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ㅇ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
위 앞에 마귀는 참패 한채 그분에게서 패퇴(敗退)해 갔다. 여기
서 '떠나고'(아피에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
(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한다(Hill).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첫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敗走)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
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
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
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崩壞)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
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ㅇ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번역치 않은 '카이 이두'가 문두에 제시되어 이어지는 상황에 주
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
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
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수종들다'의 '디에 코눈'
은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게속적인 도움을 준다
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8:15;25:44;27:55;왕상 19:6, 7). 따라
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氣盡)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
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에게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隨從)들었을 것이다(Bengel, Bruce, Alford,
Lange 등).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ㅇ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 '요한의 잡힘'에 대한 상세한 내력
은 14:1-12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결심했을 때를 가리키는 대략적 시점을 표시하기 위해 세례 요
한의 체포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들으시고'(아쿠사
스)는 '들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전
후 문맥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히기 전 얼마동안 유대 지방에
머무시면서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17절;막 1:15), 세례를 베풀었다(요 3:22).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에 들
어가게 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요한이 투옥된 때부터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ㅇ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 '물러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코레인'은 종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
데, 이 경우에서는 어떤 위기의식에 따른 장소적 이동과 한적한
곳에서의 '은거'(隱居)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다스렸던 곳으로, 예수의 고
향 동네이자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선교지로, 또한 은
신처로 적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유대의 중
심지인 예루살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의 갈릴리'(15절)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ㅇ갈릴리 -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히브리어로는
'고리', '주변'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복후 갈릴리 지방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건축 자재들을 공급한 대가로 갈릴리의 성읍 20을
준(왕상 9:11) 이후로 이 지방은 앗수르(왕하 15:29), 바벨론,
바사(Persia),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유행하고있던 혼합 종
교들과 제사가 갈릴리 지방에 유포(流布)되어 유대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웠으며,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요 7:41, 52) 여겨져 왔다.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ㅇ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본절에는 이 일에
대한 동기가 분명치 않으나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한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고(눅 4:29-31) 요한복음에서는 예
수의 갈릴리 정착에 대한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요 4:45)
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버나움에로의 이거(移居)는 예수
의 사역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해변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며,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구무 통로에 위치하여 예수의 사역에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참빛을 절대 필요로 하
는 흑암의 지대로서 예수 선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
는 일로 비쳐졌으며 그들의 눈에는 메시야 사역의 최적지(最適
地)가 유대 땅 특히 예루살롑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
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거함로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옛
지경(地境)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되었으며(15,16절), 예수의 이
중 사역, 즉 선지자적 사역과 몌시야적 사역(눅 4:18, 19)에 갈
릴리 지방이 더 적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ㅇ가버나움 - 신약에만 나오는 곳으로서 '나훔의 동리'라는 뜻
이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이 성읍의 소재(所在)에 대해서 전에는 '칸 민예'(Khan
Minyeh)라고 생각되어 왔으나(Stanley, Carr) 1931년의 유적
발굴 결과 아랍인이 지은 우마야드(Umayyad) 궁전의 폐허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버나움은 칸 민예에서 4km 정도 북동
쪽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으로 인정되고 있다(Thomson,
Robinson).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여 어업
이 번창하였고,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에 세관
이 있었고(막 2:14)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마 8:5-8).
또한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
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8:14;막 1:29),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곳이 고향인 듯하다.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ㅇ스불론 땅과...갈릴리여 - 여기서 영토의 범위를 표시하는 5개
의 고유 명사들은 '백성'(호 라오스)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에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중에, '스불론'과 '납
달리'는 그곳 각각의 지명을 강조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갈릴
리'를 중심으로 한 '상(上) 갈릴리' '하(下) 갈릴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해변길'(호돈 달라쎄스)이
란 70인역(LXX)의 사 9:1에 언급된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데레크
얌'곧 '바다쪽으로'란 말을 축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다로 가는 길'이라기 보다 '바다 옆' 곧 갈릴리 해안
지대로 보는 것이 좋다(Turner). 그리고 '요단 저편'이란 갈릴리
동쪽 해안 지대로서 앗수르 침공시 납달리가 곤혹을 치뤘던 곳이
다(왕하 15:29).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ㅇ흑암에 앉은 백성 - '백성'(호 라오스)이란 말은 '나라', '이
방인'을 의미하는 '타 에드네'와 구별되어 선택받은 '백성' 이스
라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15절에 언급
된 지방에 '앉은'(히브리어적 의미로는 '행하던'으로 볼 수 있
다) 백성들, 즉 멸시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
릴리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토 중 '흑
암의 지경에 행하던' 땅, 곧 종교적, 정치적 이점(利點)이 없는
가장 어두운 지역이 이제는 참 빛이신(요 1:9) 그리스도의 사역
을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흑
암'이라는 말은 '빛', 즉 '하나님의 진리'의 부재(不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참 복음의 빛이신 그리스도
께서 오시기 전 그들이 놓여 있던, '사망의 땅과 그늘'이 드리운,
곧 죽음과 절대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
이나 다름이 없는,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카데메노스.
'계속적으로 거주하며 살다'는 뜻)절망 속에 헤매었으나 자신들
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한 흑암 속에서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 4:2)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비취다'(아네테일렌)는 '특별한 예언에 따라 특
정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찬란히 빛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참
빛이 다른 지역에서가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제일 먼저 눈부
시고 아름답게 '발'(發)했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형식주의와 율
법적인 의의 빛이 폐기되어 버리고 본래의 참 빛(요 1:9)이 높이
솟아 가장 어두운 곳을 가장 먼저 가장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것
이다.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ㅇ이때부터(아포 토테) -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26:16)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
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
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ㅇ전파하여(케륏세인) -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케
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
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
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로고스)과 진리(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
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ㅇ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
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
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
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
점을 찾아볼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
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
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
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
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
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
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지역으로 자
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 "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
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
음(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막 1장 강해, '하나님의 나라 개
념'참조).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ㅇ갈릴리 해변 -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
다(민 4:11;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수 11:2;19:35;왕상 15:
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벧론 포로 귀
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막 6:53;눅 5:1)로 불리웠
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얌)라는 말과 헬라어에서의 '바다'(달라
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
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
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14:24;막 4:
37;6:48;눅 8:23;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
이 된 성읍들(마 4:13;11:20;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ㅇ베드로라 하는 시몬 -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
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
름이다(10:2;16:18;막 3:16;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
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
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ㅇ안드레 -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
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
야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
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
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ㅇ그물 던지는 것 - '그물'(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
에는 단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
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그물들',
4:20)와 '사게네' ('그물', 13:47)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
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
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
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
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 복음에
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
(눅 5:2) 반면에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
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 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
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 적소
(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
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
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
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
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
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ㅇ나를 따라 오너라 - 예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의 효력을 갖는 '따라 오
너라'(듀테)라는 표현은(10:38;눅 9:23;14:27) 예수의 사역 수행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좇아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의 육체를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
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
두 청산(淸算)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이다
(10:38, 39).
ㅇ사람을 낚는 어부 -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직업과 새로운 사명을 연결시켜
그들에게 주어질 직무가 사망의 땅과 그늘(16절)에 영원히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성령과 복음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렘
16:16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
성을 포로로 삼기 위해 어부를 보냈듯이 이제 예수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어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영광스러운 직책에 대해 자
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전(以前) 직업을 넌
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주변 환경과 밀접한 일상
사를 문학적인 표현(비유)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를
교훈하시고 나타내실 때가 많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종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람'(안드로포이)
이란 복수 용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아무튼
이 명령은 28:18-20의 대선교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
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름지기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ㅇ곧 -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제자로 부
름받는 두 사람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요 1:35-51) 크나큰 영
적 감화력(感化力)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따르라'는 예수
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들이 내.외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
을 시사한다.
ㅇ버려 두고(아펜테스) - 이 용어는 '멀리 내던지다', '포기하다'
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린 제자들
의 철저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거나, 그들의 생업을 영원히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자했던 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었고, 전에 이
미 알고 있던(요 1:35이하) 제자로서의 소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이
는 일이었다. 즉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영
구적인 제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하지만 그것
은 단지 모든 것을 미워하고(눅 14:26), 그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10:37)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6:33).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ㅇ세베대 - '여호와의 주심'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자, 예수의 이모인 살로메의 남편(27:56;막 15:40;
16:1)이다. 그의 집에서는 삯꾼을 부리고 있었으며(막 1:19,20),
예루살렘에도 그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요 19:27) 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출신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예수
와 그의 제자들의 신교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ㅇ야고보 - 이스라엘의 조상의 이름과 같은 '발꿈치를 잡았다'란
뜻이다(창 25:26). 야고보와 그의 동생(17:1;막 3:17)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로서 예수와 사촌 형제간(요 19:25)이 된다.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던 제자중 한 사람이다(17:1;막
5:37;9:2;13:3;눅 8:51;9:28). 후에 그는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피
살되어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ㅇ요한 - 이 헬라명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란 뜻을 가진다. 그
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요 1:35-37),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눅 22:8;요 13:23;19:26, 27), 장수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기록한 자(계 1:1)이다. 또한 그의 성격은 내성적(요 20:1
-10)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져(눅 9:49,54) 주님으로부터 '우뢰
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란 별명(막 3:17)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만큼 남자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주
님의 십자가 최후를 지켜보았으며(요 19:26),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의 당부에 따라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
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극진히 봉양했다 한다
(Irenaeus, Polycrates, Clement).
