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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요한1서

[스크랩] 요한일서 (4 : 1~2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7:31
요한일서 4장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ㅇ사랑하는 자들아. - 이것은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저자 요한이 진술하고자
하는 주체로 수신자들의 관심을 전환시키기 위한 호칭이다. 요한은 본절 외에도 이와
같은 표현을 본장에서 두 번 더 사용하여 수신자들의 관심을 야기시키고 있다(7,11절,
Brooke).
ㅇ영을 다 믿지말고. - '믿지 말고'의 헬라어 '메...피스듀에테'
는 '진실한 것으로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이는 '시험하라'와
연결되어 모든 영을 대할 때에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잘 분별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시사한다.
ㅇ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 '영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뉴마타'
는 복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악한 자의 영이 많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후에 언급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가리킨다(Marshall).
한편 '시험하라'는 기준을 가지고 분별하는 것을 가리킨다(Stott). 이것은 바울 서신
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로 바울에 따르면 영들을 시험하여 분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하나의 특별한 은사이다(고전12:10). 그러나 여기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갖추어
야 하는 분별력을 가리킨다(Westcott). 요한은 당시 수신자들 사이에 스스로 영감을
받았다고 자장하던 이단자들을 염두에 두고 수신자들이 이들을 시험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함으로 무조건 따르지 말것을 권면하고 있다.
ㅇ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 본문은 수신자들이 영들을 시험해야
할 이유이다. '거짓 선지자'는 신약성경에서 '진실한 선지자'를 대적하는 자나(눅
6:26; 벧후2:1), 혹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이끌어 가는 사도들을 대적하는 자들을 가
리킨다(마7:15; 24:11,24; 행13:6).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은 종말론적 현상이
다(2:18; 막13:22, Barker). 거짓 선지자는 적그리스도와 깊은 연관을 맺으며 그리스
도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거짓된 가르침이나 교리
로 미혹하는 자들로서(마24:11; 살후2:3; 계20:10)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
적하도록 유혹한다.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ㅇ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 '하나님의 영'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13절; 3:24, Stott). 이 견해에 따르면 본절은 성
령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하심을 의미한다. (2)혹자는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영
감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JB, Smalley). 이들은 본절이 앞절과 연관되
어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나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더 나은 듯하
다. 한편 '알지니'로 번역된 헬라어 '기노스케테'에 대해서
혹자는 명령법으로 해석하나(Law), 본서 어디에서도 명령법으로 사용된 적이 없는 것
으로 보아 직설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Westcott, Smalley, Brooke). 요한
은 본문네서 수신자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신자들이 알고 경
험했던 영적인 사실들을 잘 지키며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기시키고 있다(13절;
3:16; 5:2)
ㅇ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
본문은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거짓 영
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기준이다. 그 기준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의
인정 여부이다. 요한 당시 수신자들 가운데에는 영지주의의 가현설(Docetism)에 빠져
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공동서신 개론의
"공동서신의 이단 사상" 참조). 요한은 본절에서 이러한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를 공격하고 있다. 한편 '오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엘렐뤼도타'
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요이1:7에서 현재 시상으로 사용된 것과 대조를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사건이 영원한 사실이며 현
재에도 계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시사한다(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셨다(1:1,2; 3:1; 5:1; 요
1:12-14, Westcott).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할 뿐만 아
니라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한다. 즉 그는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신
이셨다(Marshall, Smalley).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ㅇ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 비록 '육체로 오
신'이 생략되어 있다 할지라도 본문은 앞절과 대조를 이루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
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반대로 예수께서 성
육신하신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거짓 영에게 지배를
당하는 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성령의 도움으로 성육신을 시인하는 것과 거짓
영의 지배를 받아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절대로 중간 지대란 있을 수 없다(Law).
오직 양극만이 존재할 뿐이다.
