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사도행전

[스크랩] 사도행전 (15 : 1~4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10:34
 사도행전 15장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ㅇ어떤 사람들이 -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온 기독교인들로 유대인들이었을 것이
다. 또한 이들은 갈2:12에서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과 같
은 부류의 인물로 추정된다. 이들은 기독교 안에서 유대교적 전통을 고수하려는 한
분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구원을 얻는데 할례를 필수적 조건으로 전제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소아시아 이방인들이 기독교인으로 개종하고 이방인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자 자신들
의 주장을 관철시켜 자기파에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로 안디옥까지 내려온 듯하다. 이
러한 내용으로 볼 때 초대 기독교 안에서 이방인 선교와 함께 분파가 형성되었던 것
같다. 6:1에서는 헬라파와 히브리파가 대립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전 1:10-17에서도 나타나는 바처럼 지도자별로 각 분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
히 24절의 진술에 비추어 볼 떠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결정된 바도 없이 이들이 독단
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점에서 계파간에 배타적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은 열성적 유대주의자들로서 바리새파에 속했던 사람도 있었는데(5절)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는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 이 부류의 사람들인 것 같다.
ㅇ형제들을 가르치되...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 바울과 바나바가 중심이 되어 가르치
는 안디옥 교회(13:1)에 할례없이 구원이 불가능함을 가르친 이들의 사상은 바울과 바
나바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으며 안디옥 교회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다. 따라서 안
디옥 교회 안에서는 적잖은 동요가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본 구절에서 율
법의 계명중 할례만 언급되었는데 이는 할례가 모든 율법조항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대
인들에게 취급되었던 데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할례 문제를 다루던 예루
살렘 총회가 결국 할례와 전혀 관계없는 몇몇 의식법의 조항들을 금기시킨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2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ㅇ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 -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파 기독교인들 사이의 논쟁은 매
우 격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장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생겨난
이방 기독교회의 뿌리를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바울의 사도권
(使徒權)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예루살렘 교회의 선교 방침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이미 11:2에서도 베드로의 이방인 선교에 대해 할례주의자들이 비난하고 도전
해 왔음을 보여준 적이 있다. 이 문제는 기독교의 이방 선교와 함께 분명하게 정리해
야 할 교리적 문제이기에 모든 교회가 함께 의논하여 해결해야만 했다.
ㅇ형제들이...작정하니라 -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에 속한 몇 사람의 성도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이 중에 디도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갈2:1,3;Alford, Robertson).