ㅇ배(프로이온) - 모든 배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서 여기서는 서너
명이 함께 타고 조업할 수 있을 만큼의 배였던 것 같다(막 1:20).
ㅇ그물 깁는 것 -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깁고'(카타르티조)라는 동사는 '준비하다', '수선하다'
또는 '원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눅 5:1-
11의 상황를 고려해 볼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
은 후에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일'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일선에서의 '복
음 전파 활'을, 전자는 배후에서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ㅇ부르시니 - 여타의 말씀을 생략하신 채 단지 예수께서 영적 주
도권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는 부름에 따른 어떤 특별
한 의미가 담겼다기 보다는 22절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즉각적
순종에 그 초점이 맞춰진 묘사이다.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ㅇ저희가 곧...버려두고...좇으니라 - 베드로나 안드레처럼(20절)
야고보 형제는 지체없는 순종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의 '버려 두
고'란 말도 그들이 혈연 관계를 포기하거나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좇아 제
자로서의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과(막 1:20)
인정많은 가족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은' 바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제자됨의 필수 요건이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ㅇ온 갈릴리 - 예수의 사역 당시 갈릴리는 동쪽은 요단강과 갈릴
리 바다, 서쪽은 지중해, 남쪽온 사마리아, 서북쪽은 베니게로
둘러싸여 남북이 약 80km, 동서가 약 45km 정도의 작은 지역이었
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저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
(Life 235<45>;war, 41-43)에 의하면 갈릴리는 204개
의 대소 성읍들과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비
록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는 매우 비옥하여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근처에는 호수가 위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최
소한 3백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Josephus, De Bello Jud. iii, 3, 1). 그러므로 이곳을 예수께
서 매일 2개의 마을씩 순회하며 모든 동리를 다 돌아보려고 하였
다면 안식일도 쉬지 않고 강행한다 하더라도, 3개월 이상이 걸리
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이 소모(消耗)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모든 동리를 샅샅이 돌아다녔음을 뜻하
기 보다 갈릴리의 전구역을 이리저리 왕래하시며 복음을 전파하
셨음을 암시한다(9:35).
ㅇ회당(쉬나고가이스) -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종교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서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신 31:11과 시 74
:8을 인용하여 회당이 매우 일찍이 기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
적으로 바벧론 포로 중에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느 8:1-8,
Carolus Sigonius). 예수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유대인 랍비
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Winer).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에 이곳
회당에 모여 기도와 율법을 배우는 일에 힘썼다. 특히 구약 율법
서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허락에
의해 율법 교육에 합당하며 권위있는 자가 나서서 율법을 해석,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당을 전도 활동의
무대로 활용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나(막 9:5;요 1:38) 백성
들에게(막 10:51;요 20:16) '랍비'라고 불리웠다. 이 회당이란
용어는 본서에서 '가르침'과 연결되어 나온다(9:35;13:54). 더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부분을
참조하라.
ㅇ가르치시며...전파하시며...고치시니(디다스콘...케륏손...데
라퓨온)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도의 세 가지 특수한 양식(樣
式)으로서 모두 천국(메시야 왕국)과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를 암
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르치다'는 예수의 모든 활동이 근본적으
로 '교훈'(디다스코)과 관계가 있으며, '전파하다'는 예수자신이
오심과 함께 천국의 도래가 가까왔다는 '복음'(유앙겔리온)과
관계가 있다. 끝으로 '고치다'는 예수께서 천국이 축복과 더불
어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신적
인 능력을 행하신 바 이는 흑암의 왕국(16절)이 파괴되고 천국
이 '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 행 3:21)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
다. 한편 이 세 가지 전도 방법(teaching, preaching,
healing)은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선교 역사에 계승되었
다.
ㅇ천국 복음(토 유앙겔리온 테스바실레이아스) - 이 용어는 본서
9:35과 24:14에 다시 나타나는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메시야
가 임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 말이다. 한편 '천국(의)'은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비교 눅 8:1 '하나님의 나라')으로서 복음이 천국
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천국'은 세례 요한과 그
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고(3:2;4:17), 또한 그것은 산상수훈
(5-7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이 '천국 복음'일진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은 이
것을 명심하여 그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이다.
ㅇ병...약한 것 - '병'(노소스)은 일반적인 '질병'(sickness),
그중에서도 만성적이고 중한 질병을 의미하고, '약한 것'(말라키
아)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생활적 기능의 쇠약'을 의미한
다. 실로 사랑이 많으신(9:36) 예수께서는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
이 그의 사역의 최종 목표였으나 인생의 현세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아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
임하신 사실에 대한 예보(豫報)이자 천국 왕의 신임장
(credentials of the King)이다(Walvoord, 사 35:4-6;마
11:2-6).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ㅇ소문(아코에) - '들음'이라는 뜻으로서 '평판'(report,
Living Bible) 또는 '명성'(fame, KJV)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당시 예수의 전도 활동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환
대(歡待)를 받았으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ㅇ수리아 - 이곳의 지리적 범위는 불확실하나 예수당시에는 로마
의 식민지로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에 있는 갈릴리를 제외한 유대
북쪽의 팔레스틴 전체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서로 미워하였으나 이제 그곳
에도 예수의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한편 그후 바울 당시에 이
르러서는 그곳에 다메섹, 안디옥,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세워지는
등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근거지가 되었다(행 15
:41;18:18;21:3;갈 1:21).
ㅇ모든 앓는 자...중풍병자 - '모든 앓는 자'(투스 카코스 에콘타
스)는 질병에 대한 보통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고질
적인 병에 걸린 자'란 뜻으로 의학적 처방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 '모든'이라는 수식어는 정신적 질
환과 구분되는 육체의 모든 질환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이 육체
적 질환에는 그 병증에 따라 가벼운 것(각색 병)과 무거운 것(고
통에 걸린)으로 나누인다. 여기서 '각색병'(포이키라이스 노소이
스)이란 '가지각색'(various)의 병증이 크게 위급하지 않는 질병
을 가리킨다. 이에비해 '고통에 걸린 자'(바사노이스 쉬네코메누
스)란 병들어 거의 기진하다시피 고통당하는 중환자를 의미한다.
이상이 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었다면, 뒤이어 나오는 세
가지의 병명은 구체적인 분류이다.
ㅇ귀신들린 자(다이모니조메노이) - 더러운 병(17:18;막 9:25)인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음이나 몸을 혼란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결
과 귀신들린 자는 육체적인 기능이 일부 또는 전체가 상실되기도
하고(9:32, 33;막 9:18;눅 11:14), 정신적인 장애 현상(17:15;요
10:19-21)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그리
스도인(12:28;눅 10:17;행 16:18)에게 귀신은 굴복당할 수밖에 없
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불못(계 20:
14)에 던지움으로 영구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막 9:14-29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ㅇ간질하는 자(셀레니아조메노이) - 이 질병에 대한 혤라어의 본
래 의미는 '졸도 증세'란 뜻이다. 이 병은 중추 신경 계통이 이
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데, 증세는 의식을 잃는 것과 발작성
경련,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의학의 시조라 불리
우는 B.C. 4백년 경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간질을 어떤
귀신에 사로잡혀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
문에서와 같이 '간질'을 '귀신 들림'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한 '셀레니아조 메누스'란 용어는 고대 점성가들의 견
해대로 간질이 '달'(셀레네)의 '영향을 받은'(조메누스) 질병이
라고 생각하는 당시의 민간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ㅇ중풍병자(파랄뤼티코이) - 이 용어는 신약에만 나타나는 용어
로서 일반적인 마비 증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질병은
대뇌 조직의 손상이나 척추신경의 파괴, 또한 중추신경 개통의
질환으로 인하여 야기된다. 한편,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하시는
예수의 기적들은 그의 메시야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다. 다
시 말해서 타락된 흑암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불안(8:17 참조)으로부터 인간을 구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질병의 근본 원인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메시야의 사명이라는 것이다(1:21).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데가볼리(데카폴레오스) - '열 도시들'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요단강 동편과 갈릴리 바다 남쪽, 곧 북쪽의 다메섹에서 남쪽의
빌라델비아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헬라인 도시들의 연맹체이다.