ㅇ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토 투
안티크리스투'는 헬라어 어순상 앞절의 '토
프뉴마 투 데우'('하나님의 영')와 대조를 이
루어 '프뉴마'('영')가 생략되어 있는 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에는 '토 투 안티크리스투'가 거짓 영을 의미하나(Law) 문맥상 본문은 거짓 영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들, 즉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Stott, Smalley).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세상에 오심을 부인하거나, 그리스도께서 선
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사단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거짓 선지자
들이다.
ㅇ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 '이제 벌써'는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들이 종말에
출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했고(2:18) '이제 벌써' 수신자들 사이에 존재함을 밝힘
으로 종말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Smalley). 한편 '세상에'는 1-6절 사이에 무려
6번이나 나타나며 모두 부정적인 측면에서 사용되고 있다. '세상'은 적그리스도의 영
이 지배하며 통제하는 곳으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들을 비롯한 모
든 것을 지칭한다.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ㅇ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 요한은 본문에서 다
시 '자녀들아'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수신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켜 수신자들이 적그리
스도의 영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여 그들을 이기었음
을 확신시키고 있다. '하나님께 속하였고'는 수신자들이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세상과 연합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시사한다. 한편 '이
기었나니'의 헬라어 '네니케카테'는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승리가 과거에 결정적으로 성취된 것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효과가 현재까지 지
속됨을 시사한다(Houlden). 이 승리에 대해서 혹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리가 거짓임이 판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본서에서 믿음과
행위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문의 승리는 지식적인 면에서 거짓된 교리에 대
한 분별 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통해서 거짓된 교리를 정복하
고 있음을 시사한다(Smalley).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교리의 유혹을
물리치고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다.
ㅇ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 본문은 하나님께 속한
수신자들이 세상을 이긴 이유이다. '너희 안에 계신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 엔 휘
민'에서 '이'를 의미하는 '호'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3:20, Haas). (2)혹자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
나님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2:14; 3:24; 요14:20,23, Westcott). (3)혹자는 그리스도
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절; 2:20,27; 요14:16,17;
16:13-15, Stott, Houlden). 이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신 삼위 일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가운데 역사하
셔서 사단의 영향력 하에서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즉 진
정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되며 그 결과로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있는 이'는 사단이나 악한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2:13,14;
3:12; 5:18,19) 그는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아니하고 세상에 속한 자들을 미혹하며 그
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오직 세상에 속한 자들에 한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그 세력을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를 통해서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그 승리에 동
참하기 때문이다(6절; 요16:33; 롬8:31, Stott, Calvin).

5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ㅇ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
'저희'는 적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킨다(Barker, Smalley). 한편 '세상에 속한 고로'의 헬라어 '에크 투
코스무'에서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로 거짓
선지자들이 세상에서 비롯되었으며 세상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임을 시사
한다. 또한 '세상'을 지칭하는 '코스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복음과 반대
되는 사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요한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주장하던 성육신을 부인
하는 사상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사상과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2)그러한 사상에 미
혹된 자들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대치되는 당시 사상에 탐닉했
고 그것에 빠져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하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려 했다.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ㅇ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 요한은 4절까지 '너희'라는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
여 수신자들만을 지칭하였으나 본절에서는 인칭 대명사 '우리'를 사용하고 있다. '우
리'에 대해 혹자는 사도들만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나(Stott, Brooke)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Smalley, Barker, Haas,
Schnackenburg). 왜냐하면 이미 수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4절).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으며 하나
님과 교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
ㅇ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자'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 '우
리의 말을 듣고'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를 대조시키고 있다. '아는'에 해당
하는 헬라어 '기노스콘'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르친 거짓 교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속
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는 지식을 가리킨다. 더욱이 본절의 '아는'은 현
재 시상으로 그 지식이 지속적이며 성장하는 것이어야 함을 시사한다. 한편 '우리의
말'은 사도들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 즉 처음부터 있었던 말씀을 가리킨다(2:7,
24; 3:11; 요이1:5,9). 거짓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가르침을 주장
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을 부인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마 아니라 하나님에게 소속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ㅇ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 '진리의 영'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혹자는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요14:17; 15:26;
16:13, Marshall, Stott). (2)혹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가리
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Dodd, Haas).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며
의미상으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 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사도들을 포함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거
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것에 대해서 진술해 온 것으로 보아 후자가 보다 적합한 듯하
다. 한편 '미혹의 영'은 '진리의 영'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 이것 역시 사단을 가리
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사단의 지배 하에서 거짓 가르침을 전하고 사람들을 미혹하
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별하는 기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청송하는 여부에 달려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ㅇ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 '사랑하는 자들아'는 본서에서 6번 나타
난다(1,11절; 2:7; 3:2,21). 이 호칭은 요한이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도로
서 수신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요한은 이 호칭을 사용하여 서
로 사랑해야 함을 요구하기 이전에 자신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한편
'사랑하자'의 헬라어 '아가포멘'은 현재 시상으로 서로 사랑하
라는 명령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하나님의 요구임을 시사
한다. 이 명령은 예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3:11; 요13:14-17,35).