3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ㅇ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 이 진술에는 다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1)바울 일행이 안디옥 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여준다. (2)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
나바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며 유대주의 기독교인들의 가르침에 동요되지 않음을 암시
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전송은 예루살렘 교회에 가서 할례없는 기독교인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확증하고 유대주의 기독교인에 대해 승리하기를 바라는 안
디옥 교회의 구체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ㅇ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 바울 일행은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않고
자기들이 지나가는 성읍에서 복음을 전하는 열성(熱誠)을 보였다. 이 지역들이 비록
팔레스틴에 속해 있으나 유대인들에게 소외된 지역이면서 큰 성읍에 해당되므로 그들
은 복음을 전하면서 또한 기존 성도들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했다. 베니게는 이방
지역으로서, 11:19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간 기독교인들에
의해 교회가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사마리아에는 빌립에 의해서(8:5) 기독
교 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지역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싫어하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이방인에 대한 바울 일행의 전도성과를 듣고 기뻐했을 것이
라는 사실은 족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누가는 이 지역들이 바울의 사상에 동조
함을 잠시 언급함으로써 바울의 권위를 더욱 세우고 있다.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ㅇ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 예루살렘의 온 교회와 지도자들로부터 환
영받게 된 바울의 모습은 9:26-30과 매우 대조된다. 즉 회심 후 처음 예루살렘을 방
문했을 때에는 의심과 냉대를 받았지만 1차 선교 여행 후 지금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환영을 받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미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행 결과에 대해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헬라어 본문에서는
'사도'가 복수형으로 나와 있다. 이로보아 갈1:18,19에 언급된 예루살렘 방문이 아니
라 2:9에 언급된 방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1:19에서는 야고보만 만난것
으로 진술했으나 2:9에서는 세 명의 사도를 만난 것으로 진술하기 때문이다.
ㅇ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서와 마찬가지로 선교여행의 결과에 대하여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안디옥 교회에서의
보고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의 업적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말
하고 있다(14:26,27). 누가는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介入)을 거듭 강조하여 이방인의
선교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초대 교회에 인식시킴으로써 반대론자의 도전을 하
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ㅇ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 -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바리새파 출신 개종자
들도 있었다는 점은 기독교의 세력이 상당히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종교 지
도자급의 철저한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음을 보여줌으로써 유대교적 전통
과 기독교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
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방 선교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들이 유대교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며 1절에서 언급된 '어떤 사람들'
도 이들이 파송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는 할례에 대한 주장이 1
절에서 언급된 주장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ㅇ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 그 의안(議案)은 앞서 언급된 대로 바리새파 출신들이 제
기한 이방인에 대한 할례 문제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이 회의는 기독교가 발생된
후 최초로 시작된 교회 총회라는데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즉 기독교가 이방인들
에게 전파되자 유대인들이 그동안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왔던 선민 의식에 큰 상처를
받게 되면서 나타난 민족적 감정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했다는 점과 종교적으로 중
요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취급했다는 점에서 종교 회의의 모태가 된 것이다.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ㅇ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 회의 진행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본 구절을 통해 회의가
상당히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장시간 계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변
론(제테시스)은 논쟁이나 토론을 뜻하는 말인데 일방적인 변론이 아
니라 상호간의 주장을 내놓고 토의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회의에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바울과 바나바를 지지하는 주장들이 맞서 열렬한 토론이 진행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헬라어 본문에서는 '변론'이라는 단어 앞에 형용사 '폴뤼스'
를 두어 강조하고 있는데 개역성경에서는 '많은'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나
공동번역에서는 '오랜'이라는 시간적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서 '폴뤼스'의 의미
로 어느 것이 정확한지 분간할 수 없다. 대부분의 영역 성경은 개역성경과 같이 번역
하고 있지만(KJV, RSV, NIV, MB) 공동번역의 해석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폴뤼
스'란 용어 자체가 수나 양, 공간 및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지속되면서 토론의 열기 또한 뜨거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ㅇ베드로가 일어나 - 매우 긴 시간의 토론 속에서 언급된 발언자는 베드로와 야고보
(13절) 두 사람 뿐이다. 이를 미루어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 역할
을(갈2:9)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베드로의 발언 결정적(決定的)인 것으로 언급
된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영향력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절대적인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ㅇ너희도 알거니와 - 이 말은 10:1-48에서 언급된 내용, 즉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베
드로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된 사실과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10:10-16)을 뜻한다. 베
드로는 이방인을 구원시키는 자신의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힘으로써 이방
인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못박아 두고자 한다.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ㅇ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 베드로는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총 안
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방인에게도 성령이 임재함을 진술하고 있다. 이 사실은
고넬료 뿐 아니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10:44-47의 내용과 관
계가 있다. 이미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방문한 사건을 두고 할례자들이 공격해
왔을 때에도(11:2)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이 성령받은 사건을 언급함으로 그
들을 잠잠케 한 바가 있다(11:18). 여기서도 역시 아무도 베드로의 말에 반론을 제기
하지 못하고 있다(12절).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ㅇ믿음으로...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가 믿음 때문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전통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갖
고 있는 배타적인 선민 의식이나 우월감(優越感)은 지양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나 하
나님 앞에서 동등한 것이다. 지금까지 베드로의 변론은 공의회가 소집하게 된 내용인
할례 문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단지 이방선교의 정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
다. 이는 회의 진행 도중 이방 선교 자체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케 한다.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ㅇ어찌하여 - 이 말의 헬라어 '티'는 의문 대명사(who)로 쓰이기도 하고 이유
를 묻는 부사(why)로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문맥상 단순히 이유를 묻는다기보다는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말
하면서 책망하는 형식의 어투로 보는 것이 좋다.
ㅇ하나님을 시험하여 -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행위를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한
시험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시험'이라는 단어 '페이라조'
는 '시도하다', '시험하다'(make trial of;RSV)외에 '유혹하다'(tempt)등의 의미를 지
니고 있다. 본문에서의 의미는 문맥상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도록 장애물을 설치하거
나(Alford) 하나님의 일에 인간이 간섭하는(공동번역) 불경건한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의 의로움에 대해 의문
을 제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네일(W.Neil)의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
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기보
다는 하나님의 행위에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ㅇ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 - 베드로의 논점은 유대인 자신들조차 메지 못하는
멍에를 이방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징적으로 언급된
'멍에'라는 단어 '쥐코스'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밭을 갈기 위해 쟁기를
끌도록 소의 목에 걸었던 도구로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에 대한  강제적인 압제(사9:4)
또는 인간에게 가하는 고통을 상징하며(신28:48) 신약성경에서는 율법이 인간에게 요
구하는 종교적 의무나 율례를 뜻한다. 여기서도 역시 5절에서 언급된 바 있듯이 유대
교의 종교적 의무나 계율을 뜻하며 '조상'과 우리가 모두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유대교
의 전통적 율례를 뜻한다. 특히 초기 기독교 당시(1세기 중엽) 베드로가 활동하던 때
에는 샴마이(Shammai)학파의 극단적인 해석으로 율법이 그 어느 때보다 사람들에게 무
거운 짐이 되었다(F.F.Bruce). 바울도 역시 율법을 종의 멍에로 묘사하며(갈5:1) 그
것을 비인간적인 억압 구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율법을 조상때부터 지금까지 완전
하게 지켜내지 못했음을 베드로는 전제하고 율법의 멍에는 사람이 질 수 없는 것이므
로 강요해서는 안 됨을 강하게 암시해 준다. 그런데 베드로는 바울 서신에서와 같이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 관계에 대해서 당시에
분명한 신학적 입장이 없었거나 베드로 자신이 그것에 대해 아직 명확한 인식이 없었
을 것으로 추정된다.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ㅇ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설교의 핵심
이 언급되고 있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 앞에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
는데 이러한 그의 사상은 바울의 사상과도 일맥 상통한다(롬1:16;3:30;5:15;갈
2:14-16;엡2:14). 바울이 베드로를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지 못하다고 비판한 적이
있듯이(갈2:11-14), 베드로는 바울만큼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본 구절처럼 이방인 선교의 정당성(正當性)에 있어서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는 아마 베드로 자신이 고넬료 사건을 직접 체험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
다.

