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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구약/욥기

[스크랩] 욥기 (7 : 1~2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7. 21:15
욥기 7장


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 과 같지 아니하냐

ㅇ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 `전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바'는 `군대',
`전쟁', `부역'(사 40:2)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군대에 지용된 자가 무거운 고역을
강제적으로 해야하듯 인간 역시 고역스러운 삶을 영위해 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의미이
다. 한편 여기에서 욥은 인생 일반을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고통스런 삶의 정황을
직접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생 일반의 고통이라
기 보다는 현재 자신의 고통의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현 상황은 군인이 강
제적(의무적)으로 힘든 고역을 수행해야 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재난(1:13-1 9)을 필
연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현재 상황은 주인(하나님)에게
고용되어 하루의 노동량(욥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재난'으로 볼 수 있겠다 )을 묵
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군'(본절 하반부)이나 다름 없었다.

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ㅇ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품꾼의 노동 시간은 엄
격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날이 밝거나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 그것
을 끝냈다. 따라서 품꾼에게 있어서 해가 저무는 것은 단순히 일의 종결 시간을 뜻하
는 것 이외에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과 평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것
이기도 했다. 여기서 욥은 고난의 때가 속히 끝나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노동
시간이 속히 끝나기를 염원하는 품꾼의 심경에 비유하고 있다.

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ㅇ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공허한(무익한)달
들을 부여받았다'(NIV, 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이다. 여기서 욥이
자신의 지난 날들을 `무익한'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고난을 타개하려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재난이 자신에게 닥친 이후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
모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상실된 채로 있었으며 자손
또한 다시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고(5절), 설상가상
으로 믿었던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갈등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욥은 이제 절망의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이 마치 열매없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ㅇ전신에 퍼진 피부병(2:7,8)으로 인해 전전반측(轉轉反側)하는 욥의 참담한 심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이요,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이다.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들이 여느 사람보다 더
욱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낮 시간 동안에 친구들과 변론함으로써
심신이 지쳐 있었을 것이며, 또한 추한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
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
이었다.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의 질병은 밤에 더욱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
(13-15절). 이러한 육체적 고통 이외에도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지 않나
하는 영적 회의와 갈등 때문에도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 되었다가
터지는구나

ㅇ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 여기서 `구더기'(라마)
는 흰 색의 길고 미끄러운 형태의 벌레로서(Quain's, Dictionar of Medicine, vol. 1,
p.512), 욥의 피부가 곪은 데에서 기생한 것으로 추측된다(17;14). 그리고 `흙 조각'
은 (1) `때'(공동번역), (2) `피부로부터 나오는 흙덩이'(Keil & Delitzsch), (3)`먼
지'(KJV, dust ; RSV, dirt), (4) `상처의 딱지'(NIV, scabs ; Lange, `굳어진 꺼풀')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여기서는 기와 조각으로 긁고(2:8), 종기가 나서 지저분하게
된 욥의 몸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묘사에 근거해 볼
때 욥의 질병의 상태가 상당히 악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ㅇ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 구나 - 이는 욥의 피부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가(RS
V, hardens)다시 터지는 것을 가리킨다. 욥은 자신의 몸에 피부병이 발병한 이래로
여러 달이 흐르는 동안(3절) 이러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문을 원문에 따라 정확히 번역하면 `나의 살갗이 깨어진다. 그리고 곪는다' 인데,
이것 역시 종기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곪아 터지고 그 위에 새 살이 돋아나는 피부
병의 일반적 증상을 가리킨다.

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없이 보내는구나

ㅇ베틀의 북 - 원문을 직역하면 `베틀짜는 사람의 북'(KJV, NIV, RSV, a weaver's s-
huttle)이다. 이것은 베를 직조할 때 실을 엮는 틀로서 대단히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
다. 이는 찰나(刹那)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고백은
4절의 말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4절에서 욥은 자신의 날이 더디간다고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병중에 있는 자들은 그 기간을 매우 길게 느
끼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은 세월의 빠름에 그 초점이 있기 보다는 그 덧없음(허무)
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여야 한다. 즉, 본절에서 욥은 아무런 성과(회복)없이 보낸
지난 몇달(3절)이 자신에게는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절망과 무가치의 시간이었음을
타나내고 있다(본절 하반부).