ㅇ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본문은 다음절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와 연결
된 것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근거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는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본질상 사랑이시며 모든 사랑
의 근원으로서 그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먼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셨다
(Westcott, Marshall, Barker).
ㅇ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자마다'에 해당하는 헬라
어 '파스 호'는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해당되는 것
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 혹자는 수신자 공동체 일
원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하나(Bultmann) 보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반
적인 사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한 듯하다(Schnackenburg, Smalley). 한편 이러한 사
랑은 단순히 사랑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행위를 내포한다
(3:18).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 행위를 포함하는 것
으로 이러한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에게서 난 자녀이며 하나님을
아는 자임을 드러낸다(Law). 곧 행위를 동반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자이며 하나님
을 아는 자임을 드러내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님께
서 먼저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ㅇ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에 해
당하는 헬라어 '호 메 아가폰'에는 앞절의 '사랑하는 자마
다'(파스 호 아가폰)에 삽입되어 있는 '파스'가 생략되어
있다. 본절에서 '파스'가 생략된 것은 본절의 사랑이 개인적인 권면을 가리키는 앞 절
과는 달리 일반적인 의미임을 암시한다(Smalley). 한편 '알지'의 헬라어 '에그노'
는 부정 과거로 현재 시상을 사용한 앞절의 '기노스케이'
('알고')와 대조를 이룬다. '기노스케이'가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본절의 '에그노'는 사랑하지 아
니하는 자가 하나님을 전혀 알거나 경험하지 못했음을 암시한다(Marshall). 사랑하는
자가 모두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아는 자는 반드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앞절과의 대조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ㅇ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본문은 7절의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보다
더 발전된 표현이다. 요한은 7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심을 밝힌데 이어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선언한다. 즉 이것은 사랑이 하나님의 모
든 행위들 중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사랑임을 시사한다. 요
한은 본서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행위와 연결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수신자
들 사이에 존재한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적인 가르침, 즉 신령한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신령한 지
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나 사실상 그들의 삶에서는 사랑의
행위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상 사랑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ㅇ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 '우리에게'로 번역된 헬
라어 '엔 헤민'에 대한 해석은 네 가지이다. (1)혹자는 '우리 사이
에'(among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malley, Stott). (2)혹자는 '우리 안에'(in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ooke, Westcott). (3)혹자는 '우리게게'(to us)를 의미
한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4)혹자는 '우리를 위하여'(for us)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ultmann). 이러한 네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Barker). 한
편 '나타난 바 되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파네로데'는
'파네로오'('나타내다')의 부정 과거 수동태이다. 요한은 '파네로
오'를 예수의 사역(1:2; 3:5,8),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나타나심(요21:1,14), 그리고
예수의 강림(2:28)에 사용하고 있다. 본절에서 사용된 부정 과거 '네파네로데'는 명확
한 역사적 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다음에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성육신을 가리킨다(Law, Smalley). 요한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랑을 현시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ㅇ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 '독생자'의 헬라어 '모노게네'
는 히브리어 '야히드'를 번역한 것이다. '야히드'는 70
인역에서 두 가지로 번역된다. (1)'사랑하는'(beloved)을 의미한다. (2)'유일한'(uni-
que)을 의미한다. 본절에서의 '모노게네'도 예수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유일한 아
들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페스탈켄'
은 완료 시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신 사건이 지속적으로
그 효력을 발휘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사랑을 증거하신다.