12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ㅇ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 베드로의 변론을 듣는 청중들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본문
은 7절과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논쟁으로 시끄럽던 회의장이 베드로의 변론으로 침
묵하게 되었다는 말로 베드로의 주장이 회의에서 받아들여졌음을 암시해 준다. 이로
써 공의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활동을 공인하고 바리새파 출신을 중심한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주장을 배격하게 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준다.
ㅇ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 이미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영접을 받고 이방
선교에 관한 보고를 한 바 있다. 여기서는 공식적 회의장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
기하여 이방인들이 구원받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즉 바나바와 바울
은 여기서도 4절에서 언급한 바처럼 자신들의 이방선교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임을 증언하고 있다.
ㅇ표적과 기사 -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이
방인들에게 나타난 기적적인 사건이었는데 아마 14:3,8-10에서 나타난 기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방 선교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3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ㅇ야고보가 대답하여 - 여기서 언급된 야고보는 주의 형제(마13:55)를 말하며 예루살
렘 교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던것 같다(12:17;21:18;갈2:9). 뿐만 아
니라 예루살렘 의회에서는 의장의 직분을 담당하여 회의를 이끌고 마무리짓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13-21). 따라서 야고보가 베드로의 연설에 곧이어 응답한 것은 의장으
로서 베드로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회의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4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ㅇ하나님이 처음으로...처희를 권고하신 것 - 야고보는 베드로의 연설내용을 다시 상
기시키며 이방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
방인을 선택하여 부르신 사건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성령 강
림 사건(8절 주석 참조)을 예로 들고 있다. 야고보는 베드로의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베드로의 히브리식 옛 이름으로서 베드로가 야고보와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며 회의장에서 언급되었다는 점에서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가 베드로의 옛 이름을 알 정도로 서로를 잘 아는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
히 이방선교 문제를 거론하면서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의장인 야고보
가 아랍어로 말하고 있음을 암시하거나(Haenchen) 아니면 그 회의에 모인 사람들이 유
대인들뿐이었음을 암시한다.