7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ㅇ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 `호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
'는 `바람'(KJV, wind) `공기', `영'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짧은 기간을 상
징함과 아울러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한다(시 78:39; 전 1:14; 사 41:29; 렘 5:13).
아마 욥은 자기 병이 치유 불가능하다고 예견했을 것이며, 따라서 죽음만이 그것을 모
면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
가 전환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6:1-7:6까지의 욥의 변론은 엘리바스와 그 친
구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본절에서 부터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가
대화(dialogue)형식이었다면 후자는 독백(soliloquy) 형식을 띠고 있다.
ㅇ복된 것 - 좁게는 (1) 그의 질병이 완치되는 것(2:8, 9)을, 넓게는 (2) 그의 건강,
소유(1:3), 자손(1:2) 등이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5장
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약속한 축복(5:17-27)과 동일하다.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
그 같은 축복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하였다. 이로써 욥은 끝없는 절망의 심연
에 빠지게 되었다.

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
지 아니하리이다

ㅇ나를 본 자 -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면 `지금 나를 보는 자'(NIV, (the eye) that n
ow see me)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보아왔던 자'(KJV, him that hath seen me)로
번역하는 것이 전후 문맥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전자의 견해를 취할 경우 본문은 욥
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가리키며,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는 지금까지 욥을 알고
지내왔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ㅇ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 전절(前節)에서 욥은 친구
들과의 사별(死別)을 토로한데 이어, 여기에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토로하고 있다.
즉, 욥은 죽음이 현세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단절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도 종결시
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죽음을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
였던 것 같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죽음의 종결성'이란 측면에서만 살필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욥의 갈망'이란 차원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해 왔다. 이러한 그의 염원은 "내가 친히 그
(하나님)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
하구나"(19:27)라는 고백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현재 욥의 상황은 이러한 그의
심적 염원 상태와 정반대로 전개되어 구원의 여하한 가능성 조차 상실되어 가고 있다.
육체적 질고가 악화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간다. 즉,
현재 욥은 영적.육적 생명의 위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ㅇ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올'은 `비었다', `깊다'를 의미하는 동사 `솨알'에서 유래
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음부'를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 세계로
인식했던 것 같다(창 37:35; 민 16:30, 33; 시 55:15; 사 5:14). 그런데 본절에 기초
해 볼 때 욥이 음부 세계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가졌는지 정확히 추측하기는 사실상 불
가능하다. 왜냐하면 본서는 그 분류상 시가 문학(詩歌文學)에 속하며, 따라서 죽음과
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묘사 역시 교리적 성격보다는 시적.비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
이다. 다만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은 음부에서 지속, 고정되며
현세로 되돌아오거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음부 세계에 대
한 욥의 이러한 관념은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된다고 믿은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인들의 내세관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를 왕
래한다고 믿은 반면, 욥은 이 양자(兩者)사이의 단절성을 믿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
세관은 이방의 그것과 구별되며, 신약의 내세관의 한 토대를 형성했다 하겠다(마
18:9; 눅 16:19-31; 계 20:10).