ㅇ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 본문은 '히나'('위하여')
로 시작하여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을 나타낸다. '살리려 하심이라'
는 인간이 전에 '죽은 상태'임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
고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시고 이루심으로 영적으로 죽은 인간을 생
명으로 인도하셨다(3:14).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 사역 그리고 죽
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ㅇ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
랑하사. - '여기 있으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 에스틴'
은 앞서 기술된 내용, 즉 9절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3:16). 한편 '우리가...사랑한 것'
(에가페카멘)는 부정 과거 시상으로 본문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과 인간에 대
한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는 시상의 변화가 있다. '에가페카멘'은 완료 시상으로 하나
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결코 지속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에가페
센'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적인 특별한 사건에 의해서 나타났음을 시사
하는데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9절). 요한은 이러한
시상의 변화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
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지속적이지 않아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
다(Law, Smalley). 반면에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인간에
게 계시되어 사랑의 궁극적인 기원을 이루셨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은 이러한
궁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다(Hou-
lden).
ㅇ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본문은 앞 절의 '하나님
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와 병
행을 이룬다. 9절에서의 '보내심'(아페스탈켄)은 완료 시상인
반면에 본절의 '보내셨음이니라'(아페스테일렌)는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부정 과거 시상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구현된 특별한 속죄 사역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 '화목제'로 번역된 헬라어 '힐라스몬'
은 본래 '달래는 것'(propitiation)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
는 단순히 성난자를 달래는 차원이 아니라 속죄(expiation)를 전제로 한다(Dodd,
Westcott).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속죄함이 없이는 죄로 인해 형성된
하나님과의 소원한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절의 '힐라스
몬'은 '속죄'(expiation)의 의미와 '화목'(Propitiation)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
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제로 보내심으로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속
죄함을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다(9절, Barker,
Stott).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ㅇ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 '이같이'에 해당하는 헬
라어 '후토스'는 9,10절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현시된
방법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고 대속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한편 '하셨
은즉'의 헬라어 '에이'는 사실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실상의 이유나
근거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문이 이후에 언급되는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의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ㅇ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께서 주신 계명
으로(요13:34,35; 15:12,17)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요한의 이 권면은 당시
사랑의 계명을 평가절하하는 이단적 교리가 수신자들 사이에 팽배해진 것을 염두에 두
고 한 것이다.(Smalley). 한편 '마땅하도다'로 번역된 헬라어 '오페일로멘'
은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임을 시사한다. 물론 사랑은 하나님
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것이 선택 사항은 아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실천 행
위이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ㅇ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 본절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유대적인 사상으로(출33:20,23; 신4:12)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본문에 대해 혹자는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못 삽입된 것이
라고 주장한다(Houlden). 그러나 그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은
수신자들 사이에서 영지주의를 전파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기 때문이다
(Schnackenburg, Barker). 영지주의자들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아서 하나님을 안다
고 주장한다. 요한은 이러한 이단자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대하면서 하나님을 보는
것과 사랑의 계명을 연결시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영적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
리스도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과 같다'라는 예수의 말씀과 동일한 것으로(14
절; 1:1-3; 요1:18; 12:45; 14:9; 17:24).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영적으로 인식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ㅇ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요한은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보았다는 영지주의자들
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비록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을지라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함으로 하나님과 관계
를 맺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 품 속에 독생하신 예수께서 자신의 사랑으
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함
으로 자신들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ㅇ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 '거하시고'의 헬라어 '메네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 간의 지속적인 친근한 관계를 나타낸다(요
15:1-10). 하나님의 내주와 깊은 관계를 나타내는 '메네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
랑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이
하나님의 내주와 지속적인 관계로 인해서 이루어 진다(Stott). 즉 하나님의 내주와 하
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모든 사랑의 행위의 근거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내주하심을 드
러내는 증거이다.