이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B.C. 323) 그의 후계자들
과 노장(老將)들이 전형적인 혤라인 도시를 건설한 데서 기원되
었다. 따라서 이곳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방인들
의 거점(據點)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는 배타적이었다.
예수 활동 당시 즉 A.D. 1세기에 이 도시들은 크게 번화하여 높
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이방인들 조차 예
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은 예수사역이 유대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ㅇ요단강 건너편 -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얍복강과
아르논강 사이'로 단정하는데, 여기서는 이곳이 베레아로 소개
된 동부지역 전체를 잎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팔레
스틴 경내에 인접한 지역까지 예수의 소문이 전파되고 있는 것
이다.
ㅇ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 갈릴리에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신
예수(15,16절)의 생명의 빛이 갈릴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
서 우리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계시하는 마태의 웅장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갈릴리로 모여 들어 예수를 '좆는' '허다
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Christ follower)였지,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참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
(christan)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았을 뿐, 예수의 영적, 신적 측면, 즉 우리의 왕되신
예수께서 구원자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우
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이적과 축복만 탐하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진리와 사랑, 아니 예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한 기복적이고
현실 지상주의적인 신앙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ㅇ그때에(토테) - 문장의 서두를 이루는 말로서, 요한의 세례를
받고 성령이 예수에게 임한 후 즉시를 말한다(막 1:12, '곧').
ㅇ성령에게 이끌리어 - 예수를 잉태케 하신(1:20)성령은 그 예수
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거한(3:17) 후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도록
광야로 이끄신다(막 1:12, '몰아내신지라'). 이는 물론 외형상 성
령의 강권적인 역사에 의해 예수께서 수동(passivity)적으로 인도
당한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예수께서 성령에게 자발적으로 순종
하신 것을 나타낸다. 즉 성자, 성령의 유기적연합과 협력을 통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류의 공동 대적(大敵)인 마귀에게 나아가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자, 성령께서 마귀에게 도전했다는
뜻이 아니다. 수세(受洗)와 관유(灌油)로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께
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첫째 아담을 정복했던 사단이
둘째 아담인 자신을 꺾어버리기 위해도 전해 온 것을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 도전을 극복함으로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과 사단의 공
인(公認)을 받으며 참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었다.
ㅇ마귀(디아볼로스) - 이 단어는 엄격한 의미로 '중상모략을 일삼
는 자', '살인자'를 뜻한다. 70인역(LXX)에서 이 용어는 대적자,
저항자란 뜻의 히브리어 '사단'(사탄)을 번역한 말이다. 따라서
마귀를 인종 차별이나 범죄의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인 '힘'으로 축
소시켜서는 안된다(Schweizer). 마귀 또는 사단은 인간 타락의 원
인이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대적하며, 땅 위에 어둠의 권세를
번식시키고 사람들의 파괴를 유도하는 타락한 영(靈)들의 왕이다.
그리하여 사단을 일컬어 살인자(요 8:44)요, 악한 자(요일 5:19)요,
거짓말장이(요 8:44)요, 시험하는 자(살전 3:5)요, 참소하는 자(계
12:10), 미혹하는 자(계 20:10)요, 대적(벧전 5:8)이요, 이 세상
임금(요 12:31)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엡 2:2) 등으로 부른다(본
문 강해참조).
ㅇ시험을 받으러(페이라스데나이) - '페이라조'('유혹하다')란 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하는 사단의 계략(고전 7:5;살전 3:
5)일 뿐아니라, 인간들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연단(창 22:1;출 20:20;요 6:6;고후
13:5;계 2:2)을 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은 전자의 어
두운 면을 내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생 결단(死生決斷)의 시험
이었다. 실로 사단은 인간을 악에 빠지도록 유혹(temptation)할 뿐
아니라(계 12:10-12), 하나님께 대항하는 사악한 존재이다(창 3:1-
5). 바로 그 파괴적 실체인 사단이 예수께 한낱 대리자를 보내지 않
고 자기의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여 예수를 시험하였다.
ㅇ광야 - 성경 문학적으로 '광야'란 귀신들의 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곳(사 13:21;34:14;마 12:43;계 18:2)이다. 그런데 이곳의 구체
적인 장소에 대해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 처소인 시내산으로 보
는 학자도 있고(Alford), 다볼산(외경, '히브리인의 복음') 내지는
여리고 근처의 전설적인 시험의 장소로 보기도 한다(수 16:1, De
Wette). 그중에서 시험받은 장소가 세례 받은 장소에서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이
라도 하듯이 십자군 원정 이후 이곳 지역을 그리스도의 '40일 금식'
지역(Quarantania)으로 명명(命名)하였다고 한다.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ㅇ사십 일을 밤낮으로 - '40이란 숫자는 성경 문학적으로 징벌과 고
통, 인내와 완성, 인간 한계의 최대치,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기간
등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숫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예수의 40 주야에 걸친 금식은 이스라엘의 40년 방랑(신 8:2)과 연
결되며, 또한 그 기간은 모세와 엘리야의 40일 금식(출 34:28;왕상
19:8)과 관련되어진다. 소수 비평가들은 '40'일을 신성수(神性數)라
하여 무한한 기간으로 해석하나(Koster, Henneberg, Nender),
'밤낮'이라는 어구의 추가로 보아 문자적인 '40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한편 이스라엘과 예수는 이 40일 기간 동안 모두 굶주림으로
부터 신령한 교훈을 얻었고(신 8:3), 광야에서 대업(大業)을 준비하
기 위한 시련을 겪었다. 즉 이스라엘은 애굽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은 후,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각각 주어진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려고 시험 받았던 것이다. 그러
나 전자는 실패하였고 실패한 이스라엘을 구원키 위해 오신 예수는
완전한 승리로 40일을 마감하셨다. 한편 그때에 사단의 시험이 40일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Lenski, Alford). 그러나
마태복음은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되어있고 대부분의 학
자들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다.
ㅇ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예수께서는 40일 밤낮동안 모든 음식
을 전폐하고 육체적 소욕을 철저히 제어(control)하셨다. 아마 이
기간 동안 하나님과 깊은 영적교제의 세계로 들어가셨을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예수께서 금식하는 기간동안
에 모세와 같이 영적 무아경(a spiritual ecstasy) 속에 지냈
으며, 육체적 욕구는 중지되었다고 주장한다(Alford,
Robertson, Lange 등).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육
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음식의 결핍에서 오는 식욕의 고통과 그로인
한 육체적 쇠약을 철저히 감내해야만 하셨다. 실로 그리스도는 세상
의 금식 정신과는 달리 금욕과 고행을 위해 주리실 필요가 없으셨다
(M. Henry). 다만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키시고, 당신의 공생
애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순종과 충성을 증명하시려 이 육체적 극
기 기간을 할애하셨던 것이다. 한편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과의 대
화가 곧 그의 양식이었다(4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교제에
열중한 나머지 시장기를 잊으셨고,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에
게 만나를 먹이신 것과 같이 자신의 말씀으로 예수를 먹이셨던 것이
다. 하지만 금식 기간이 끝난 후에는 심히 주리셨고 식욕의 고통으로
인해 그분의 육체가 거의 탈진 상태에 이르렀던 것 같다. 간교한 사
단은 바로 이와 같은 결정적인 유혹의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Godet).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ㅇ시험하는 자(호 페이라존) - 사단의 성격을 나타내는 별명이다.
이용어는 신약 가운데 여기서 처음으로 사단이 죄짓도록 유혹하는
사악한 존재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사단이 예수에게 접
근하여 시험한 방법에 대한 학설은 대단히 많다. (1) 예수를 시험
하는 제사장들을 마귀로 본 것이다(V. der Hardt, Venturini,
Moller, Rosenmuller, Kuinoel, Feilmoser). (2) 마귀에 의해
서 연출된 묵시(Origen, Cyprian, Theodorus, Olshausen,
Heubner) . (3) 하나님에 의해서 연출된 묵시(Famer). (4) 예
수의 상상에 의해서 생긴 갈등(Eichhorn, Dereser, Weisse).
(5) 마귀에 의해서 자극된 예수의 갈등(Krabbe). (6) 예수의 내
적생활에서의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Neander). (7) 예수 자신
이 경험치 못한 것을 비유적인 이이야기로 꾸민 것(Schmidt,
Schleiermacher, Usteri, Alex, Schweizer, Baumgarten,
Grusius) (8) 순수한 신화(Strauss, De Wette, Gfrorer,
Meyer)이다. (9) 자연 현상(Clericus, Paulus, Gratz)이다.