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ㅇ선지자들의 말씀이 - 야고보는 구약성경 중 선지서를 인용하여 그 예언이 베드로를
통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여줌으로써 베드로의 주장을 회의 결론(結論)으로 확정지으
려 한다.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ㅇ이후에 내가 돌아와서 - 마소라 히브리 본문(Masoretic Text)에서는 '그 날에 내가
다시 돌아와'로 읽혀진다. 그리고 70인역도 마소라 본문과 동일하게 읽고 있다. 그
러나 야고보가 인용할 때는 한글 개역성경과 같이 변형되어 있다. 이처럼 야고보의
인용이 정확히 70인역(LXX)의 암9:11,12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야
고보는 70인역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에게 읽혀지던 히브로 본문이나 아
람어 본문을 인용했을 것이다.
ㅇ다윗의...일으키리니 - 본문은 아모스의 예언을 베드로의 연설과 접목시키면서 아
모스가 예언한 '그 날'이 바로 지금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야고보는 허물어진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우고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낸다는 아모스의 예언을 유대주의의 배타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메시야에 의해 재건된 세계관으로 전환됨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했
다.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ㅇ그 남은 사람들 - 마소라 본문(MT)에서는 '에돔의 남은 자'로 되어 있는데 70인역
에서는 단순히 '남은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살아남은 자가 마소라
본문에 따르면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으나(Robertson) 70인역의 번역은 유
대인들 중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을 의미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아마도 야고보는 마소
라 본문 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 본문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 본문을 인용하여 유대인을 언급하고자 했던 것 같다.
ㅇ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 - 이는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했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모든 이방인들을 한정짓는 관계절인 '내 이름으로 일컬
음을 받는'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공동번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가능성이 구약 시대에서부터 열려있었음을 확언하
는 말이 된다.
ㅇ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게 되는 목적이 모든 이방
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는 것에 있음을 강조하여 야고보는 이방인들의 기독교인됨이 구
약의 예언 성취임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이방 선교의 정당성이 구약의 예언(豫言)을
통해 확증된 셈이다.

18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ㅇ예로부터...주의 말씀이라 - 본문은 야고보의 자유로운 변형이거나 인용일 수 있
다. '예로부터'라는 말이 아모스의 본문에서 나타나지 않으나 야고보의 말에서는 첨
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야고보는 사45:21의 어투를 따왔거나 아니면 야고보가
인용한 사본에 이 말이 첨가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 구절은 이방인의 구
원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구약 시대에도 계시되어 왔음을 밝혀준다. 이 사실은 하
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구원사업을 계속적으로 펴왔음을 뜻한다.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ㅇ그러므로 - 여기서 사용된 접속사 '디오'는 결론이 자명한 것을 연결해
준다. 즉 야고보가 인용한 아모스의 예언대로라면 자신이 제안하는 다음의 의견을 받
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ㅇ내 의견 - 이 말의 헬라어 '에고 크리노'는 '내가 판단하다'
또는 '내가 심판하다'의 의미로 야고보 자신이 단순히 의안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토론의 결론을 내리는 재판장으로서 최종 판결을 내리는 듯한 어감을 주고 있다. 
이는 '내가'(에고)란 표현이 강족적으로 사용된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본절에서 야고보의 의견을 채택하는 형식 절차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우
리는 야고보의 의견을 최종적 결정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이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
에서 야고보의 권위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ㅇ괴롭게 말고 - 여기서 괴롭히고 있는 주체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이며(1,5절) 그
내용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인데 이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배타적 우월감의 상징이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우월감
을 유대인들이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제시된 네가지 권면 조항은 세 개의 의
식적 부분과 하나의 도덕적 구분으로 구분된다. 이로보아 예루살렘 총회에서 논의된
내용이 단순히 할례 문제만이 아니라 율법 전반(全般)에 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ㅇ다만...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 - 이 어투는 강제적 명령이라기보다는 권면의 성
격을 띠고 있다.
ㅇ우상의 더러운 것 - 29절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다시 언급된다. 이는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의미한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논쟁은 이방 선교 과장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 중의 하나였다. 예루살렘 총회는 우상의 음식에 대해 부정
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고전8:1-13;10:27,28;갈2:11-14에서 바울은 각자의 양심에 맡김
으로써 보다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이 부분의 권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음식 섭
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로 빗나가는 신앙을 경계하는데 있다.
ㅇ음행 - 십계명에 언급되어 있는 이 규정이 예루살렘 총회의 권면 조항에도 나타나
게 되었으므로 학자들에게 여러 가지 해석을 불러일으켰다. 그 해석을 요약하면 다음
과 같다. (1)우상에 바친 음식을 먹음으로써 범하는 영적 음행(Beza, Selden). (2)우
상의 신전에서 행하는 육체적 음행(Stolz, Heinrichs). (3)음행을 조장하고 매개하는
포주(抱主)의 죄(Salmasius). (4)축첩행위(J.Calvin). (5)근친혼(Lightfoot). (6)이
도교와의 결혼(Teller, Bruce, J.W.Packer). (7)재혼(Schwegler). (8)돼지고기
(Bentl- ey). (9)금지된 혈존간의 결혼(Haenchen).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음행
(포르네이아)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을 향한 용어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네일
(W.Neil)이나 마샬(H.Marshall)의 견해처럼 율법의 음행 조항들로 볼 수도 없다. 오
히려 이방인들이 범할 수 있는 여러가지의 음행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
절하다(Alford,Meyer).
ㅇ목매어 죽인 것과 피 - 이는 이미 구약에서 금지된 것이다(창9:4;레17:14;신
12:16,23). 여기서 목매어 죽인 짐승은 피가 체내에 남아 있기 때문에 피채 먹지 말
라는 것과 동일하다. 그리고 구약에서 피를 먹지 못하게 규정한 것은 피가 생명을 뜻
하기 때문이다(레17:11).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ㅇ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읽음이니라 - 이는 이방인 지역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는
회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유대인 교사들이 가르쳤다. 그렇게 때문에 유대인들의 율
법이 이방인들에게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므로 이방인 개종자들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된 네 가지 조항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야고보가 이 사실에 대해 언급한
것은 그 권면 조항들이 지닌 의미에 대해 이방인 개종자들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회당 교사들에게 배우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ㅇ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 이는 예루살렘 총회의 구성원들에 대한 진술이다. 여
기서 온 교회는 모든 지역 교회의 대표를 의미하므로 사도 및 장로와 함께 언급됨으로
써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사항이 모든 교회의 찬성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해 주며
바울 일행과 동행(同行)하게 된 자들의 권위도 암시한다.
ㅇ사람을 택하여...보내기를 가결하니 - 21절과 22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문장이 연결
된다.  즉 이방 선교 문제에 대한 어떤 결정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그
대신 사람을 뽑아 바울과 바나바와 동행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통해 예루살렘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활동을 공인했음을 간접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그리과 바울의
선교 활동뿐 아니라 그의 가르침도 공식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을 받고 그 정
당성이 확인되었다. 이 파송으로 인해 바울은 실라를 만나게 되어 이후 함께 전도 여
행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가결하니'로 번역된 헬라어 '도케오'
는 '생각한다', '작정한다', '결정한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예루살렘 총회
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 것이 반드시 찬반(贊反)을 묻는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이 용어를 만장일치 또는 이의없이 그 두 사람을 보
내기로 결정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ㅇ형제 중에 인도자 -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직임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ㅇ바사바라 하는 유다 - 유다에 대해서는 그가 선지자라는 것과(32절) 요셉 바사바의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1:23)는 사실 외에 이렇다할 자료가 없다.
ㅇ실라 - 본서에서는 그의 히브리식 이름인 '실라'로 언급되지만 바울 서신에서는 로
마식 이름인 '실루아노'로 언급된다(살전1:1). 따라서 실라도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
권을 가진 유대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16:21). 그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에 동행
하게 되는데(40절;16:19-29;17:4,10,14;18:5)베뢰아에 혼자 남은 적도 있고(17:14) 디
모데와 함께 전도한 사실도 있다(18:5;고후1:19).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베드로
전서를 소아시아의 교회에 전해준 사실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며 베드로와 친분이 있었
을 것으로 보인다(벧전5:12).

