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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로마서

[스크랩] 로마서 (1 : 1~32)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9
로마서 1장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

ㅇ예수 그리스도의 종. -- 헬라 원어에서 “종”이란 말은 둘로스인데, 바울 당시, 로마 세계에 있어서 종이라고 하면 그 주인에게 일개의 가구(家具)와 같았던 것이다. 예컨대 어떤 역사가(歷史家)의 증거한 바와 같이, 가구 가운데 세 종류가 있었다. 그 하나는 말할 줄 모르는 것(낫이나 호미 같은 것)이요, 또 하나는 반벙어리(개와 같은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하는 노예(奴隸)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 책의 첫 머리에 있어서 자기는 오직 예수님을 절대 복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복종은 은혜로 되는 것이다. 곧,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서운 죽음의 세력에서 그의 피로 바울을 구원하셔서 그의 것으로 삼으신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ㅇ사도. --- 이것은 헬라 원어로 “ 클레로스”라고 한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종들이 이 클레로스의 ,경험을 가졌던 것이다. 예컨데, 아브라함(창 12:1-3), 모세(출 3:10-12), 기타 모든 선지자들(사 6:8-10 ; 행 1:4-5), 모세(출 3:10-12). 바울은 특히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이것을 받았다(해 9:3-5).
ㅇ복음 --- 이 말의 헬라 원어 “ 앙겔리온”은 “좋은 소식”을 의미 한다. 메시야를 보내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성취는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이 약속 성취의 방식은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람의 형상(다윗의 자손)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것이다.
ㅇ택정함을 입었으니.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아포리메노스”니 “갈라 놓음이 되었다”는 뜻이다(레 20:26). 이것은, 그의 나기 전에 사도로 거룩히 구별함이 된 것을 가리킨다(갈 1:15). 이렇게 세움이 된 것은, 자기의 힘이나 혹은 자기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세움이 되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은, ① 교만할 수 없고, ② 하나님의 대리자니 만큼 자행 자지(字行自止)할 수 없고, ③ 오직 보내신 자의 뜻을 성취하려고 노력할 뿐이며, ④ 두려워 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이 보내신 자의 권능을 의뢰할 것이며, ⑤ 조심하여 그가 대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의롭게 살아야 한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ㅇ성경에. -- 이 말은 성경이 일반 문집(一般文集)과 다른 사실을 지적한다. “성”자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음을 알려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ㅇ미리 약속하신 것. --- “약속”하셨다는 말은, 허락하였다는 말과 달라서 인간의 청구가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솔선하여 구원 주시기를 약속하심이다. 이 “약속”은 구약 성도들에게도 하셨던 것인 만큼, 그들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다. 이 약속이, 우리도 위한 것임은 물론이다(15:4). “미리 약속”하셨다는 말씀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게 한다. 곧, ⑴ 하나님의 사랑이 그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 어떻게 큼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현재에 복을 주심 보다 미래에 더 많은 축복을 간직하여 주신다(시 31:19). 복음은, 아무런 예비나 계획한 바 없이 우연적으로 겨(糖)와 같이 날아 왔다가 가라져 버릴 것이 아니고, 오래 전부터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약속해 오신 영원한 진리이다. ⑵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다가 그대로 이루어 주심은 그것이 성취될 때에 우리로 하여금 그 약속자이신 하나님을 더욱 믿게 하려 하심이다(요 13:19).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ㅇ육신. --- 이것은 헬라 원어로 “쌀크스”니 보통으로는 “몸”이란 말 “쏘마”와 달라서 인간의 부패성(腐敗性), 혹은 순전히 이성(몸과 영혼)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 대하여 이 말이 사용될 때에는 부패성을 의미하지 않을 뿐더러(고후 5:21), 도덕적 연약성도 가리지 않고, 오직 자연적 연약성을 띤 인성을 가리킬 뿐이다. 히 4:15 ,16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헤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다.
성자(聖子)께서 육신이 되심은, 우리의 죄짐을 지시기 위하여 대신 욕을 보심이요, 우리와 같이 되심이다(히 2:17). 복음은 그리스도에게 관한 좋은 소식으로 두 가지 요소를 가진 것이니, 곧,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이다. 성경은 그의 중보자격(仲保者格)을 말함에 있어서, 그의 인성을 역설(力說)하였다(딤전 2:5). 그 이유는, 그의 신성이 그의 인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啓示)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격의 주체(主體)는 신성(神性)이다.
ㅇ다윗의 혈통.---- 사도는 여기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한 구약의 예언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구약에는,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시리라고 한 예언이 많다. 그 가운데 두 가지만 들며 이렇다. 곧, 사 53:1-3에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고 하였다. 이 예언과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줄기(왕손)면서도 왕궁에서 나시지 않고 베들레헴의 외양간 한지(마른 땅과 같이 적막한 곳)에 나셧다. 그리고 사 11:1에는,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서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쓰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된 후, 다윗의 왕통이 오랫동안 끊어지고 그루터기로 있었다. 거기서 다시 왕손(王孫) 예수님이 나셨다. 위의 “가지”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네체르”요, “결실”이라는 말은 “이프레”이다. 네체르는 마태 복음에 있는 나사렛을 생각게 하고(마 2:23), 이프레는 베들레헴 곧 에브라다를 생각게 한다(마 2:5-6 ; 미 5:2). 이것은 왕손 예수님의 생장하신 곳이 나사렛(네체르)과 베들레헴(이프레)이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사 4:2 ; 32:2 ; 겔 34:1-24 ; 렘 33:14-26 ; 마 22:42 ; 용 7:42 ; 행 13:22-23 ; 딤후 2:8).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ㅇ성결의 영. --- 이것은 헬라 원어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니, “성령”이란 말 “프뉴마 하기온”과 구별된다. “성결의 영”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학계(學界)의 견해는 여러 가지가 있다. ⑴ 예수님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은 합당치 않다. 그 이유는 이 의미를 취한다면, 이 구절에 말한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영혼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것은 롬 8:11과 맞지 않는가. ⑵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가리킨다는 학설, 이 학설도 합당치 않으니, 그 이유는, 다음에 말한 제 5 학설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⑶ 그저 성령, 곧, “프뉴마 하기온”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학설, 그러나 “프뉴마 하기오쉬네스”란 말은 여기에 한 번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많은 다른 명칭과 같은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⑷ 창조 또는 개조의 능력 있는 신성(神性)을 가진 성령에 대한 칭호라고 하는 학설(H. N . Ridderbos). ⑸ “프뉴마 하기 오쉬ㅣ네스”는, 예수님이 받으시고 그와 함께 계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이 견해가 정당하다(Greijdanus). 그리스도의 부활은 예수님 밖에서 새로 들어오시는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 아니요 이미 그에게 내재(內在)하시는 성령님의 활동 결과였다.