위의 많은 학설들은 보편주의적인 세계관과 잘못된 그리스도관에서
비롯된 것들로서 기독교의 순수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사건은 메시야에 대한 그릇된 세속적 기대를 이용한 사단의 공격
중에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적인 사건이라 해야 하며, 이 시험은 마귀
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 대항한 사단은 사람이나,
천사 등의 모양을 하고 가시적(可視的)으로 출현했던 것으로 이해된
다(대부분 보수 주석가들).
ㅇ나아와서(프로셀돈) - 이 말은 거리상 가까이 접근한다는 뜻으로
사단의 가시적 실재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ㅇ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 첫 시험은 떡을 만드는데 부적
당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고무(encouragement)하는 것(Morison)
이 아니다. 그 시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과 어긋나는 방법으로
아들의 능력을 사용하게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단은 자신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의심했거나(Clarke) 또는 예수에게 의심하도록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에이'
로 시작되는 본문의 조건절 형태가 그 절 안에 계시된 내용을 일단
사실이라고 규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사단
은 예수의 메시야성을 의심했다기 보다 그 다음의 시험을 위한 발판
을 마련하기 위해 이 질문을 했던 것이다(Homer A. Kent, Jr).
즉 마치 십자가에 처참하게 매달려있는 예수를 향해 '네가 만일 하
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27:40)고
조소한 것처럼 사단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자기를 위
하여 사용하도록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ㅇ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하라 - 이 요구를 통해 마귀가 예수의 신
성(神性)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을 하게 된 음흉한 저의(底意)가 드러
났다. 즉 마귀는 예수로 하여금 당신이 지닌 메시야적 권능을 메시야
직의 수행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 당신이 당면한 개인적문제(허기)를
해결하는대 먼저 사용하라는 유혹을 한 것이다. 이때 만에 하나라도
(사실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께서 돌들로 떡을 만들어 잡수셨다거나
십자가에서 떠나버리셨다면 그분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에 함축되어
있는 성육신을 통한 자기 비하(卑下)를 부인하는 것이된다. 이스라엘
은 먹을 것을 요구하여 허기진 배를 채웠으나 대부분이 가나안에 들
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는 먹을 것을 거부
하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심으로써 의(義)를 유지하였고 인류에가게
영원한 생명의 떡이 되실 수 있었다. 한편 그 당시 사단이 제시한
'돌'은 빵과 같은 모양의 화석(Farra), 또는 석회질의 덩이, 철광석
(Page), 아니면 둥글고 매끄러운 돌(A.T. Robertson) 등으로
추측한다. 어떤 재질, 모앙을 하든 그것은 손으로 집어 들을 수 있
는 크기의 것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떡'(아르토이)은 유대인
들이 일상 음식으로 먹던 둥근 접시 크기 정도의 밀로 만든 구운 빵
(loaves)을 가리키는 것 같다(Thayer).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ㅇ기록되었으되(게그라프타이) - 원뜻은 '정확하게 새기다'며 완료
수동직설법으로 사용된 본문은 '기록하여 보존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란 뜻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성과 영원
효력성을 강조한 말로서 결국 본절은 마귀의 궤계(craft)를 능히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정확무오하게 기록되었으며(딤후 3:16;벧
후 1:20, 21),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히 4:12) 하나님의 말씀 밖에
는 없음을 시사해 준다(엡 6:17). 한편 예수의 답변은 모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한다. 여기서 예수의 겸손과 성경에 정통하신
지혜가 뚜렷이 드러난다. 우리신자들도 삶에 어려운 시험이나 곤경
이 닥쳐올 때에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에 의존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
씀에 의지하여 예수를 본받는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갖춰야 할 것이
다.
ㅇ사람이...말씀으로 살 것이라 - 이 구절은 70인역(LXX)의 신
8:3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던 내용이다. 그런
데 그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종, 인자, 그리고 오실 자(에
르코메노스)에 적용되었다.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씀'이 사람의 생
명을 유지시키는 양식과 관련되면서 예수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모
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즉 예수는 '떡'만을 강조하는 사단에게
땅의 양식과 하늘의 양식을 대조하여 '사람'(호 안드로포스)의 존재
양식(存在樣式), 즉 사람의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는 지탱
할 수 없다는 진리를 들어 공박(攻駁)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께서는
떡으로 '만'(우크 모노)이라는 제한적 용법을 사용하심으로써 육체
적 한계에 갇혀 있는 인간에게 '떡'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접 인정
하셨다. 그러나 그것보다 인간에게 더 필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풍요한 땅 에덴에서 성공했던
사단의 시험이 불모의 광야에서는 실패했다. 우리는 성경에서와 창
조 후 인류 역사 속에서 일시적인 '떡'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린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 왔다. 그러므로 성도된
자들은 응당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물질 생활의
헛점을 파고 드는 사단의 교활한 시험을 처음부터 근절(根絶)시켜
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out) 모든 말씀'은 성경
저자들의 귀에 들어가(in) 영감(inspiration)으로 기록된 것으로서
단순히 문자화된 경전(經典)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의 원
(元) 목적에 따라 인간의 삶을 주장하는 생명력 있고 창조적인 '하
나님의 말씀'(레마 데우)그 자체인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인간
에게 영원한 생명을 유지케 한다(Trench).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ㅇ데려가다(파라람바네이) - 이는 3인칭 단수 현재 능동태 직설법
으로 마귀가 예수를 강압적으로 끌다시피하여 목적지로 나아간 것
을 가리킨다.
ㅇ거룩한 성...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으
로 가서 성전...'이라 기록한 누가의 보고(눅 4:9)에 의하면 예루
살렘이 확실하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가 어느 곳인지는 의견이 분
분하다. 뱅겔(Bengel)은 이곳이 지성소 꼭대기라 한다. 헤게시푸스
(Hegesippus)를 인용한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소 꼭대기에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뛰어내렸다고 전한다. 몇몇 학자들은 기드론
골짜기를 향한 면에 설치된 솔로몬 행각의 난간 또는 꼭대기를 가
리킨다고 하며, 또 다른 많은 학자들은 '꼭대기'를 뜻하는 '프테
뤼기온'이 '작은 날개'를 의리하기도한다는 점에서 이곳을 '작은
날개'라 불리우는 헤롯 궁전의 남쪽 망대라고 한다(Meyer,
Alford, Thayer, Vincent 등). 이곳은 성전 외곽 건물에 속한
것으로서 요세푸스(Josephus, 고대사, XX, 9, 7;XV, 11, 5)는
그 꼭대기가 골짜기의 바닥에서 보면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로 높이
솟아있었다고 전한다. 여하튼 그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으나, 해발 750m 고지에 형성된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에서
깊숙한 기드론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리라는 것은(6절) 분명 마귀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이해할수 있다. 실로 본래의 악한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는 마귀는 자신을 종교적인 모습으로 위장하
고 성전의 권위를 가진 자로 나타나서 예수를 극구 초대하여 그분
의 메시야성에 오점(汚點)을 남기려 했던 것이다(Lange).
ㅇ세우고(에스테센) - 이 말은 앞의 '데려다가'란 말과 조화를 이
루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주관할 수 있는 권세가 '시험하는
자'(3절)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실로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욥처럼 사단의 세력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시험에 끝
까지 응해야했다. 한편 예수의 성전에로의 이동은 감각적이거나 상
상이 아니라 신체상의 직접적 이동이었다.