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ㅇ사도와 장로된 형제들 - 이 표현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다. (1)'형제들'에 관사
가 붙은 경우 : 이 때는 개역성경과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2)'형제들'에 관사가 생
략된 경우 : 공동번역과 같이 '형제된 사도와 장로들'로 번역되어야 자연스럽다. (3)
'형제들'앞에 접속사 '카이'와 관사가 함께 붙은 경우 : '사도와 장로와  형
제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 사본상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3)의 경우다. 
그 이유는 그와 유사한 표현이 본장에서(4,22절) 사용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3)의 것이 사본상 많은 지지를 받으나 그 중 많은 사본들이 후대에 속하는 것
으로 '카이'와 관사를 의도적으로 첨가하였을 것이라는 강한 암시를 주고 있다는 데
있다. 사본 비평상 가장 간단한 구절이 원문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경우 (2)
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이방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주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
표자인 '사도와 장로'가 언급된 사실은 편지의 권위를 확정지어 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은 (2)의 해석이 가장 무난하다. 이방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주체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자인 '사도와 장로'가 언급된 사실은 편지의 권위를 확정지어 주
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구절은 (2)의 의미로 해석하는 편이 좋다.
ㅇ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 - 이는 편지를 받게 될 지역에 대한 진술이다. 수리
아 지역을 언급하면서 그 지역의 수도인 안디옥을 특별하게 언급한 것은 논쟁의 발단
이 안디옥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수리아 지역에 대해 언급한 것은 바울
이 처음 개종하여 다메섹 등지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9:19-22). 그리고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를 중심한 수리아 북서 지방을 말한다. 길리기아 지역 교회는 바울
이 다소에 머물렸었으므로(9:30;11:25) 바울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된 자가 많이 있었
을 것이다.