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ㅇ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 음부 세계와 현세와의 단절성을 의인법
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8절 주석 참조). 고대 팔레스틴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
이 생전에 그가 살던 집이나 아끼던 물건에 도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애굽
인들은 영혼이 육체에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들이 미이라를 만들어 무덤속에 보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욥은 이방 세계에 살았으나 그들의 이 같은종말관
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관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ㅇ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말하며...원망하리이다 - 본문은 앞으로 전개될 욥의
변론(불평)에 대한 서론격으로서, 욥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심각성으로 인해 심중
(心中)에 있는 불만을 기탄없이 하나님께 털어놓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욥의 연설
(演說)은 얼핏 보기에 매우 경거 망동(輕擧妄動)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본절 이하에
서 전개되는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는 이러한 인상이 더욱 짙게 풍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욥의 이러한 언사(言辭)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유일성, 그리고
인격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것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인식했
으며(하나님의 주권), 또한 그분을 고난에 처한 인간(욥)의 소리를 들어 주시는 분으
로 확신했던 것이다(하나님의 인격성).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욥은 고난 중에
차라리 영원히 침묵해 버렸거나 아니면 자살 등의 방법으로 고난을 종결시켜 버렸을런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욥의 말들을 고통에 대한 불평과 비난만으로 볼 것이 아
니라 고난에 처한 한 인간의 신앙적 갈등의 토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12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ㅇ내가 바다니이까 - 어떤 학자는(Delitzsch, Hirzel) 본문의 `바다'(얌)를나
일강으로 보기도 한다. 그 증거는 사 19:5에 쓰인 히브리어 `얌'이 나일 강을 가리키
는 것으로 단정지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큰
강(예를 들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개 시설이 발전되지 않은 고대 사횡에서 이들 강들은 우기(雨期)때에 삽
시간에 흘러 넘쳐 주변 지역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특히, 상류 지역에 홍수가 날
때에는 강바닥이 패이고 강둑이 유실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천시에 특별
한 신경을 써서 강 수의(首位)를 관찰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처럼
흉융하고 격랑하는 바다를 지켜보는 것같이 욥은 자신의 일거 수일 투족(一擧手一投
足)이 하나님으로부터 감찰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의 감찰(보호)이 도리어 현재의 욥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처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바다'와 같이 취급될 만한 하등의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강물이
흘러 넘쳐 인명과 재산에 손실을 주는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
는 하나님과(1:1, 8) 사람 앞에서(4:3, 4) 공의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둘째, 그는 바
다와 같이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성향(性向)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
외하는 의인(1:1)이었으며, 더구나 바다와는 구별되는 이성적 피조물이었다. 이상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절에서 욥은 (1)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자기의 주장), (2) 따라서 현재 자기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행위는 부당하
며(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 (3) 자신은 그 같은 행위(재난)를 흔쾌히 수납(受納)
하거나 끝까지 인내할 수 없다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ㅇ용이니이까 - 여기서 용은 (1) `고래'(KJV, a whale), (2) `심연의 괴물'(NIV, the
monster of the deep), (3) `악어'(Delitzsch), (4) `용'(Lange), (5) `큰 짐승'(박윤
선)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중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닌'이 `뱀'(출 7:9, 10, 12; 신 32:33; 시
91:13), `큰 물고기'(창 1:21), `악어'(겔 29:3; 32:2), `용'(사 27:1; 51:9; 렘 5
1:34) 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은 전절에 나타난 `바다'와 마찬가
지로 그 성질이 난폭하고 거세어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바다의 큰 생물을 가리키는 것
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욥은 어부(漁夫)가 큰 바다 괴물을 잡을때 그시
선을 집중하며,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또는 부
당하게)다루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 속에서도 욥은 여전히 하나
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며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ㅇ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 - 극난(極難)한 고통
중에 잠시나마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염원하는 욥의 심경이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드
러나 있다. 그의 병은 발병(發病)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다(3절). 이 기간 동안 욥
은 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러나 병이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
다. 낮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세인(世人)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 역시 그가 갈구하던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도리어 전신에
퍼진 피부병이 밤중에 발작(發作)을 더 심하게 일으켜 그는 속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
야 할 형편이 되었다(4절). 어느 한 순간에도 영육의 평안을 갖지 못했다는 욥의 고백
속에서 그가 겪은 고통의 실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ㅇ심신의 질곡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수면과 평안이다. 욥 역시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13절).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잠과 휴식이 아닌
불쾌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꿈'과 `이상'을 사단의 역사(役事
)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Adam Clarke). 사단이 욥을 칠 수 있는 전권(全權)을 하
나님께로 부여받았다(1:12; 2:6)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
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욥의 병고(病苦)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후유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특
히 정신적 갈등을 동반하는 병자에게는 악몽(惡夢)과 환영(幻影)이 자주 보여지기 때
문이다. 어쨌든 욥은 병중에서 안식과 평안을 취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도리어 악몽
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15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ㅇ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 성경에서 `뼈'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 실례로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창 2:23)로, 라반이 야곱
을 `나의 골육'(창 29:14)으로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삼하 5:1; 사 38:13 등). 그런
데 본절에서는 욥이 오랜 질병으로 말미암아 몹시 수척해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ㅇ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 여기서 `생명'은 문자적으로 `목숨', `삶'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현재 처한 욥의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욥이 자신의 생
명(삶)을 혐오한 것은 (1) 질병의 악화(5절), (2) 정신적(신앙적) 고통의 심화(13-15
절), (3) 회복의 가능성 전무(全無)(7,8절)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
듯 욥이 강력하게 삶을 저주하고 죽음을 희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간구하는 욥의 고투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ㅇ나를 놓으소서 - 절망의 한계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원초적 신앙을 견고히 고수
하고 있는 욥의 자세를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하나님으
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
을 확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삶(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에게 죽
음을 허락할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욥이 생사(生死)
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음을 드러내 준다. 이 같은 욥의 신앙
은 일찍이 그가 사단의 시련을 받았을 때부터 피력되었으며(1:21), 그의 질병이 진행
되는 과정 중에서도 보여졌었다(6:4). 이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
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참신앙이라 하겠다.