6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ㅇ뛰어내리라 - 깊은 심연(深淵)의 낭떠러지로 '스스로 네 몸을
날려보라'는 의미이다. 이는 마귀의 음흉한 유혹으로서, 만약 예
수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듯 뛰어내린다면 그것이 곧 허영과 야
심으로써 메시야를 고대(苦待)하는 백성들에게 하나의 확실한 표
징이 되지 않겠느냐는 유혹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메시야성을 익
히 알고 있는 마귀가 예수께 희생의 길을 걷기보다 세상적 환대와
영광을 누리는 영웅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ㅇ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 이제 사단의 공격은 예수
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 아들이 신뢰하는 하나님의 보호, 이 두
사실에 집중되었다. 여기 마귀가 인용한 성경은 70인역(LXX)의
시 91:11, 12 부분으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절대적인 보호
를 노래한 시(詩)이다. 여하튼 마귀는 그 간교한 방법, 즉 예수의
대응에 대하여 선수를 칠 요량으로 성경을 이용하여 예수의 손에
서 성령의 검(엡 6:17)을 나꿔채려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귀
는 한 구절 빠진('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하나님
의 말씀'(시 90:11, 12)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궁지에 몰아넣으
려 하는 교활한 속임수를 사용했다. 한편 여기서 '손으로 받는다'
는 표현은 적극적이고도 유효 적절한 도움을 제공한다는 뜻으로
마치 유모(乳母)가 아이를 돌보듯이 감싸 안는 듯한 상황을 예감
케한다. 이같은 편안하고도 절대적인 안전을 약속한 이 인용 구
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 대상으로 하지만 특별
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적용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표적(表蹟)에서 찾고 있었으므
로(행 8:9 참조) 마귀는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예수에게 허영적
명예심을 고무시키려 한 것같이 보인다. 그러나 마귀의 감추어진
음모는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를
증명하게 하여 마치 이스라엘이 물을 요구함으로써 '여호와를 시
험하였던'(출 17:2-7) 것처럼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저지르도
록 유혹하는 것이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ㅇ또 기록되었으되 - 마귀의 사기 행각(6절, '기록하였으되')에
대한 예수의 정확한 답변이다. 그러나 이는 앞말을 부정하여 앞
의 성구(그것이 비록 마귀가 인용한 것일지라도)를 예수께서 답
변하신 뒤의 성구와 모순되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한 사실
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또'(팔린)라는 용어가 결코 반대의 의미
를 갖지 않고 오히려 부가(附加)적 설명구에 사용되는 단어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실로 예수의 인용은 마귀가 사용한 성경
구절을 부인 또는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해석하는 원리를
보여주셨다(Bruce). 실로 성경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고 또 설
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통적인 성경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Bengel, Calvin, Luther;Scriptura explicanda est). 신
앙에 실패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르
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경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잘못 해석
함으로써 성경을 모순투성이로 만들어 버리곤 하는 것이다(벧후
3:16).
ㅇ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말라 - 예수는 보호하심에 대한 하나
님의 모든 약속들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위한 것이지,
우리의 가정(假定,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인용한 70인역(LXX)에 의한 신 6:16은 출
17:1, 7의 므리바 물사건에 근거한다. 그당시 이스라엘은 '여호와
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했던 것
이다. 실로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보호하신다는 증거로 그 약
속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분께 기적적인 표적을 요구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마땅히 가져야할 자
세는 신뢰와 순종인 것이다(신 6:17).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하와
를 유혹하여(창 3:1, '하나님이 참으로...말라 하시더냐') 하와로
하여금 동시에 하나님을 시험하도록(창 3:3,'죽을까 하노라')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시험하여 우리
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도록 만든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ㅇ지극히 높은 산 - 누가복음에는 이같은 기록이 없다(눅 4:5).
어떤 학자들은 이 산을 헬몬산 내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지켜보
았던 느보산(신 34:1-3)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우리 주께서 단지
육신의 눈으로 모든 나라를 보실 수 있는 산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천하 만국의 영광'은
가시적(可視的)인 것이 아니며, 누가복음에서는 이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심리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사실
을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은 천하 만국의 환
상을 보기 위해서 설정된 장소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 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귀와 시험의 객관적 실재(實在)를 부인하지는 않
는다.
ㅇ천하 만국과 그 영광 - '만국'을 유대 땅으로 보는 학자도 있
고(Clarke). 사단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이방 세계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De Wette, Meyer). 또한 이곳은 글자 그대로 유대
와 이방을 통칭한 모든 세계로 여겨지기도 한다(Bruce). 그러나
'천하 만국'을 지도상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초자연
적 개념을 내포한 통치권에 관계된 모든 세계를 의미한다. 그렇
다고 해서 예수께서 보신 '천하 만국'이 상징적이거나 허구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자기가 넘겨
받았다고 주장하는(눅 4:6) 세상의 모든 쾌락과 통치권의 실체를
예수에게 실제(實際)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모든
세상의 영화(prosperity)의 속성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에 뿌리박고 있는 사실을 뒤로 감추고 그 '영광'만을 보여주
고있다. 실상 예수는 '죄'를 제거하기 위해서 오신것이지 '영광'
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 전자(the former)를
버리고 후자(the latter)만을 취할 수 있다는 유혹이 온 것이
다. 훗날 베드로가 이와 유사한 제안을 했을 때 예수께서 그처
럼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었던것도 바로 이 시험의 의미를 아시
고 그것을 능히 극복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16:23).
9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ㅇ경배하면(프로스퀴네세스) - 이 동사는 지체 높은 지배자들,
특히 종교적 숭배와 예배로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리는 동양
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단은 세상의 최초 창조자도 아니고
종말론적 왕국의 최종 창조자도 분명 아니다. 더욱이 그가 잠시
행사하고 있는 악의 세력은 제한된 것이고 그는 곧 멸망할 존재
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에게 '경배'를 요구한 것은
자기 실체를 완전히 오해한 자가 당착(自家撞着)이다. 더욱이 그
같은 요구는 왕으로 만들어 준다는 미명아래 예수를 자기 수하로
삼아 예수에게 약속된 나라와 그 영광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간계(奸計)였다. 쓴 잔 대신 단 한 번의 절(bow)이면 된다는
사단의 거짓 제의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는 속담
을 연상시킨다.
ㅇ네게 주리라 - 마귀는 마치 자기가 '천하 만국'의 정당한 소유
자이며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 통치권을 주신 것처럼 말한다(눅
4:6,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사실 마귀는 이 세상의
임금이요(요 12:31;14:30;16:11), 공중의 권세잡은(엡 2:2) 타락
한 신(고후 4:4)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자신의 권세를 실현할 수 있는 흑암의 세력이며, 끝날에 형벌을
받게 될 불법적 치리자에 불과할 뿐이다. 런데도 그는 자기에게
무릎 꿇는 조건으로, 즉 고통을 감내(endurance)해야만 하는
십자가 형벌로서가 아닌 영광스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세계의
지배권을 예수께 주겠다는 것이다. 한편 이 횡령자로부터 선물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롬 13:1) 하
나님께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권세를 행사하지 않는,
마귀의 횡령에 대한 공범자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 고도
로 발달하여 하나님을 떠나서도 인본주의적(humanistic)인
유토피아('천하 만국과 그 영광')를 건설할 수 있을 것처럼 수많
은 사람들이 믿고 있으나 실상 그 대가는 유다에게 준 은 30에
불과하며 마침내는 자기에게 주어졌던 모든 소유와 권리들을
박탈당하고 그들을 사주(使嗾)한 사단과 함께 영원히 멸망받을
것이다.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ㅇ사단아 물러가라(휘파게 사타나) - 시리아 사본(Syrian)
이나 서방 사본(the Western)에는 16:23의 영향을 받아 '오피
소 무', 곧 '내 뒤로'라는 말을 첨가하여 예수의 단호한 감정을
더욱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여하튼 이 말씀은 더 이상 사단
과의 교류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결연(決然)에 찬 예수의 명
령이다. 예수께서는 이때까지 '기록된' 말씀 외에 자신의 말씀
은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으셨으나 사단의 시험이 하나님의 권위
에까지 침범해 오자 거룩한 분노를 터뜨리셨다. 특히 예수께서
마귀의 개인적 이름(personal name)인 '사단'이라고 한 것은
그의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대적자'(12:26;막 1:13;3:23, 26;4:
15;눅 22:3;요 13:27 등)로서 그의 성격을 마지막 시험에서 공
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점차 확장되는 메시야 왕국이
사단이 구축했던 왕국을 점진적으로 파멸시킬 때가 다가 온 것이
다(12:25-28;눅 10:18). 물론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적(敵)인 사단이 파멸되는 그 결정적인 날은
'곧' 올 것이다(고전 15:25, 26).
ㅇ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섬기라 - 마귀에 대한 마지막 치
명타도 역시 '기록된 말씀'이었다. 예수는 사단의 제안이 모든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거역함으로 하나
님만이 경배(worship)의 대상임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예수가 인용한 신 6:13은 유일신(唯一神) 하나님을
믿는 우리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한편 여기서 경배'
(프로 퀴네세이스)란 상대방의 손등에 입술을 맞춤으로써 예(禮)
를 갖추는 행위이다. 한편 70인역(LXX)이 번역한 히브리어 원문
에는 경배란 의미보다 좀더 종교적이고 강조적인 '티라', 곧 '경
외'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섬김'(라트류세이스)이란 원래 고용
된 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용어에서 유래한 말로서 '예배하다'
(롬 9:4), '헌상하다'(히 9:9)는 뜻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경배'
와 '섬김', 이 두 단어는 상호교호적(交互的)인 것으로 상대방을
경배한다는 것은 상대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포함한
다. 실로 모든 사람들은 '다만'(모노) 하나님만을 섬겨야(shall
serve) 되는데 그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창조주시요,
그분만이 진리요,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ㅇ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한 예수의 권
위 앞에 마귀는 참패 한채 그분에게서 패퇴(敗退)해 갔다. 여기
서 '떠나고'(아피에신)는 현재 시제로서 누가복음의 '얼마 동안'
(눅 4:13)과 같이 '적당한 시기까지' 떠남을 의미한다(Hill).