ㅇ죽은 가운데 부활하여. --- 이 말의 헬라 원어는 “죽은 자들의 부활로서”란 의미를 가진다. 이 말씀에 “죽은 자들”이라고 복수(複數)를 사용한 이유에 대해여, ⑴ 어또 학자들은 말하기를 여기 이 말이 나사로의 부활과 같은 부활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하나, 이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⑵ 여기 복수가 쓰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이 모든 신자들의 부활을 성립시키신 부활의 새 시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Nygren, H.N. Ridderbos).
ㅇ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 “하나님의 아들”이란 성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은 삼중 의미(三重意味)의 성호니, 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⑵ 메시야적 하나님의 아들. ⑶ 화육(化肉) 관계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나뉠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고는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啓示)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야가 되실 수 없으며(요 1:18), 아버지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메시야는 화육을 필요로 한다. 화육이 없이 어떻게 계시와 구속(救贖)의 메시야 사역을 행하실 수 있을까? “인정되셨”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호리스텐토스”인데, 그 의미에 대하여 ⑴ 바르트(Barth)는 말하기를 “인정함”은, 역사적 행동이 이니고 원역사적(原歷史的)행동이라고 하였다. 이 견해는 계시(啓示)의 역사적 의미를 거의 무시한데 가까운 위기 신학(危機神學)의 사상이다. 우리는 이와 반대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역사 그것은 계시를 유효하게 파악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능력에게 복속된 그 역사는 그리할 수 있다고 한다(행 16:14). ⑵ “인정되셨으니”란 뜻은, 예수님께서 부활 이전에도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부활이 후에야 인간의 인식에 완전히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도 하고, ⑶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인식에서 인정된신 사실을 말함이 아니고, 부활하신 후 하나님 앞에서 영광(人性을 취하신 후 없었던 영광)을 얻으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는 뜻이라고 한다(행 2:36).

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ㅇ우리가 .--- 여기 사용된 인칭(人稱)이 복수(複數)로 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학설들이 있다. ⑴ 리츠만(Lietzmann)과 바이스(B. Weiss)는, 이것이 저작 권위(著作權威)의 복수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나 옳은 것 같지 않고, ⑵ 산데이(Sanday)는, 이것이 바울의 동역자들, 예컨대 바나바, 혹은 디모데와 같은 이들을 포함시켜 말한 복수라고 한다. 그러나 디모데나 바나바는 엄밀한 의미레서 사도가 아니었으니, 이 학설도 믿을 수 없다. 그러므로 ⑶ 데오도레 즈안(Zajn)의 말한 것과 같이, 이 복수가 모든 다른 사도들까지 의미하였다는 의견이 정당해 보인다(Greijdanus).
ㅇ은혜와 사도의 직분. --- “은혜”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리스”인데 받을 만한 공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움을 받는데 쓰이는 말이다. 멸망 받아 마땅한 죄인이 영생을 받은 것은 큰 은혜이다. 은혜는 사도직(使徒職)의 기초이다. 은혜 받은 일 없이 사도가 되지 못할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다(눅 10:20). 곧, 사도들이, 그 사도직 실행에 나타난 권능을 보고 기뻐함보다 차라리 그들의 구원 받은 일에 대하여 기뻐할 만하다는 뜻이다. 사도직도 귀하지만, 영원히 멸망 받을 죄인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한 것이 더욱 귀하다. 혹설에, 여기 “은혜”는 멸망에서 영생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기본 은총을 말함이 아니고, 사도의 직능적(職能的)은혜를 가리킨다고 한다.
ㅇ그 이름을 위하여.--- “그 이름”(예수님의 이름)은, 예수님에게 대한 계시(啓示)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도의 일을 한다고 함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ㅇ믿어 순종케 하나니. --- “믿어 순종”이란 말은, 신앙과 순종을 별립시켜서 말함이 아니고, 믿음이 곧 순종이라는 의미이다. 불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대한 반역이다. 믿음 곧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요 수고가 되나, 신앙 순종은 모든 무거운 짐을 그리스도에게로 옮겨 놓는 행동이니, 이는 고역이 아니라 도리어 안식(安息)이다.

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ㅇ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 여기 “그리스도의 것”이란 말은, 택하심을 받은 성도를 가리킨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속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계이다(고전 3:23).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자기의 보물, 곧 피 흘려 사신 보물로 사랑하신다. 이것을 아는 신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야 된다. ⑴ 자기를 그리스도의 큰 사랑의 대상인 줄 알아 절망하지 말고 언제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느껴야 됨. 모든 절망자와 자살자들은, 자기들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는 자들이다. ⑵ 자기는 그리스도의 것인 만큼 겸손해야 됨. 고전 4:6-7에 말하기를,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라고 하였다. ⑶ 자기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였다.

7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ㅇ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고로 우리를 불렀고 우리를 부르신고로 성도(聖徒)가 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어 그 백성을 세상에서 불러내심이다. 우리가 성도된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에만 있다. 인간은, 구원 소망을 자기 자신의 의(義)에 근거하여 생각할 수 없다. 인간에게는 의가 전연 없다(3:10). 만일 누가 자기의 의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기대하며 지낸다면, 그것은 불붙는 집에 앉아서 잘 살기를 꿈꾸는 것과 어리석음이다. 인간의 구원은, 그 자신 밖에서 오는 것이니, 곧 하나님에게서이다.