ㅇ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 '그의 사랑'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
아가페 아우투'에 대한 이해는 그 안에 나타난 속격과 관
련하여 세 가지가 가능하다. (1)혹자는 주격적 속격으로 이해하여 우리에 대한 하나님
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Brooke, Wengst). (2)혹자는 목적격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odd, Lewis). (3)혹자는
속성을 나타내는 속격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사랑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다(Stott, Schnackenburg, Law). 이러한 세 가지 해석은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한편, '온전히 이루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테
텔레이오메네'는 완료 시상으로 지속적인 성취를 나타
낸다. 이러한 사랑의 성취에 대한 요한의 주장은 2:5에서 이미 언급되었다. 요한은
2:5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케하는 것이라고 진술하
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고 주
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것임을 암시
한다(Smalley).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사랑을 통해서, 즉 인간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다(Barker, Westcott, Stott).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ㅇ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는 '호티'('왜냐하면')
로 시작하는 절로서 본문 하반절에서 언급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의 근
거가 됨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1-3절; 고전12:3).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한 성령
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과 사랑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즉 상호간
의 내주를 확신할 수 있도록 내적인 증거를 제시한다(3:24). 한편 상호간의 내주를 나
타내는 '거하고'(메노멘)와 '아느니라'
(기노스코멘)는 현재 시상이다. 이 현재 시상은 믿는 자가 경험한 내주의 확신이 지속
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요한이 '기노스코멘'을 사용한 것은 영지주의를 주장하는 이단
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신비한 지식을 깨달은 자신들만이 하나님
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이에 대해 반박하면서 성령을 공유한 모든 그리스도
인들이 하나님과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며 확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리스도
인들은 누구나가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이며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제
함으로써 상호간의 내주를 확신한다.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이러한 교제, 즉 상호간
의 내주(內住)는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을 가리킨다(3:24; 요3:5,6; 갈5:6).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ㅇ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 아들의 칭호인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라'는 예수께서 승귀된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로
서(2:22,23) 사람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셨음을 시사한다. 이 역시 영지주의를 주장
하는 이단자들을 염두에 둔 것인 듯하다. 그들은 구원을 신비한 지식을 소유하는 것으
로 간주하여 죄보다는 무지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육체로 오신 예수께서 구주이시며 그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함으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있다(2,10절; 1:7; 2:2; 5:6,
Schnackenburg). 한편 '보내신'의 헬라어 '아페스탈켄'은
9절과 같이 완료 시상이다. 이는 과거에 아들을 보내신 성육신 사건과 그의 구속 사역
의 효력이 현재까지 지속됨을 시사한다(Stott).
ㅇ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 '우리'가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세 가
지이다. (1)혹자는 예수의 지상 생활을 직접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Stott, Brooke, Schnackenburg, Wengst). (2)혹자는 기본적으로 사도들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설립된 교회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Westcott). (3)혹자는 예
수의 지상 생애를 지켜 본 목격자들과 연합한 교회 전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Barker, Smalley, Dodd).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할지라도 포
괄적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보았고'(테
데아메다)는 완료 시상이며 '증거하노니'(마르튀루멘)는
현재 시상이다. 비록 둘 사이에 시상의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속성을 나타낸
다. 즉 과거에 보고 응답한 믿음과 현재에 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로 연결된 것
으로 연속적이며 지속적인 효과를 시사한다. 성령을 수여받은 사도들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12절) 그리스도의 구
속 사역을 통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구주되신 예수를 알게되며 지속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 깊이를 더해 갈 뿐만 아니라 성령과 더불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
속 사역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15:26).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ㅇ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 '누구든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인 상호간의 내주가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
다. 영지주의자들은 신비한 지식을 소유한 자신들만이 구원을 얻었고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단 하나의 전제 조건, 즉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기만 하면 누구나 예외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선
언한다. 한편 '시인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몰로게세'는
부정 과거이다. 영역 성경에서는 이 과거 시상을 표현하기 어려워 두 가지로 번역하고
있다. (1)미래 시상으로 번역한다(shall confess, KJV). (2)현재 시상으로 번역한다
(acknowledges, NIV, NEB; confess, RSV). 그러나 본문의 '호몰로게세'는 미래 시상이
나 현재 시상이라기 보다는 비록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을지라도 공적으로 고백하는 자
체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봄이 훨씬 더 타당하다(Stott, Smalley).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누구
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상호간의 내주를 경험하게 된
다. 하나님과 인간 상호간의 내주를 가능하게 하는 믿음과 순종의 고백은 오직 하나님
께서 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3절).