그러나 마귀는 떠난 것이지 멸망한 것은 아니다. 첫번째 심혈을
기울인 공격에서 패주(敗走)한 마귀는 다시 겟세마네에서 그리스
도의 성역 완수의 길을 단념시키려 했으며(26:36-46), 그의 추종
자 유다의 배신을 통해서 예수를 죽게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최
후의 패배로 인하여 영원한 불못에 던지워질 때까지(계 20:10)
그리스도의 왕국을 붕괴(崩壞)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을 넘
어뜨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ㅇ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헬라어 원문에는 개역 성경이
번역치 않은 '카이 이두'가 문두에 제시되어 이어지는 상황에 주
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마귀가 '떠났을 때' 천사가 '나아
온' 것과 같이 우리가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천사
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여기서 '수종들다'의 '디에 코눈'
은 미완료시제로서 음식을 공급하는 등의 게속적인 도움을 준다
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8:15;25:44;27:55;왕상 19:6, 7). 따라
서 이때 천사들은 아마 40일간의 금식 및 마귀와의 치열한 영적
전투를 치르고 기진(氣盡)한 예수의 피곤한 육신을 위해 위로하
기도 하고 또한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에게처럼(왕상 19:6, 7)
식물로서 수종(隨從)들었을 것이다(Bengel, Bruce, Alford,
Lange 등).
12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ㅇ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 '요한의 잡힘'에 대한 상세한 내력
은 14:1-12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결심했을 때를 가리키는 대략적 시점을 표시하기 위해 세례 요
한의 체포 사실만이 소개되고 있다. 따라서 '들으시고'(아쿠사
스)는 '들었기 때문에'라기 보다는 '들었을 때'를 의미한다. 전
후 문맥으로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히기 전 얼마동안 유대 지방에
머무시면서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회개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17절;막 1:15), 세례를 베풀었다(요 3:22). 그러나 세례 요한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짐으로써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국면에 들
어가게 되고 이를 강조하기 위해 마태는 요한이 투옥된 때부터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다.
ㅇ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 '물러가셨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코레인'은 종종 위험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을 의미하는
데, 이 경우에서는 어떤 위기의식에 따른 장소적 이동과 한적한
곳에서의 '은거'(隱居)를 동시에 의미한다. 그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스가 다스렸던 곳으로, 예수의 고
향 동네이자 멸시받고 소외된 지역이었기에 선교지로, 또한 은
신처로 적합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유대의 중
심지인 예루살롑에서 멀리 떨어진 '이방의 갈릴리'(15절)에서
시작하기로 결심하신 것이다.
ㅇ갈릴리 -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으로 히브리어로는
'고리', '주변'을 의미한다. 가나안 정복후 갈릴리 지방은 아셀,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 분배되었다.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성전 건축 자재들을 공급한 대가로 갈릴리의 성읍 20을
준(왕상 9:11) 이후로 이 지방은 앗수르(왕하 15:29), 바벨론,
바사(Persia),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고
포로와 이민족의 이주가 되풀이 되어 혼혈 인종, 혼합 문화를
형성하였다. 또한 지중해 연안 지방에 널리 유행하고있던 혼합 종
교들과 제사가 갈릴리 지방에 유포(流布)되어 유대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로 불리웠으며, 따라서 갈릴리에서는 결코 선지자가 나지
못할 것이라고(요 7:41, 52) 여겨져 왔다.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ㅇ나사렛을 떠나...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 본절에는 이 일에
대한 동기가 분명치 않으나 누가복음에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배척한 때문인 것으로 되어 있고(눅 4:29-31) 요한복음에서는 예
수의 갈릴리 정착에 대한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의 영접(요 4:45)
을 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가버나움에로의 이거(移居)는 예수
의 사역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가버나움이 갈릴리 해변의 인구가 조밀한 지역이며,
동방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구무 통로에 위치하여 예수의 사역에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은 바로 참빛을 절대 필요로 하
는 흑암의 지대로서 예수 선교에 있어 가장 적합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갈릴리 선택은 유대인들에게는 어처구니 없
는 일로 비쳐졌으며 그들의 눈에는 메시야 사역의 최적지(最適
地)가 유대 땅 특히 예루살롑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
는 예수가 가버나움으로 이거함로써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의 옛
지경(地境)과 관련된 예언이 성취되었으며(15,16절), 예수의 이
중 사역, 즉 선지자적 사역과 몌시야적 사역(눅 4:18, 19)에 갈
릴리 지방이 더 적합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ㅇ가버나움 - 신약에만 나오는 곳으로서 '나훔의 동리'라는 뜻
이나 구약의 선지자 나훔과 관련이 있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이 성읍의 소재(所在)에 대해서 전에는 '칸 민예'(Khan
Minyeh)라고 생각되어 왔으나(Stanley, Carr) 1931년의 유적
발굴 결과 아랍인이 지은 우마야드(Umayyad) 궁전의 폐허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가버나움은 칸 민예에서 4km 정도 북동
쪽에 위치한 '텔 훔'(Tell Hum)으로 인정되고 있다(Thomson,
Robinson). 이곳은 갈릴리 바다의 북서 해안에 위치하여 어업
이 번창하였고, 동서 상업로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이곳에 세관
이 있었고(막 2:14)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마 8:5-8).
또한 가버나움은 예수의 제자 중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 야
고보와 요한의 고향이었고(8:14;막 1:29),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곳이 고향인 듯하다.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ㅇ스불론 땅과...갈릴리여 - 여기서 영토의 범위를 표시하는 5개
의 고유 명사들은 '백성'(호 라오스)과 동격으로 사용되었다. 이
지역들은 과거에 혹독한 압제와 재난을 당했으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 사회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큰 축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 중에, '스불론'과 '납
달리'는 그곳 각각의 지명을 강조한 것이라기 보다 오히려 '갈릴
리'를 중심으로 한 '상(上) 갈릴리' '하(下) 갈릴리'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리고 '해변길'(호돈 달라쎄스)이
란 70인역(LXX)의 사 9:1에 언급된 표현으로서 히브리어 '데레크
얌'곧 '바다쪽으로'란 말을 축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다로 가는 길'이라기 보다 '바다 옆' 곧 갈릴리 해안
지대로 보는 것이 좋다(Turner). 그리고 '요단 저편'이란 갈릴리
동쪽 해안 지대로서 앗수르 침공시 납달리가 곤혹을 치뤘던 곳이
다(왕하 15:29).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ㅇ흑암에 앉은 백성 - '백성'(호 라오스)이란 말은 '나라', '이
방인'을 의미하는 '타 에드네'와 구별되어 선택받은 '백성' 이스
라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15절에 언급
된 지방에 '앉은'(히브리어적 의미로는 '행하던'으로 볼 수 있
다) 백성들, 즉 멸시받고, 영적으로 가장 비참한 상태에 놓인 갈
릴리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토 중 '흑
암의 지경에 행하던' 땅, 곧 종교적, 정치적 이점(利點)이 없는
가장 어두운 지역이 이제는 참 빛이신(요 1:9) 그리스도의 사역
을 통하여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흑
암'이라는 말은 '빛', 즉 '하나님의 진리'의 부재(不在)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그것은 참 복음의 빛이신 그리스도
께서 오시기 전 그들이 놓여 있던, '사망의 땅과 그늘'이 드리운,
곧 죽음과 절대 절망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죽은 것
이나 다름이 없는, 소망이 무너진 상태에 '앉아'(카데메노스.
'계속적으로 거주하며 살다'는 뜻)절망 속에 헤매었으나 자신들
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러한 흑암 속에서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말 4:2) 그들에게 빛을 비추었던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비취다'(아네테일렌)는 '특별한 예언에 따라 특
정한 지역에서 제일 먼저 찬란히 빛났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참
빛이 다른 지역에서가 아닌 '이방의 갈릴리'에서 제일 먼저 눈부
시고 아름답게 '발'(發)했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형식주의와 율
법적인 의의 빛이 폐기되어 버리고 본래의 참 빛(요 1:9)이 높이
솟아 가장 어두운 곳을 가장 먼저 가장 찬란하게 비추고 있는 것
이다.