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ㅇ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 사도와 장로들은 이 문구를
사용하여 예루살렘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파손한 바가 없음을 재확인하며 강조하고
있다.
ㅇ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 이방 기독교인들을 괴롭히는 것이 폭력적 박해가 아니
라 유대 기독교인이 저지르는 말, 곧 그들이 전파하는 잘못된 가르침임을 밝히고 있
다. 여기서 '말'은 이방인들에게 유대의 율법적 규정들을 강요하는 잘못된 가르침이
라는 점에서(1절) 종교적 갈등과 혼동을 촉발시키는 거짓 진리를 뜻한다.
ㅇ마음을 혹하게 한다 - 이는 헬라어 본문에서 '아나스큐아존테스 타스 프쉬카스 휘
몬'으로 진술되어 있
는데 직역하면 '너희의 혼을 파괴하면서'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 교회의 성도들
을 단순히 미혹하는 차원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붕괴(崩壞)시키려는 의도로 그들의 가
르침을 전파했음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서 '혼을 파괴한다'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에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일으키게 하여 결국 믿음의 도에서 떠나 사망의 길로 가게 한다
는 의미다.

25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ㅇ사람을 택하여 - 22절에서 사용된 형태(
에클렉사 메노이스 안드라스)와 같은 관용구다. 이는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증함과 동시에 바울과 바나바 역시 예루살렘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
하는 선교사임을 뜻한다. 이로 미루어 아직까지 바나바와 바울의 권위보다는 예루살
렘에서 직접 보냄을 받는 특사로서의 권위가 더 신뢰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권위는 파송되는 유다와 실라의 권위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
를 뜻한다. 그 이유는 아직 예루살렘에 대부분의 사도들이 머물고 있었으며 그들에
의해 최초로 교회가 설립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는
사도들의 권위에 의해서 지지되었다.

26 (25절에 포함되어 있음)

ㅇ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 - 이 표현은 잘못된 가르침과 투쟁한 바나바와 바
울을 격려하고 이방 기독교인들 앞에 찬사하며 그들의 노력과 공적을 치하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공적인 보증을 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논쟁은 바울과 바나바
의 승리로 끝나고 있다. 예루살렘 교회가 보내는 이 같은 애정어린 찬사는 이방 기독
교인에게 보내는 격려이며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으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
고 공격자들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거부를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공식화된 권위를 뜻한다. 이 편지에서 바울보다 바나바가 먼저 언급된 점으로 보아
예루살렘 교회안에서는 바울보다 바나바가 더 친숙함을 엿볼 수 있다. 바나바는 예루
살렘 교회가 처음 확장될 때 헌신했던 자였다(4:36,37). 그런 이유로 예루살렘 교회
의 사도와 장로들은 바나바를 바울보다 먼저 언급했을 것이다.
ㅇ일치 가결 - 한 마음이 되어 뜻을 모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집
된 총의(總意)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파송되는 유다와 실라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의 권
위를 보증하기 위한 표현이다.

27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ㅇ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 '이 일'은 25,26절의 내용 곧 바나바와 바울에 대한 공식
적인 보증 및 유다와 실라의 파송에 대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나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다와 실라가 파송된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나바와 바울의 가르침을 이방 교회에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또한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일'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 사항을 가리킨다.

28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ㅇ성령과 우리는 -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유다와 실라를 보내게 된 결정권자 즉 예루
살렘 총회의 결의의 주체가 곧 성령과 자신들임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결정, 곧 예루살렘 교회의 결의가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성령
의 활동은 본서 전체가 강조하고 있는 점이기도 하다. 이 같은 언급은 예루살렘 회의
의 결정을 신적인 명령으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ㅇ요긴한 것들 - 이 말의 헬라어 '에파낭케스'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용어로 본래 부사이지만 본절에서는 명사형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 의미는 '필요 불가결 한 것',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등으로 사용되었다. 따라
서 본문을 이용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 보는 것이 좋으며 그 구체적인 예는 20
절에서 야고보가 제의한 4가지 금지(禁止) 조항으로 이해해야 된다. 
ㅇ아무 짐도 - 앞에서 제안했던 4가지 금지 조항외에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더이상 없음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게
요구하는 할례 등의 요구는(1절) 공식적으로 무시되는 것이다.

29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ㅇ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 개역성경에는 분명하게 번역되지 않았으나 헬라어 본문
에서는 '실천하다'(프랖세테)란 말이 강조적으로 들어가 있다. 이는
교회에서 덕을 세우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성도들이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
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본에 따라 시제상에 있어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그런데 개
역성경처럼 미래형이 사본상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해석상으로도 가장 자연스럽
다.