ㅇ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 본문은 13절에서 언급
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
백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처럼 상호간의 내주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
사역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을 아버지
로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식하고 확신하게 된다(3:1,2).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ㅇ본절이 속한 단락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본절이 11-15절에 속한
것이 아니라 본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Marshall, Schnackenburg).
(2)혹자는 앞절과 연결되어 11-16절까지 한 단락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Law, Stott,
Barker).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문맥상 13,15절에서 언급된 상호간의 내
주에 대한 진술이 본절에서 보다 발전된 형태로 진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ㅇ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 '하나님이 우리를 사
랑하시는 사랑'으로 번역된 헬라어 '텐 아가펜 헨 에케이 호 데오스 엔 헤민'
은 문자적으로 '우리 안에
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사랑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
랑 뿐만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삶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
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Law, Marshall, Westcott, Smalley). 한편 '알고 믿었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카멘 카이페피스튜카멘'
은 완료 시상이다. 이것은 사도들은 물론 모든 수신자들이 하
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미 과거에 경험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알고 믿고 있음을 시
사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확신할 수 있다. 요한은 이
러한 진술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반박하고 있다. 영지주의자들은 황홀경이
나 특별한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주장하나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한 것에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의지
하는 믿음에 달려있음을 선포하고 있다(9,10,14절).
ㅇ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본문은 8절의 반복이다. 요한은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임을
주장하여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자에게 사랑은 절대적
인 속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ㅇ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 본
문은 13,15절에서 전술된 바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에 대한 보다 발
전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이루어지
며(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할 때 성취된다(15절). 그러한 과정을 통
해서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이루어 가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이
나타나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서 사랑의 삶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드러내는 증거이며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Smalley, Dodd).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ㅇ이로써.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투토'가 가리키는 것에 대
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혹자는 본문 다음에 언급되는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
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Brooke, Schnackenburg). (2)혹자는 16절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Marshall).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 본문은 앞절과 이어지는 단락
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ㅇ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
니. - '사랑'에 대한 견해는 네 가지이다. (1)혹자는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을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Schnackenburg). (2)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가
리킨다고 주장한다(Barker, Stott). (3)혹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고 주장한다(Haas). (4)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
랑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Marshall, Houlden). 이러한 네 가지 견해 중 포괄적
인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한편 '담대함'의 헬라어 '파르레시안'
은 2:5에서 온전히 성취된 사랑과 연결되어 '순종'으로 묘사되었으며
요한복음에서는 담대함이 믿음과 결과로 나타난다(요3:18; 5:24). 이러한 사실은 사랑
이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지속적인 내주를 이
루며, 그 내주로 말미암아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됨을 시사한다. 즉, 믿음과 사랑 그리
고 순종의 생활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지막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이룬다
(Smalley, Westcott).
ㅇ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호티 카도스 에케이노스
에스틴 카이 헤메이스 에스멘 엔 토 코스모 투토). - 이는 문자적
으로 '왜냐하면 그가 어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라는 의
미이다. 여기서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1)예수의 영원한 순
수성, 사랑, 의로우심, 그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한다(Brooke, Westcott,
Haas). (2)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통 속에서 하나
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
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러할 것을 암시한다(Barker, Smalley, Stott).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ㅇ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 해당하
는 헬라어 '포보스'는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의미한다
(행9:31; 롬3:18; 고후5:11; 7:1; 엡5:21). 그러나 본절에서의 '포보스'는 앞절의 담
대함의 반대 개념으로 노예가 갖는 두려움을 가리킨다(요19:38; 20:19; 롬8:15). 이러
한 '포보스'는 사랑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면 앞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지막 날
에 하나님 앞에서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담대해질 수 있다. 비록 죄는 두려움을 유발시
킬지라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사랑을 소유한 자들에게 사랑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ㅇ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 본문은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 없는 이유이다.