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ㅇ이때부터(아포 토테) -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26:16)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
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
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ㅇ전파하여(케륏세인) -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케
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
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
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로고스)과 진리(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
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ㅇ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
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
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
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
점을 찾아볼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
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
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
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
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
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
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지역으로 자
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 "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
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
음(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막 1장 강해, '하나님의 나라 개
념'참조).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ㅇ갈릴리 해변 -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
다(민 4:11;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수 11:2;19:35;왕상 15:
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벧론 포로 귀
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막 6:53;눅 5:1)로 불리웠
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얌)라는 말과 헬라어에서의 '바다'(달라
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
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
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14:24;막 4:
37;6:48;눅 8:23;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
이 된 성읍들(마 4:13;11:20;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ㅇ베드로라 하는 시몬 -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
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
름이다(10:2;16:18;막 3:16;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
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
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ㅇ안드레 -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
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
야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
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
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ㅇ그물 던지는 것 - '그물'(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
에는 단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
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그물들',
4:20)와 '사게네' ('그물', 13:47)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
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
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
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
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 복음에
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
(눅 5:2) 반면에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
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 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
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
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 적소
(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
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
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
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
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
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ㅇ나를 따라 오너라 - 예수의 신적 권위에 입각한 절대적이며
강권적인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명령의 효력을 갖는 '따라 오
너라'(듀테)라는 표현은(10:38;눅 9:23;14:27) 예수의 사역 수행
기간 동안 육체적으로 '좇아다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명령은 단순히 예수의 육체를 장소적 의미에서 좇으라
는 뜻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처한 삶의 방법과 목적과 관심을 모
두 청산(淸算)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하여 전환할 뿐만
아니라 그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라는 희생적 의미이다
(10:38, 39).
ㅇ사람을 낚는 어부 -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진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이런 직업과 새로운 사명을 연결시켜
그들에게 주어질 직무가 사망의 땅과 그늘(16절)에 영원히 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성령과 복음이라는 그물을 가지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본 구절은 렘
16:16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
성을 포로로 삼기 위해 어부를 보냈듯이 이제 예수는 포로 시대가
끝나고 메시야의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어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영광스러운 직책에 대해 자
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이전(以前) 직업을 넌
지시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렇듯 주변 환경과 밀접한 일상
사를 문학적인 표현(비유)을 사용하여 하늘에 속한 신령한 진리를
교훈하시고 나타내실 때가 많다.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실로 얻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추종해야만 했다. 여기서 '사람'(안드로포이)
이란 복수 용어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모든 인류를 말한다. 아무튼
이 명령은 28:18-20의 대선교 명령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
로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모름지기 이웃의 영혼을 돌아보는
데에 소홀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ㅇ곧 - 즉각적인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적어도 제자로 부
름받는 두 사람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요 1:35-51) 크나큰 영
적 감화력(感化力)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따르라'는 예수
의 명령을 받는 순간 그들이 내.외적 소명에 대한 확신을 가졌음
을 시사한다.
ㅇ버려 두고(아펜테스) - 이 용어는 '멀리 내던지다', '포기하다'
는 뜻으로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모든 세상적인 욕망을 버린 제자들
의 철저한 자세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는 그들이 모든 것을
남겨 두고 떠났다거나, 그들의 생업을 영원히 버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고자했던 것은 예수를 따른 것이었고, 전에 이
미 알고 있던(요 1:35이하) 제자로서의 소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이
는 일이었다. 즉 이때부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속적이고 영
구적인 제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버려야 한다는 해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하지만 그것
은 단지 모든 것을 미워하고(눅 14:26), 그것들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된다(10:37)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마땅히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기
헌신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6:33).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ㅇ세베대 - '여호와의 주심'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는 야고보와
요한의 아버지이자, 예수의 이모인 살로메의 남편(27:56;막 15:40;
16:1)이다. 그의 집에서는 삯꾼을 부리고 있었으며(막 1:19,20),
예루살렘에도 그의 가옥을 가지고 있었던(요 19:27) 점으로 보아
사회적으로 상당히 유력한 가문출신인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예수
와 그의 제자들의 신교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아들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음으로
주의 사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ㅇ야고보 - 이스라엘의 조상의 이름과 같은 '발꿈치를 잡았다'란
뜻이다(창 25:26). 야고보와 그의 동생(17:1;막 3:17)은 세베대와
살로메의 아들들로서 예수와 사촌 형제간(요 19:25)이 된다. 그는
요한과 함께 예수께서 가장 신뢰하던 제자중 한 사람이다(17:1;막
5:37;9:2;13:3;눅 8:51;9:28). 후에 그는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피
살되어 사도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행 12:2).
ㅇ요한 - 이 헬라명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 란 뜻을 가진다. 그
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가 되었고(요 1:35-37), 가장 사랑을 많이
받았으며(눅 22:8;요 13:23;19:26, 27), 장수하면서 성경의 마지막
계시를 기록한 자(계 1:1)이다. 또한 그의 성격은 내성적(요 20:1
-10)이면서도 과격한 성격을 가져(눅 9:49,54) 주님으로부터 '우뢰
의 아들'이란 뜻의 '보아너게'란 별명(막 3:17)을 얻기도 하였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흠뻑 받은 만큼 남자 제자로서는 유일하게 주
님의 십자가 최후를 지켜보았으며(요 19:26), 전설에 의하면 그는
예수의 당부에 따라 마리아를 예루살렘에 있던 자기 집에 모셔다
가 그녀가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극진히 봉양했다 한다
(Irenaeus, Polycrates, Clement).
ㅇ배(프로이온) - 모든 배에 대한 일반적 용어로서 여기서는 서너
명이 함께 타고 조업할 수 있을 만큼의 배였던 것 같다(막 1:20).
ㅇ그물 깁는 것 -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다. '깁고'(카타르티조)라는 동사는 '준비하다', '수선하다'
또는 '원상태로 회복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눅 5:1-
11의 상황를 고려해 볼 때에 야고보와 요한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
은 후에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된다.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을 깁는 일'은 '고기를 잡는일'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을 영적으로 이해한다면 후자는 일선에서의 '복
음 전파 활'을, 전자는 배후에서의 '도움'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ㅇ부르시니 - 여타의 말씀을 생략하신 채 단지 예수께서 영적 주
도권을 가지고 그들을 부르셨다. 여기서는 부름에 따른 어떤 특별
한 의미가 담겼다기 보다는 22절에서 볼 수 있는 그들의 즉각적
순종에 그 초점이 맞춰진 묘사이다.
22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ㅇ저희가 곧...버려두고...좇으니라 - 베드로나 안드레처럼(20절)
야고보 형제는 지체없는 순종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의 '버려 두
고'란 말도 그들이 혈연 관계를 포기하거나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이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어부로서의
직업에 충실하였지만 이후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만 좇아 제
자로서의 소명에만 전념하기 위하여 부친의 권한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그들은 삯꾼들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던 가정과(막 1:20)
인정많은 가족들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얻은' 바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제자됨의 필수 요건이다.
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ㅇ온 갈릴리 - 예수의 사역 당시 갈릴리는 동쪽은 요단강과 갈릴
리 바다, 서쪽은 지중해, 남쪽온 사마리아, 서북쪽은 베니게로
둘러싸여 남북이 약 80km, 동서가 약 45km 정도의 작은 지역이었
다. 한 세대가 지난 후에 저술한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
(Life 235<45>;war, 41-43
의 대소 성읍들과 촌락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갈릴리 비
록 북부는 산지를 이루고 있지만 남부는 매우 비옥하여 농경과
목축에 적합하고 근처에는 호수가 위치했기 때문에, 그 당시 최
소한 3백만이나 되는 많은 인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Josephus, De Bello Jud. iii, 3, 1). 그러므로 이곳을 예수께
서 매일 2개의 마을씩 순회하며 모든 동리를 다 돌아보려고 하였
다면 안식일도 쉬지 않고 강행한다 하더라도, 3개월 이상이 걸리
는 엄청난 육체적인 힘이 소모(消耗)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은 예수께서 갈릴리 모든 동리를 샅샅이 돌아다녔음을 뜻하
기 보다 갈릴리의 전구역을 이리저리 왕래하시며 복음을 전파하
셨음을 암시한다(9:35).