30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ㅇ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 여기서 사용된 '무리'의 헬라어는 '플레도스'
로 일반적으로 공적, 정치적, 종교적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다(Lenski).
그렇다면 이 모임은 예배를 위해 모인 단순한 집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 모임은 안디옥 집회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이 모임은 안디옥 교회의 전
체적인 모임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모교회로부터 전달된 공식 문서를 다시
자기들 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온 회중에게 선포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31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ㅇ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 편지는 회중 앞에서 대표자에 의해 낭독되었을 것으
로 짐작되며 회중들은 그 내용을 다 들은 후 크게 만족하면서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였
을 것이다. 따라서 '기뻐하더라'는 말은 안디옥 교회가 예수살렘 교회의 제안을 전폭
적(全幅的)으로 수용했다는 의미를 더욱 부각시켜 준다. 그것은 안디옥 교회가 예루
사렘 교회에서 제안한 4가지 금지 조항을 짐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성도된 의무로
받아들였으며 할례와 같은 율법적 짐을 벗게 한 복음으로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편지의 내용을 '위로한 말'이라고 표현한다. 위로한다는 단어 '파라클
레시스'는 '격려' 또는 '권면', '간청' 등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공동번역은 '격려'로 해석하는데 문맥상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구절에서 권면(勸勉)의 뜻도 배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음 절에서 이 용
어가 동사형으로 다시 언급되어 권면의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안디옥 교
회가 그동안 유대적 가르침과 바울의 가르침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었으나 끝까지
견뎠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일이 있을 경우 흔들리지 말라는 격려의 의미
도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편지를 읽은 후 그에 따른 권면의 말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
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누가는 이 두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달하기 위해 '파라클레
시스'란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안디옥 교회에서는 유대적 전통에 종속됨 없
이 독립된 교회로 공인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고조된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이 틀림없
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의 공격에 대한 승리로 여기고 당당한 기독교인
으로 새로 태어남을 경험했을 것이다.

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ㅇ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격려하게 된
것에 대한 권위와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는 그들의 신분이 '선지자'임을 언급
하고 있다(선지자에 대해서는 11:27,28주석을 참조하라). 그들은 편지에서 언급된 바
처럼(27절) 편지의 내용에 대한 설명과 예루살렘 교회의 입장을 구두로 전달하며 예루
살렘 교회의 주역인 사도들이 가르치는 복음의 핵심을 간략하게 전달하여 안디옥 교인
들에게 견고한 믿음을 북돋우도록 격려했을 것이다.
ㅇ굳게 하고 - 14:22에서도 같은 단어가 언급된다.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갈등과 불
안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던(24절) 안디옥 교인들의 신앙을 진정시키고 견고(堅固)하게
하는데 공헌하였음을 뜻한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예루살렘 교회가 그 회의 결정 사항
을 담은 편지와 두 선지자를 파송한 결과가 성공적이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33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ㅇ평안히 가라는 전송 - 유다와 실라가 얼마동안 지내다가 전송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누가는 유다와 실라의 활동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받았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방 교회로 대표되는
안디옥 교회와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와의 긴밀하고 두터운 형제애를 보여주기에 충
분하다. 따라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에 새로운 용기를 갖고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며 바울의 2차 선교 여행이 준비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34 (없음)