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ㅇ본문은 시 8:4; 히 2:6-8과 내용상 유사하다. 그러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
어서 시편 기자 및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과 다르다. (1) 동기(상황) : 욥의 고백은 견
딜 수 없는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절망과 한탄조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
편과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기쁨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2) 의도 : 욥의 고백은 실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지속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19절)에 대한 원망의 토로이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가지의 고백은 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마치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특별히 여기사 권고하시고 은혜를 베
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
나님의 관심과 눈길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화살과도 같았던 것이다. 왜냐하
면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으며(6:4), 그분의 눈
길(관심)이 존속하는 한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한 죽음(3장)마저도 불가능한 것으
로 보았기 때문이다.
ㅇ크게 여기사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가텔레누'는 `창대케하
다'(창 12:2), `더 크게 하다'(왕상 1:37), `(명성, 지위 등을)존귀하게 하다'(대상
29:25), `(키를)자라게 하다'(사 44:14)등 다양하게 쓰였다. 여기서는 `존귀하게 하다
'(magnify)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벌레와 같이 작은 존재(25:6; 시 84),
하나님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이 미천한 존재(시 90:10; 전 8:8)인 인간이 이렇듯 존
귀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축복일진대 욥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도리어 불평과
원망의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고백속에서 우리는 그가 당한 고난의 심각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ㅇ마음을 두시고 - 히브리 관용법에 따르면 이 표현은 `관심을 기울이다'(pay heed t
o), `배려하다'등의 뜻이다(출 7:23; 삼상 4:20; 시 48:13, 14).

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ㅇ나의 침 삼킬 동안 - 18절에 나타난 `아침마다', `분초마다'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은 18절의 그것보다 더 세분된 시간을 가리킨다. 즉, `침 삼킬
동안'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18절에서 시
작된 과장법적 표현이 본절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서 매순간마다 고통을 당해야 하는
욥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하셨나이까

ㅇ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 하 아담 노첼) - 이러한 표현은 하
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 관심과 그의 백성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다(사 27:3). 이 표현이 성경에서는 `지키는 자'(시 25:10), `보호자'(시
31:23), `포도원지기'(사 27:3), `파숫군'(렘 31:6), `상직군'(27:18)등으로 사용되었
는 바, 이는 공히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지배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도리어 부담과 불평의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감찰하시는 주가 계시는 한 그는 자기의 뜻대로 죽음을 택할
수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감찰은 도리어 그이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키
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ㅇ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
석된다. (1)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극히 미천한 존재인 인간(욥)의 범죄가 초월적이
고 광대하신 하나님(시 145:3)께 아무런 영향이 끼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
무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까닭에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22:2-4; 35:5-8)에 의해 아무
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것으
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며, 조그마한 범죄라도 하나
님의 분노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죄의 심각한 본
성을 알고 있었다. (2)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
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철저히 경건 생활에 전력했던 욥이 그토록 큰 환난을 당한 데
대해 깊은 의구심을 타나낸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맥상 비교적 타당하게 여겨진다.

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 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


ㅇ내 허물...내 죄악 - 이 말은 지금까지 전개된 욥의 고백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의심했을 때에도 자신은 결코 그같은 의심을 받을 만한 행위
를 하지 않았음을 거듭 주장한 바 있다(6:24).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욥의 변론의 범죄 : 욥은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심한 독설
(毒舌)을 여러 차례 토로하였다(3장). 이러한 언설(言說)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비신
앙적인 것으로 지적받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욥은 자신의 말이 신앙의 길에서 일면
이탈되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2) 인간의 원초적 죄성 : 욥이 무흠한 이물로서 `
자신의 의'(자기 의)를 주장하기는 하였으나(6:24)원론적 측면에서 볼 때 그를 포함한
모든 인생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직시하였다(9:2). 물론 이러한 그
의 인식이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과 죄성을 인식하는 차원, 그리고 행위가 아닌 전적으
로 신앙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신 득의(以信得意)의 단계에까지
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
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ㅇ이제 흙에 누우리니 - 이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날로 악화되어 가는 병고로 인
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흙에 눕다'는 표현
은 `자다', `흙으로 돌아가다'(창 3:19)는 표현과 더불어 인간의 죽음을 나타내는 히
브리 관용 어법 중의 하나이다.
ㅇ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아직껏 욥은 하나님께서 언
젠가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시기가
너무 늦을 것이라는 예감, 그래서 자신은 그 구원을 입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갈 것
(6-10절)이라는 생각이 욥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한 반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욥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고로 그 구원을 베푸실 시기가 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주
어진 사단의 시험(2:4-6)이 온전히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갖고 계셨다(42:8). 바로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욥의 신앙은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욥은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고난받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침묵속에 그를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했
어야 마땅하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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