ㅇ우리 아버지, --- 구약에도 하나님의 부격(父格)에 대한 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신약의 그것과 다르다. 구약의 것은 이스라엘의 국부(國父)라는 뜻으로 씌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양자(養子)로 받아들인 고로 하나님을 우리 신자들의 아버지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에게 대하여 “아바 아버지”(8:15)가 되셨다.
ㅇ은혜와 평강. --- 이것은, 사도가 교회를 축도하는 특별한 복이니, 헬라식 축도(행 23:26)와 히브리식 축도(삿 6:23 ; 삼상 25:6 ; 욱 10:5)를 겸한 것이다. 사도의 축복은 옛날 이스라엘의 족장의 그것과 같이 권세 있는 것이다(창 27:1-42) ; 마 10:12-13). 은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호의(好意)를 가지시ㅣ고 사랑을 베푸심이다. 하나님의 호의를 얻음은, 온 인류에게 호의를 얻음보다 귀하고 요긴하다. 온 인류가 다 반대해도 하나님만이 “나”를 지지하신다면, 그것이 오히려 기쁜 일이다.

8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ㅇ첫째는. --- 헬라 원어로 “프로톤 멘”이다. 이 어투는, 논리적으로 “둘째는”이란 말이 아래 있을 것이라고 예상케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없다. 이 말에 대하여 해석이 세 가지가 있다. ⑴ 바울이 감사에 넘침으로 인하여 “둘째로”란 말을 잊었다고 함(B. Weis). ⑵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이 논리적 어투는 차리지 않았으나 문맥은 그대로 나타내었다고 함(Yodet). 곧, 첫째는 감사요, 둘째는 다음절부터 나온 기도라고 하였다. ⑶ “첫째로”란 말은 그저 “무엇보다도 먼저는”이란 의미니, 그 아래 “둘째는”이란 말이 나오리라고 개대할 필요가 없다고 함(Theodore Zahn). 바울은, 그의 저서 살전 5:18에 말하기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 같이, 언제나 어쨌든지 먼저 감사의 조건을 찾았다. 감사 제일주의가 있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잇다. 바울의 감사 제일주의는 그의 서신마다 나타났다(고전 1:4 ; 고후 1:3 ; 엡 1:3 ; 빌 1:3 ; 골 1:3 ; 살전 1:2 ; 살후 1:3 ; 딤후 1:3 ; 몬 4).
ㅇ그리스도로 말미암아.....감사함. ----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은, 그 무슨 일이든지 그리스도의 중보역(仲保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감사하는 일도 그리스도를 힘입어서만 가능하거든, 하물며 다른 일들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무엇이랴. 그리스도를 힘입은 길은 그리스도 신앙이다. 이것이 있는 때엔 죄인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지만 이것이 없는 때엔 소위 의인(義人)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ㅇ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 바이스(B. Weiss)는, 이 문구가 다만 그들이 믿어 그리스도인 된 사실에만 국한된 것이고, 그들의 무슨특별한 선행을 가리킨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와 반면에 고데(F. Godet)는, 이것이 그들의 모범적 덕행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너희 믿음”이란 말이 그들의 믿음 생활(믿음과 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감사 제목으로서 그들의 신앙 생활 전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그 때 로마는 큰 도시였고 교통의 중심지였으니 만큼, 교회의 일이 각처에 퍼졌을 듯하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세계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로마에 있는 교회의 소문을듣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당시 신자들에게 그 소문이 들린 일을 매우 귀중히 여겨서 그렇게 평가한 쵸현이다. 곧, 여기 저기서 참 신자들이 그들을 알아주어도, 그것은 온 세상이 알아주는 것과 같은 큰 영예(榮譽)라는 것이다(Calvin).

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ㅇ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 바울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복음을 전하는 그것이었다. 이르 보면, 그가 복음 전파를 자기의 출세나 생계나 취미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소명감(召命感)에 끌려 행하여지는 것이었다. 그의 모든 전도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을 위하는 의식이 그 지배 의식이었다. 여기 “심령”이란 말은 렐라 원어로 “프뉴마”이니, 곧 영을 의미한다. 그러면 내 영(靈)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함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인격의 중심으로 하나님께 봉사함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신력과 체력(體力)의 전부를 다하여 봉사함을 가리킨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말하기를, “이 봉사는, 마음을 드리지 않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다하여 하는 것이다. 곧, 진실하게 온 인격을 기울여 하는 봉사이다”라고 하였다.

10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ㅇ하나님의 뜻 안에서. --- 이 말에 대하여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곧, 바울이 로마에 가고자 하되 남이 세운 교회에 간섭하는 잘못이 되지 않는 한, 거기 가기를 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종교 윤리적인 하나님 뜻을 가리키는 헬라 원어는, 여기 본문처럼 “엔 토 델레마티 투 데우”가 아니고 “카타 토 델레마 투 데우”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하나미의 뜻”이란 것은 섭리적 의지(攝理的意志)를 말함이다. 그가 로마에 가려고 해도 교통 사정으로 길이 막혀서 갈 수 없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는 그 사정이 섭리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ㅇ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 여기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는 말은 헬라 원어로 “유오도데소마이”인데 보통으로 성황(盛況), 혹은 이득(利得)을 의미한다(고전 2:16). 바울의 이 기도는 성취되어, 후에 그가 로마에 가게 되었다.(행 27:1-28:29). 그러나 그로 하여금 거기 가게 한 길은, 얼른 보면 좋은 길이 아니고 이상하게도 소송건에 끌려 가게 됨이었다. 그 길은 대단히 위태하여 그가 여러번 파선 당해 죽을 뻔한 것이다(행 26:32-27:44). 곧 그의 로마행은 육신적으로 괴로운 길이었다. 이것이, 이익을 얻는 길에 대한 바울의 기도 응답이었다. 경건 신자에게 있어서 이익을 얻는 길은 반드시 평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육신상으로 불행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충성하다가 혹시 고생길에 설 때에도 낙심치 말고 도리어 그것이 유익 있는 오묘한 길인줄 믿고 기뻐할 것이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ㅇ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주어. --- 여기 “무슨”이란 말은 헬라 원어로 “티”니, 그것은 아직 받지 않은(그러나 장차 받을) 어떤 신령한 은혜를 염두에 둔 말이다. 바울은 로마에 가는 도상에 오를 때에 반드시 로마의 신자들에게 풍성한 영적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고, 그는 말하였다(15:29). 주의 종이 주님의 기키시는 일에만 순종하며, 언제나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영력(靈力)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란 것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것인데 그것이 물질적 혹은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눠주어”란 말은 헬라 원어로 “메타도”니, 은혜를 나눠 주는 자 자신도 남들과 함께 그 은혜에 참여함을 가리킨다(Theodore Zahn). 만일 주님의 종을 통하여 교회 중에 하나님의 교훈이 임한다면, 주님의 종 자신도 그 교훈의 심판 아래 서야 된다.