'형벌'에 대해서 혹자는 마지막 날과 연결시켜 하나님의 정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
하며(Schnackenburg), 혹자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방해하는 고통을 가리키는 것
으로 해석한다(Bultmann). 이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닌다(Haas,
Marshall). 즉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고 사랑 안에서 생활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
님과의 지속적인 상호간의 내주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게 되며 그 결과 마지
막 날에 죄로 인한 정죄함에서 오는 두려움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갖는 담
대함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사랑은 공존할 수 없는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ㅇ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반의
접속사인 '데'('그러나')가 생략되어 있다. 헬라어 본문의 '데'는 본문이 17
절 상반절의 내용, 즉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하나님의 사랑'을 역으로 진술한 것이
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상호간의 내주로 인하여 사랑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졌다(Westcott, Law). 그러기에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순종의 삶을 살아가
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었다. 이와 반대로 만
약 누구든지 담대함이 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지 못
하였으며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성취하지 못한 자이다.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ㅇ요한은 10절을 반복하여 진술함으로 가장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사랑의 원리에서 출
발하여 20,21절에서 형제 사랑의 문제로 요약하고 있다.
ㅇ우리가 사랑함은.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포멘'은 문
자적으로 '우리가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목적어가 없다. 목적어의 부재로 인해 '사랑'
의 대상인 누구인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1)혹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이라고 주장한다(Stott, Houlden). 이들은 앞절의 진술과 연결시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2)혹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Schnackenburg). 이들은 20,21절에서 형제 사랑에 대해 언급된 것과 연결시켜 해석한
다. (3)혹자는 둘 다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Haas, Marshall). 세 가지 견해 중 마지
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본문은 전후 문맥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어느
하나를 제외할 수 없기 때문이다.
ㅇ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본문은 이유를 나타내는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근거를 나타낸다. '사랑하셨음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가페센'은 부정 과거 시상이다. 이 시상은
전순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역사적인 성육신 사건을 통해 계시된 것을 가리킨다
(9,10절, Law, Smalley).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사랑의 삶은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
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
답이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ㅇ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
'누구든지'의 헬라어 '에안 티스'는 본서에서 거짓 이단자들에 대
해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 방법이다(1:6,8,10; 2:4,9). 본문 역시 수신자 공동체 내에
팽배해 있던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공동체 내에서 신비
한 지식을 통해 구원을 받고 다른 일원보다 우월하다는 환상에 빠져 타인을 돌보지 않
았다. 요한은 그러한 영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반드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하게 됨을 강조한다. 여기서 '형제'는 수
신자 공동체 일원을 가리키는 것은 물론 교회 밖의 일반적인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
(7,11,19절). 즉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은 단순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만을 향한
것이며 그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거짓말하는 자니'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된다(Barker, Smalley). (1)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 자며, 그 진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자이다. (2)
거짓말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임
을 드러낸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자들이다.
ㅇ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
느니라. -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문이 상반절에서 언급된 '거짓말하는 자'의 근거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거짓말쟁이인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다른 형제에 대한 사랑 안에서 표현된다(12절). 즉 그리스도인은 타인에 대한 사랑 안
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타인을 사랑하게 된다.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ㅇ본절의 헬라어 본문은 '카이'('그리고')로 시작하여 본절이 20절과 연결
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ㅇ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
니라. - 요한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사랑'을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연결시키
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
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단 하나의 계명이기 때문
이다(Stott). 이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반영한 것으로(막12:29-31) 요한은 이 계명에 대해 본서에서 '서로 사랑하라'
는 위대한 계명으로 진술하고 있다(3:23; 요이1:5,6). 한편 '주께'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프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부터'라는 의미이다.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예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
다(Williams, Stott, Westcott). (2)혹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Smalley).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지니며 상호보완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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