ㅇ주요 사본에서는 34절이 생략되고 35절이 시작된다(A,B,E). 따라서 개역성
경과 공동번역 그리고 대부분의 영역 성경도(RSV,NASB,NIV,LB)도 34절을 생략하고 있
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 성경은 난외주를 통해 어떤 사본에 언급된 본문을 소개하
고 있다. 어떤 사본에 '실라는 거기에 머무르기로 작정하였다'(   
에돝세 데 토 실라 에피메이나이 아우투스, 모노스
데 유다스 에포류데)란 구절이 첨가되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유다만 떠났다'란 표
현만 불필요한 첨가로 판단하여 배제했다(Zahn). 그런데 이러한 사본들에서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첨가시킨 것은 40절에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실라를 데리고 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33절은 유다와 실라 두사람 모
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리고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
나게 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므로 굳이 실라가 안디
옥에 머물렀다고 첨가시킬 필요가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37-40절 주석을 참
조하라.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ㅇ바울과 바나바는...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하여 안디옥
에 머물면서 전도 활동에 열심을 다했는데,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에도 계
속되는 바나바와 바울의 변함없는 활동을 보여준다. 즉 안디옥 교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1,2절에서와 같은 혼란 이전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여
기서 언급된 '다른 여러 사람들'이란 13:1에서 언급된 바처럼 안디옥 교회에 있는 여
러 교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ㅇ수일 후 - 여기서 언급된 며칠 후는 유다와 실라가 떠난 이후의 날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며(Lenski)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된 날은 아닐 것으로 짐작된다.
ㅇ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 제2차 선교여행에 대해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1차 여행 당시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 교사들이 안수하여
파송한 것이지만(13:1-3)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계획하고 있다. 바울은 예루살
렘 회의의 결정과 안디옥 교회의 빠른 성장에 고무되어 새로운 전도 여행의 사명을 느
끼게 된 듯하다. 그러면서 안디옥 교회가 겪었던 혼란을 미연(未然)에 방지하기 위해
이전에 전도했던 지역을 찾아가 예루살렘 총회의 의결사항을 전달하고자 했을 것이다.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ㅇ마가라 하는 요한 - 바울의 제안을 받은 바나바는 전적으로 찬성한 듯하다. 그런
데 바나바는 요한을 동행시키자고 바울에게 제안하고 있다. 요한은 12:12에서 언급된
인물과 동일인물로 추정된다(12:12 주석 참조). 또한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로 알려져
있다(골4:10). 또한 1차 여행 때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
로 돌아간 사실이 있다(13:13). 그러나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왔는지 아니
면 바나바가 그를 데리러 예루살렘으로 간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실라와 마가가 동
일하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바나바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갔을 가능성
이 있다.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ㅇ바울은...옳지 않다 하여 - 바나바의 제안을 거부하는 바울의 이유는 1차 여행 당시
요한이 중도에서 포기했다는 점(13:13)이다. 아마도 바울은 요한에게 선교에 대한 소
명의식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음을 13:13의 사건을 통해 인식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바
울은 전도여행에 마가 요한이 별 도움이 못되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ㅇ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 바울을 위해 헌신적으로 애썼던 바나바(9:27;11:25)
의 관대함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동행자 문제로 언쟁 끝에 헤어지게 된다. 
이 다툼은 감정적(感情的) 요소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예루살렘 회의
이후 바울의 입지가 강화되고 독자적 권위가 인정됨으로써 바나바의 도움이 바울에게
는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바울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바울에게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 다툼은 대등한 입장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양보를 거부하
게 된 지극히 감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바울 서신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바나바와의 다툼과 요한에 대한 냉대가 지나친 바울의 고집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가 요한은 훗날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사역에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바울로 하
여금 감사하게 한다(골4:10;딤후4:11;몬24절).
ㅇ바나바는...구브로로 가고 - 바나바의 행적은 구브로를 떠남으로써 막을 내리고 있
다.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었다(4:36). 그가 구브로로 가게 된 것은 1차 여행의
첫 선교지였고 바울이 제안한대로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ㅇ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 - 바나바가 떠나자 바울은 실라를 택하지만 실라가 예루살
렘으로 갔다가(33절) 바울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왔는지 아니면 바울이 다시 예루
살렘을 방문하여 실라에게 전도여행을 제안했는지 확실치 않다. 어쨌든 바울은 바나
바와 헤어져서 실라를 동역자로 맞아드리고 선교여행을 준비한다.
ㅇ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 바울이 안디옥을 떠나는 장면 묘사는 바
나바와 매우 대조된다. 즉 바나바는 매우 화난 사람이 훌쩍 떠나버린 듯한 묘사(39
절)를 하고 있는 반면 본문에서는 바울의 떠남이 교회 성도들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따라서 본서의 저자 누가의 초점은 바울에게로 모아지고
바울의 비중(比重)을 높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ㅇ수리아와 길리기아 - 바울의 행선지는 육로를 통해 북상하여 자신의 고향인 다소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을 1차적으로 향했다는 점에서 바나바와 흡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첫 방문지를 재방문하자고 하였던(36절) 계획
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바울의 2차 여행에서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가
빠져있다는 것은 바나바와의 감정적 대립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갖게 한다. 그
러나 바나바가 구브로로 떠났기 때문에 바울이 다시 그곳을 방문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23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편지의 수신처가 수리
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에서도 바울의 행선지는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바울이 그 지역에 편지를 전하기 위해 그 길을 택했다든가
아니면 직접 편지를 전해준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어쨌든 본절에 비춰볼 때 바울
의 2차 전도여행은 단순히 바나바에게 처음 제안했던 것과 같이(36절) 1차 여행지의
재방문이 아니라 기독교를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모험과 도전을 시작하는 대장정(大長
程)의 출발이었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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