ㅇ너희를 견고케 함. --- 이 말의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너희로 견고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바울이 자기 힘으로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할 수 있다 함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굳게 될 것이라고 한다. 신앙을 장성케 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시니(고전 3:5-7), 여기서도 바울은 자기의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하실 일을 구분한다.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ㅇ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 -- 이것은 신앙상 위안을 말함이다. 우리의 시앙은 세상에 부딧쳐 끊임 없이 피곤해진다. 그러므로 이런 안위는, 우리에게 매일 음식과 같이 계속 공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안위는, 염세주의(厭世主義)에서 찾아 만나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주 안에서 성도들의 교통에서 얻을 수 있다. 내 신앙이 피곤해졌을 때에 남의 열심 있는 신앙을 보아서 용기를 얻게 되며, 또 본래 튼튼한 신앙도 다른 사람의 모본을 보고 더욱 힘을 얻는다.

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ㅇ열매를 맺게 하려 함. --- 요 15:16 참조,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세상에 두시는 목적은, 그들이 영적(靈的)으로 결실하게 되기 위함이다. 그들의 처음이 좋지 못했어도 나중에는 좋을 수도 있다. 신약의 사울은, 처음에 비록 패역했으나 한 번 회개한 후에는 주님을 충성되이 섬겼다. 마가도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가다가 낙심하고 돌아섰으므로 바울에게 불신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후에 회개하고 귀한 종이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자기에게 유익한 종으로 여겨 모든 교회에 추천하였다(골 4:10). 이와 반대로, 어떤 신자들의 처음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 나중이 좋지 못한 것은, 그들의 실패를 의미한다(겔 18:21-24). 구약의 사울은, 처음엔 하나님의 총애를 받았으나 후에 패역한 길로 갔으므로 그 말년에ㅔ는 저주를 받았다. “열매”는 주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신자 자신의 성결의 열매요, 둘째는 다른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전도의 열매이다. 요 15:1-6 ; 눅 13:6-9 ; 막 11:11-14, 20-21 참조.
ㅇ길이 막혔도다. --- 하나님깨서는, 그 사랑하시는 신자들의 길을 언제나 열어 주시지 않고 때로는 막으신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 하심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그의 오묘한 섭리이다.

14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ㅇ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 복음은 야만이에게도 가야 하며, 문명인에게도 전파되어야 한다. 문명(文明)이란 무엇인가? 지혜와 지식은 무엇인가? 혹은 과학이란 것이, 만물의 성질은 알 수 있으나 그것의 근원을 알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과학 연구로써 만물의 용법은 알 수 있으나, 그 만물이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존재하며 어디로 가는 바를 알 수는 없다(고전 1:20). 이 세상의 지식층은 무식(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리 앞에서는 소경이니, 진리 곧 복음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지식 있는 사람들 앞에 역시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에 빚진 자의 명심할 것이 두 가지니, ⑴ 이 빚을 갚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것(고전 9:16), ⑵ 복음 전한다는 자세를 하지 말 것이다(고전 9:18-23).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ㅇ할 수 있는대로.... 원하노라. --- 이 구절은 헬라 원어로 “토 캇 에메 프로뒤몬”이니, 그것을 개역하면, “내게 달린 것은 뜨거운 소원이니”이다. 곧, 자기로서는 뜨겁게 원하나,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기다려 한 후에야 그 소원대로 행동하리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어떤 선한 사업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를 기다려 행하지 않고 조급하게 행함은, 도리어 무익할 수 있다.
ㅇ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이것은 이미 믿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말씀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벌써 믿는 자들에게 복음의 지식을 가르쳐 줌도 일종의 전도이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ㅇ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 “부끄러움”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곧 사람이 자기의 소유가 무가치하여 부끄러워함과 자기의 성질이 겁약하여 부끄러워함이다(딤후 1:8, 12-18 ; 히 2:11 ; 고후 10:8 ; 빌 1:20 ; 눅 16:3 ; 요일 2:28). 그러나 바울은 ⑴ 자기의 소유한 복음 전파의 사명을 무쌍한 영관으로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런 귀중한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⑵ 그 뿐 아니라, 그는 복음 운동과 및 자기를 위하여 염려할(염려는 겁에 이르고 겁은 구끄어움에 이름)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가 본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울이었으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안에 사시는 이가 그리스도였다. 그에게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 되는 줄로 느껴졌다(빌 1:21).