ㅇ회당(쉬나고가이스) - 이곳은 유대인들이 포로에서 귀환한 후
전국 곳곳에 세워진 종교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서 신약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인 전승에 의하면 신 31:11과 시 74
:8을 인용하여 회당이 매우 일찍이 기원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반
적으로 바벧론 포로 중에 기원된 것으로 보고 있다(느 8:1-8,
Carolus Sigonius). 예수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도 유대인들이
거주했던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건립되어 있었고, 유대인 랍비
에 의하면 예루살렘에만 460개 내지는 480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한다(Winer). 그런데 백성들은 안식일이나 주요 명절 때에 이곳
회당에 모여 기도와 율법을 배우는 일에 힘썼다. 특히 구약 율법
서는 여러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기도 했으며, 회당장의 허락에
의해 율법 교육에 합당하며 권위있는 자가 나서서 율법을 해석,
교육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예수께서는 회당을 전도 활동의
무대로 활용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나(막 9:5;요 1:38) 백성
들에게(막 10:51;요 20:16) '랍비'라고 불리웠다. 이 회당이란
용어는 본서에서 '가르침'과 연결되어 나온다(9:35;13:54). 더
자세한 내용은 눅 4:16-30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 교회' 부분을
참조하라.
ㅇ가르치시며...전파하시며...고치시니(디다스콘...케륏손...데
라퓨온) -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전도의 세 가지 특수한 양식(樣
式)으로서 모두 천국(메시야 왕국)과 그리스도에 의한 통치를 암
시하고 있다. 여기서 '가르치다'는 예수의 모든 활동이 근본적으
로 '교훈'(디다스코)과 관계가 있으며, '전파하다'는 예수자신이
오심과 함께 천국의 도래가 가까왔다는 '복음'(유앙겔리온)과
관계가 있다. 끝으로 '고치다'는 예수께서 천국이 축복과 더불
어 실제적으로 나타났다는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신적
인 능력을 행하신 바 이는 흑암의 왕국(16절)이 파괴되고 천국
이 '회복'(아포카타스타시스; 행 3:21)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
다. 한편 이 세 가지 전도 방법(teaching, preaching,
healing)은 초대 교회로부터 오늘날까지 선교 역사에 계승되었
다.
ㅇ천국 복음(토 유앙겔리온 테스바실레이아스) - 이 용어는 본서
9:35과 24:14에 다시 나타나는데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메시야
가 임하셨다는 내용을 함축한 말이다. 한편 '천국(의)'은 목적을
나타내는 속격(비교 눅 8:1 '하나님의 나라')으로서 복음이 천국
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즉 '천국'은 세례 요한과 그
리스도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고(3:2;4:17), 또한 그것은 산상수훈
(5-7장)의 중심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전파한 메시지의
핵심이 '천국 복음'일진대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은 이
것을 명심하여 그 핵심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
이다.
ㅇ병...약한 것 - '병'(노소스)은 일반적인 '질병'(sickness),
그중에서도 만성적이고 중한 질병을 의미하고, '약한 것'(말라키
아)은 그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생활적 기능의 쇠약'을 의미한
다. 실로 사랑이 많으신(9:36) 예수께서는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
이 그의 사역의 최종 목표였으나 인생의 현세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찾아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
뿐만 아니라 정신적 질병도 치유해 주셨다. 이것은 바로 천국이
임하신 사실에 대한 예보(豫報)이자 천국 왕의 신임장
(credentials of the King)이다(Walvoord, 사 35:4-6;마
11:2-6).
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ㅇ소문(아코에) - '들음'이라는 뜻으로서 '평판'(report,
Living Bible) 또는 '명성'(fame, KJV)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는
당시 예수의 전도 활동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얼마나 큰 환
대(歡待)를 받았으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ㅇ수리아 - 이곳의 지리적 범위는 불확실하나 예수당시에는 로마
의 식민지로 헤롯 안디바스의 관할에 있는 갈릴리를 제외한 유대
북쪽의 팔레스틴 전체를 포함하는 큰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서로 미워하였으나 이제 그곳
에도 예수의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한편 그후 바울 당시에 이
르러서는 그곳에 다메섹, 안디옥, 라오디게아 교회 등이 세워지는
등 초대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선교 근거지가 되었다(행 15
:41;18:18;21:3;갈 1:21).
ㅇ모든 앓는 자...중풍병자 - '모든 앓는 자'(투스 카코스 에콘타
스)는 질병에 대한 보통 표현으로 볼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고질
적인 병에 걸린 자'란 뜻으로 의학적 처방으로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 '모든'이라는 수식어는 정신적 질
환과 구분되는 육체의 모든 질환을 가리킨다 할 것이다. 이 육체
적 질환에는 그 병증에 따라 가벼운 것(각색 병)과 무거운 것(고
통에 걸린)으로 나누인다. 여기서 '각색병'(포이키라이스 노소이
스)이란 '가지각색'(various)의 병증이 크게 위급하지 않는 질병
을 가리킨다. 이에비해 '고통에 걸린 자'(바사노이스 쉬네코메누
스)란 병들어 거의 기진하다시피 고통당하는 중환자를 의미한다.
이상이 주로 질병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었다면, 뒤이어 나오는 세
가지의 병명은 구체적인 분류이다.
ㅇ귀신들린 자(다이모니조메노이) - 더러운 병(17:18;막 9:25)인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마음이나 몸을 혼란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 결
과 귀신들린 자는 육체적인 기능이 일부 또는 전체가 상실되기도
하고(9:32, 33;막 9:18;눅 11:14), 정신적인 장애 현상(17:15;요
10:19-21)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그리
스도인(12:28;눅 10:17;행 16:18)에게 귀신은 굴복당할 수밖에 없
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귀신은 사단과 함께 영원한 불못(계 20:
14)에 던지움으로 영구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막 9:14-29 강해,
'귀신들림과 축사' 참조).
ㅇ간질하는 자(셀레니아조메노이) - 이 질병에 대한 혤라어의 본
래 의미는 '졸도 증세'란 뜻이다. 이 병은 중추 신경 계통이 이
상을 일으킴으로써 생기는데, 증세는 의식을 잃는 것과 발작성
경련, 또는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난다. 의학의 시조라 불리
우는 B.C. 4백년 경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는 간질을 어떤
귀신에 사로잡혀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태는 본
문에서와 같이 '간질'을 '귀신 들림'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으며,
그가 사용한 '셀레니아조 메누스'란 용어는 고대 점성가들의 견
해대로 간질이 '달'(셀레네)의 '영향을 받은'(조메누스) 질병이
라고 생각하는 당시의 민간 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ㅇ중풍병자(파랄뤼티코이) - 이 용어는 신약에만 나타나는 용어
로서 일반적인 마비 증상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이 질병은
대뇌 조직의 손상이나 척추신경의 파괴, 또한 중추신경 개통의
질환으로 인하여 야기된다. 한편, 이러한 질병들을 치유하시는
예수의 기적들은 그의 메시야로서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다. 다
시 말해서 타락된 흑암의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불안(8:17 참조)으로부터 인간을 구
원하실 뿐만 아니라 그 질병의 근본 원인인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이 메시야의 사명이라는 것이다(1:21).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데가볼리(데카폴레오스) - '열 도시들'이란 뜻을 가진 이곳은
요단강 동편과 갈릴리 바다 남쪽, 곧 북쪽의 다메섹에서 남쪽의
빌라델비아에 이르는 곳에 위치한 헬라인 도시들의 연맹체이다.
이 도시들은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B.C. 323) 그의 후계자들
과 노장(老將)들이 전형적인 혤라인 도시를 건설한 데서 기원되
었다. 따라서 이곳은 헬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이방인들
의 거점(據點)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과는 배타적이었다.
예수 활동 당시 즉 A.D. 1세기에 이 도시들은 크게 번화하여 높
은 수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있었으며 이곳의 이방인들 조차 예
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왔다는 사실은 예수사역이 유대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ㅇ요단강 건너편 -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얍복강과
아르논강 사이'로 단정하는데, 여기서는 이곳이 베레아로 소개
된 동부지역 전체를 잎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로 팔레
스틴 경내에 인접한 지역까지 예수의 소문이 전파되고 있는 것
이다.
ㅇ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 갈릴리에서 빛을 비추기 시작하신
예수(15,16절)의 생명의 빛이 갈릴리를 넘어서고 있다. 여기에
서 우리는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계시하는 마태의 웅장한 의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갈릴리로 모여 들어 예수를 '좆는' '허다
한 무리'들은 '그리스도의 추종자'(Christ follower)였지,
그리스도를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는 참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
(christan)은 아니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인
측면만 보았을 뿐, 예수의 영적, 신적 측면, 즉 우리의 왕되신
예수께서 구원자 하나님 되심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실로 우
리는 예수께서 주시는 이적과 축복만 탐하고 예수께서 베푸시는
진리와 사랑, 아니 예수 그 자체에 대해서는 둔감한 기복적이고
현실 지상주의적인 신앙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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