ㅇ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 순서는 민족 차별(民族差別)의 순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르 가리킬 뿐이다(3:1-2.9 ; 1-13, 11:1-6, 15:9 ; 마 15:24 ; 요 4:22 ; 행 1:8 , 13:46 참조). 구원의 복음이 왜 이스라엘 사람을 먼저 찾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곧, 복음이 이스라엘을 먼저 찾은 것은, 이스라엘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꼭 같이 이방인들도 위한 것이다. 곧, 그것이 이스라엘 자신에게 구원을 베푸는 행동인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을 전하는 제사장(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제사장이 됨) 세누는 행사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사역을 통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 하셨다(창 12:3 ; 출 19:5-6). 그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나중 된 자로 먼저 되게 하시고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게 할 수 있는 전능자시오 또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마 19:30).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ㅇ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인가? 이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로 제공되셨음을 말함이다(고전 1:30). 사람이 하나님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 의견을 대표적으로 든다면, 세 가지로를 말할 수 있다. ⑴ 펠라기안 학파의 의견, 이 학파에서는 말하기를, 사람은 유대인의 의식적 율법을 순종함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다만 도덕적 율법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⑵ 로마교의 의견, 여기서는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견은 성경적이 아니라. ⑶ 푸로테스탄트 교회의 의견. 여기서는 성경이 말하는데로 바로 주장하였다. 곧, 우리는 우리로 말미암아 행하여진 무엇으로 의를 얻는 것잉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행하여진 다른 이(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 의는 본래 우리의 것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여 주는 것 뿐이다. 이 의는 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 의로 말미암아 신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 그 의는 완전한 것이다.
“나타나서”란 뜻은 무엇인가? 이 말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된다. ⑴ 하나님의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었다는 뜻(갈 4:4).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는 신자들에게는 바로 종말ㄹ을 현재화(現在化)시켯다는 의미도 되어진다. 이 의를 받는 자는, 세상 끝날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벌써 심판을 받았다. 인자(人子)가 땅 위에서 사죄(赦罪)하는 권세가 있다고 한 대로(마 9:6), 신자들은 벌써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칭의(稱義)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 사죄와 칭의를 못받은 자는 내세(세상 끝날 심판 때)에도 그것을 받지 못한다(요 3:18). ⑵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난다는 말은 그것이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감취엇던 것이라는 뜻을 내포함(엡 3:11),이 감취었던 것이 나타난 것을 보는 신약 시대의 사람들은 감사히 그것을 받아야 된다. 엡 3:5 참조. ⑶ “나타나서”란 말이 현재사로 되었으니, 그것은, 사람이 복음을 믿는 그 현재에 하나님의 의ㅣ와 접촉되고 또 받아지는 상칙(常則)을 말함이다. 이와 달리 3:21에는 “나타났으니”라는 현재 완료 동사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그리스도 사건의 역사적 실현(歷史的實現)의 완료를 보여 준다.
ㅇ믿음으로 믿음에. --- 칼빈은 말하기를 이것은 불완전한 믿음으로부터 완전한 믿음에 이르는 신앙적 장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해석은 옳지 않다. 하찌(Hodge)는, 이것이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ㅇ하나님의 진노. --- 시 7:11-12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심문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욱안으로써 하나님의 심판 행위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깨달을 수 없다. 그 이유는 ⑴ 그 진노의 나타날 때가 인간의 범죄한 즉석이 아니기 때문이며, ⑵ 그 진노의 방식이 초자연적(超自然的) 간섭보다 자연 법칙을 통하는 간접적인 것이 많기 때문이며(창 3:18-19, 4:12), ⑶ 그 분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가리우심이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지 못하고 다만 그 진노 아래서 그들의 심령이 늘 불안한 중에 있다.
ㅇ불의로 진리를 막는. --- 이것은, ⑴ 불의 곧 부도덕한 일들을 행하노라고 진리(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눌러 둔다는 의미라고 함. ⑵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소유한다는 의미라고 함(이런 경우에는, “막는”다는 말 “카테콘톤”을 소유한다는 뜻으로 해석 함). 이것은 종교적 의식을 말함이다. ⑶ 불의하게 진리를 막는다는 의미라고 함. 곧,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진리를 믿지 아니함이 부당하다는 뜻이다. 이 아래 문맥으로 보아서 이 해석이 적합해 보인다. 위의 세 가지 해석이, 모두 다 하나님을 알고도 신종(信從)치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ㅇ경건치 않음과 불의 ---- “경건치 않음”은 하나님에게 대하여 바르지 못한 태도(21-25)이고, “불의”는 인간에게 대해 바르지 못한 태도이다(26-32). 후자(後者)는 전자(前者)의 결과이다. 먼저 하나님을 바로 공경한 뒤에 사람에게도 덕을 세울 수 있다.
ㅇ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이 어귀에 대한 해석으로, ⑴ 하늘이란 말은 자연의 하늘로 간취되고 거기서 나타난 진노는 천연계(天然界)의 재앙(예컨대, 지진, 흉년)이라는 것으로 해석이 있고, ⑵ 하늘을 하나님의 성결성(聖潔性)을 표상(表象)하는 으로 보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진노는 인간의 죄ㅣ에 대한 그 성결성의 반항을 의미한다고 한다. ⑶ 칼빈은, 여기, “하늘”이란 것에서 그것의 광대 무비성(廣大無比性)을 취하여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편만성(遍滿性), 곧 인류 중 한 사람도 이 진노 아래 있지 않는 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ㅇ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란 말은 “알려진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이 저희 속에 보인다함은, 곧 양심에 느껴져야 할 자연계의 놀라움을 가리킨다. 칼빈은 자연계가 하나님을 보게 하는 거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너무 죄가 많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자연계를 앞에 놓고도 성령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는, 특수 계시(特殊啓示) 곧, 성경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ㅇ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 --- 출 33:20 ; 요 1:18 ; 딤전 1:16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본질을 말함이다. 이 보이지 않는 분이 만물을 창조하셨다. 히 11:3에 말하기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 것이 아니니라”고 한다. 신앙은, 나타나지 않는 참된 신(神)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육적 시각(視覺)을 만족시키지 않으심이 오히려 정당하다.
ㅇ능력. ---- 능력은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능(能)을, 그 유지(維持)의 능, 그 심판의 능을 기리킨 것으로서 우리로서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ㅇ신성. ---- 이는 하나님 자신 곧 그의 본질인데, 우리는 만물을 보아서 그것을 안다. 곧, 만물은 법리(法理)의 지배를 받아 성립되어 있다. 누가 만물을 무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랴? 무법하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두고 보면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계의 이법성(理法性)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우연시(偶然視)하며, 기계시(機械視ㅖ하는 극단의 회의주의자도 자기 자신의 이법성을 회의(懷疑)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법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인겨(人格)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이 이법의 주재자 곧, 인격적신(人格的神)이 계심을 누가 부인하랴? 그 이유는 어떤 이법이든지 그것이 실시되려면, 그것의 실시자가 있어야만 되는 까닭이다. 인간은, 법죄하여 암매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하는 천연 계시(天然啓示)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은 특수 계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모른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ㅇ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 인생은, 하나님을 아는 혹종의 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의식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로 알고 찾는 자는 드물다. 그들은 참 하나님 아닌 자 곧 피조물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섬기니,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요 영화롭게 함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귀머거리 소경된 어린 아이가 그의 친아버지를 바로 알지 못하고 어떤 악한(惡漢)을 가리켜 자기 아버지라고 할 때에 그 아버지에게 무쌍한 욕이 됨과 같다.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ㅇ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 안건우ㅏ 자삭운 뮤헌헌 것이 아니다. 그것은 피조물계를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지식은 피조물의 하나로 피조물 권내(被造物圈內)에 있어서 그 권외에 나가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그 지식은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다. 그러므로 그것이 스스로 참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것이 스스로 종교적 지혜를 낸다면, 거짓 종교, 곧 자율주의(自律主義)의 종교를 제조할 뿐이다.
ㅇ우준하게. --- 누가 진실되이 셋을 가리켜 다섯이라고 주장하고, 일곱을 가리켜 아홉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다. LLRM와 같이 피조물(被造物)을 가리켜 창조자요, 심판자요, 또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자는 무한히 어리석은 자이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ㅇ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 이 말씀은 시 106:20의 말씀과 흡사하니, 곧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라고 함이다. 이 말씀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거짓된 종교를 만들어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껏을 것으로 하나님의 썩지 않는 것을 대치하고, 피조물의 형상으로 창조자를 대치한다. 슐라테르(A. Schlatter)는 말하기를, “저희의 종교 행위는 진리를 거스리는 전앵 행위요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전투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제 위에 소개된 두 가지 정반대의 대조를 자세히 생각해 보자.
⑴ 썩지 아니하는 영광과 썩어질 것.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않으시는 영광이다. 영광이란 말은 구약에 모두 280번이나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啓示)와 구원 능력의 나타남을 가리킨다(출 16:9-12, 24:15-18, 29:43, 40:34-35 ; 레 9:6, 23 ; 민 14:10, 16:19-20 ; 시 72:19, 96:3, 102:15-16, 138:4-5). 하나님의 영광은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깨닫게 하시는 영적 지각으로야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상은 거짓 것이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육안(肉眼)으로 보고저 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 취급(偶像取扱)하려는 죄악이다.
⑵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창조자 하나님을 인간 편에서 자기 형상대로 만드는 악해,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신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 이제 인간이 자기 형상(피조물의 형상)으로 신(神)을 만드니, 이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을 섬기는 자 되게 하려는 망동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되는 인간의 뜻으로 하나님을 취급하는 망동이다. 우상 숭배자들은 성결과 도덕을 지키지 않고 신을 불러서 복리(福利)를 얻으려고 한다. 그것은 진정한 경견이 아니다. 진정한 경건은 윤리적 종교 행위이다. 약 1:27에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ㅇ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인하여 노를 발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노(怒)는 인간의 악행을 그대로 버려 두심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고로, 내버림이 되어 모든 부도덕한 일을 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크로 솨이데”(F,W. Grosheide)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죄악이 죄악을 낳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리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 없는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이다. 그것이 이교(異敎)의 가져오는 표본이니, 곧 우상주의가 무서운 죄악들을 동반함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은 자연 심판으로 시작된다”라고 하였다. 종교를 바로 가지지 못한 것이 모든 죄악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때부터 이렇게 인간은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리델보스(Ridderbos)는 말하기를, “죄악은 세력인데, 그 세력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보호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하나니미에게 버림 받은 자들은 음행으로 떨어진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도 재설된다. 몸은 하나님의 전(殿)인데(고전 6:19), 하나님이 계신 동안은 그 몸이 깨끗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떠나시는 그때부터는 불결해질 수밖에 없다.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ㅇ이 귀절은 하나님의 진리와 우상의 거짓을 대조시킨다.
⑴ “하나님의 진리”란 것은 하나님 자신의 진실성을 가리킨다. 곧, 하나님은 참(眞)이란 뜻이다. 크레다너스(Greijdanus)도 이렇게 생가하였다. 하나님은 자기의 여러 가지 성질을 계시하시는 중에도 특별히 그의 진실성을 힘있게 계시하셨다. 민 23:19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진실성 때문에 모든 영적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많이 말한다. ① 우리를 부르신 것이 그의 신실하신 성품으로 인한 것임, 고전 1:9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라고 하였다. ② 신자 성화(聖化)의 확실성이 하나님의 진실성에 근거 한다고 하였음. ③ 우리의 믿음이 그의 신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임.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줄 앎이라”고 하였다(히 11:11). ④ 하나님의 진실은 약한 신자들에게 위로가 됨.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하였다(딤후 2:13). ⑤ 하나님은 그의 진실성 때문에 신자들을 무모한 시험에 인도하시지 않으심.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간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고 하였다. ⑥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죄를 고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다(요일 1:9).
⑵ “우상은 거짓”것임. 우상을 거짓 것이라고 할 이유는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感覺主義)에 의하여 영혼의 요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까닭이다. 우상 숭배는 감각주의를 만족시킬 예배 대상(禮拜對象)을 찾는다. 감각주의는, 영혼의 요구와는 정반대되는 것을 즐기나니, 곧 유한한 물질 세계에서 살 수 없다. 영혼을 물질로 만족시키ㅣ려는 종교는 모순된 것이다.

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ㅇ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데(고전 6:19).,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떠나시고 죄는 그 몸에서부터 세력을 얻게 되어 먼저 음행이 나타난다(고전 6:18).
성경은, 성적 죄악(性的罪惡)이 몸에게 대한 것이라고 한다. 곧,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하였다(고전 6:18). 이 말씀의 의미는 그 성적 죄악이 주님의 성전 된 몸의 거룩을 범한다는 것이다. 다른 죄악은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특히 그 손해 중에 종교적인 것이 더욱 크다. 이 죄악은 도덕 방면에 속한다고 할 것이나 역시 종교적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5-17)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음행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범성죄(犯聖罪)이며, 주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켜서도 “음란한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시 50:18 ; 렘 3:8 , 5:7, 7:9, 9:2, 13:27, 23:14, 29:23 ; 겔 23:43 ; 호 7:4 ; 말 3:5). 이렇게 성적 죄악은 이중 죄악이다. 곧 도덕상으로 인륜을 어지럽게 하는 죄악이고 종교상으로도 하나님 앞에 범성(犯聖) 훼절(毁節)하는 죄악이다.
안셈(Anselm)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우므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하므로야 이긴다”고 하였다. 곤전 6:18 ; 딤후 2:22 참조.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이러하였다(창 39:1-18). 위에 인용한 안셈(Anselm)의 말은 물론“음행을 피하라”는 성경의 말씀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들 가운데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선적 죄악이 거기 속한다. 성적 죄악은, 외모의 미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넘기는 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족사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독과 같다. 독사의 살인독을 현미경으로 검사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또 그것은, 마치 알프스산의 아름다운 잔디 언덕과도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그런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믿고 발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은 일이 많다고 한다. 성경은 이 죄에 끌려 가는 것이 마치 “소가 포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고 하였다(잠 7:27).

27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ㅇ죄는, 인간에게 대하여 병균과 같이 신속한 번식성을 가지고 인간을 아주 점령해 버리고 또 살해한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21-13)는, 번식하여 무서운 죄의 수렁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29-32에서 볼 수 있다.
ㅇ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실용적 지식으로 가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ㅇ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그들의 잘못된 나음 그대로 내버려둠을 의미한다.
ㅇ합당치 못한 일. --- 곧, 인간의 본분과 책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요점일 뿐 아니라, 그것에 있어서 전 가치(全價値)를 의미하는 것이다(전 12:13). 여기 기록된 죄악의 목록을 분류하면 다섯 가지니 ⑴ 불의, 추악, 탐욕, 악의는, 사람이 자기에게 대한 취급을 잘못하는 범죄요, ⑵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은, 사람이 남들과 경쟁하는 관계로 생기는 범죄요, ⑶ 수근수근하는 것과 비방은, 사람이 남을 언론(言論)으로 해하는 범죄요, ⑷ 하나님을 미워함과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은,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범죄요, ⑸ 부모를 거역함과 우매, 배약, 무정, 부자비는, 의리(義理)를 반역하는 범죄이다.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ㅇ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 “불의”는 헬라어로 “아디키아”니 그 아랫말에 기록된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개괄적으로 지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명사는 하난의 죄명(罪名)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법적으로 취하는 이기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진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겠지만, 실상은, 그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고 도링어 해롭게 한다. 잠 21:7에 말하기를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고 하였고, 잠 10:2엔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하엿다. “추악은 ”포네리아“인데, 도덕적 부패의 해독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부적 패역성을 의미하는 ”악의“란 말과 달라서 악한 결과와 해독을 가리킨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포르네이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정당한 결혼 생활 아닌 모든 불결한 남녀 교제를 말한이다. 어떤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 말이 없으므로 마이어(Meyer)는 이 말을 제외하였다. ”탐욕“이란 말은 ”플레온“이란 말(더한다는 뜻)과 ”에코“란 말(취한다는 뜻)과의 합성어(合成語)인데, 더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탐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물욕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첨국에 착심할 수 없게 하므로(시 119:36), 우상 숭배와 같은 죄이다(골 3:5). 탐심을 품는 자는 성공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다. 잠 10:2에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고 하였고, 또 잠 21:6엔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불려 다니는 안개니라“하엿고, 잠 20:21엔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하느니라“하였고, 잠 23:5에는,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다. ”악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키아“인데, 이것은 마음이 구부러진 패역성을 가리키는 바, 선한 권면이나 교훈에 대하여도 까닭 없이 반역하며, 남의 자선 행위까지도 방해하는(자기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잔인성 같은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선(善)에 대한 까닭 없는 반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반역은 실로 극악한 심사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자는 더욱 현저하게 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런 악한 마음은 무식, 혹은 연약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 살인, 분쟁, 사가, 악독이 가득한 자요. --- “시기”는 헬라 원어로 “프도노스”인데, 남의 잘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통감(痛感)을 가지고 해할 수만 있으면 해하려는 악한 마음이다. 잠 14:30에 말하기를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하였고, 잠 27:4에는 “투기 앞에서 누가 서리요”라고 하였다. 클락(Clarke)은, 이 잠언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했다. 곧,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탐심 있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누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엇이든지 내게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하는 자에게 그 청구한 것을 주고, 다음에 청구하는 자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 때에 그 탐심 있는 자는 많이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있는 자는 그 탐심 있는 자의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역시 잠잠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내 눈을 하나 뽑아 주시요”라고 하였다. “시기”는 이와 같이 남과 나를 해하는 악독한 마음이니,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것이다. 사기를 없애는 방법은, 상대편을 시기하는 대신에 그를 모본 또는 사표(師表)로 알고 그를 기뻐함이다. 그 이유는 ⑴ 나보다 우수한 자는 나의 선생이니 그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쁘지 않으랴.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이다. ⑵ 이 세상에는 할 일이 어무도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자신보다 우수한 선생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친 사실이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시기로 말미암아 마침내 억울하게 파면을 당했으며, 사막에 망명하여 거기서 종신하였고, 사무엘 루더포드(Samule Rutherford)도 교권자 사이드센프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잡혀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살인”은 헬라 원어로 “포노스”인데 아주 무서운 범죄이므로, 그것에 대하여는 모든 자연까지 노할 정도이다(창 4:10,23,24). 살인이 그렇게 극악시(極惡視)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범하기 때문이다(창 9:6). 요일 3:15에 의하면, 남을 미워함이 벌써 살인이라고 하였다. 증오는 살인과 같은고로, 증오가 있는 곳에는 생(生)의 의의(意義)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잠 15:17에 말하기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분쟁”은 헬라 원어로 “에리도스”인데 이것은, 단체 생활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잠 17:1에 말하기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신에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미연에 방지함이 지혜롭다. 그 이유는, 그것은 확대될 위험성이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 25:8에는 말하기를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고 하였고, 잠 17:14에는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고 하였고, 잠 18:19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툼이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⑴ 서로 시비를 지혜 없이 말하다가 일어남. ⑵ 범죄를 좋아하는 자들 측에서 일어남.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라고 하였다(잠 17:19). ⑶ 과격한 말로 인하여 일어남.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다(잠 15:1). ⑷ 미련함으로 인하여 일어남.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하였다(잠 20:3). ⑸ 교만함으로 인하여 일어남.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고 하였다(잠 22:10). ⑹ 말장이로 인하여 일어남.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고 하였다(잠 26:20). ⑺ 탐심으로 인하여 일어남.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라고 하였다(잠 28:25).
“사기”란 말은 헬라 원어로 “돌로스”인데, 거짓은 모든 죄악의 인도자요, 또 엄호자(掩護者)의 역할을 한다. 마귀가 아담 하와를 죄로 인도할 적에도 “거짓”을 사용했다(창 3:1-7). 죄는 거짓을 쓰고야 활동할 수 있다. 누가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악이라고 광고하면서 행하는 자 있으랴? 언필칭 선을 행하노라고 하면서 악을 행한다(잠 12:20). “사기”는,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 박고 있어서 많이 속인다. 그것은 우리ㅣ로 하여금 남을 속여 가면서 죄를 범하게 하고, 또 자신을 속여 자멸의 길을 밟게 한다. 그러므로 렘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거짓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제 마음을 잘 지켜서 남을 속이지 말고 또 자기 스스로도 속지 말아야 한다. 남을 속이는 그것도 벌써 자기를 속임이니, 그 이유는 남을 속여 유익을 도모함은 결국 자기를 해함이 되기 때문이다.
“악독”은 헬라 원어로 “카코에데이아”인데 그 뜻은 “간악”을 가리킨다. 퀴일(Kuhl)은 해석하기를, 이는 간책(奸策)과 궤계를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구밀복검식(口密腹劒式)으로 외모로는 최선을 다하여 남을 도와주는체 하지만, 이면과 실제에 있어서는 남을 해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노골적으로 직접 남을 해하는 자 이상의 중벌을 받을 것이다.
ㅇ수근수근하는 자. ---- 이런 자들은 공중이 모르게 은밀히 남을 훼방하는 자니, 이는 독사보다 악독한 자이다. 독사는 접근하는 사람만을 물어서 해할 수 있지만, 이런 사람(수근수근하는 자)은 몇 만리밖에 있는 자들을 해할 수 있다.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ㅇ비방하는 자. --- 이것은 공적으로 남을 악평하는 자이다. 레 19:16에 말하기를,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였으니, 남을 말로 매장함은 잔인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벌을 받나니 그것은 그 자신이 역시 악평을 받음이다. 예수님은 말쓰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다(마 7:1).
ㅇ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 --- 이 죄들은, 사람이 자기를 과중시(過重視)하여 남들을 무시함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는 헬라 원어로 “데오스튀게이스”인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능욕하는 자”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교만한 자.”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훼페레파노스”인데 “높이 나타나는 자”란 뜻이다. 실제적 내용은 없이 높은 사람인체 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자도 있고, 혹은 실제적 내용이 있고서 그리하는 자도 있다. 실 내용이 없이 그리하는 자는 외식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잠 16:18에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하였다. 개인이나 단체나 교만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는 법이다. 잠 19:29에 말하기를,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고 하였으니, 오만한 자(거만한 자)의 죄가 어떻게 큰 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니, 예수님으로 자랑하는 자와 반대되는 자이다. 진실로 주 예수로 자랑하는 자는 전적으로 자기를 분토와 같이 천히 보아야 할 것이다(빌 3:7-9). 그 이유는, 자기를 의뢰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에 대한 적성 요소(敵性要素)이기 때문이다.
ㅇ악을 도모하는 자. ---- 이것은, “악한 일을 지어내는 자”를 말함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한 사람난이 악을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악행의 길을 개척하여 주는 셈이다. 이 얼마나 악한가? 수리아의 안디오코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괴롭게 한 자니, 그는 “모든 악을 도모하는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ㅇ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 이 죄목들은 애정과 의리(義理)를 배반하는 종류에 속한다. 애정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을 배반하는 자야말로 극도로 악한 자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큰 죄인이다. 구약 시대ㅐ에는, 불효자는 재판을 받게 하고 돌로 쳐 죽이도록 한 것이다(신 21:18-21). 신약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불효가 여전히 큰 죄악인 것은 틀림 없다(딤전 5:8). “우매한 자.”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사랑이나 등휼에 대하여 지가(知覺)이 없고 그것을 감사하지도 않으며 기억지도 않음을 말함이다(사 1:2-3). 도탄 중에 빠진 자가 남의 동정을 구하다가 배척을 당할 때 그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남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그 은혜를 입은 자의 배은 망덕의 태도를 볼 때에 느끼는 비통(悲痛)은 그 이상이다. “배약하는 자” 성경은,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해야 한다고 한다(시 15:4). “무정한 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무정하다 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 무정함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렇게 제한을 두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정이란 것은 인간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이다. 인정이 활동하면 눈물의 골짜기도 변하여 회열의 낙원이 되는 것이다. “무자비한 자.” 어떤 사람이 불쌍하게 된 원인이 그 자신의 저지른 죄악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졸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혹시 무자비일 수 있다. 크리스챤의 자비는, 조난자(遭難者)의 육신 정형 뿐 아니라, 정황까지 불쌍히 여김이다.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ㅇ자기들만 행할 뿌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 죄를 범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고침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죄를 옳게 여기는 자는 고칠 소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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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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