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성경 구약 주석 신약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예루살렘 선교회

신약/누가복음

[스크랩] 누가복음 (6 : 1~49)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9:06
누가복음 6장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ㅇ안식일에(엔 사빠토) - 다른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두번
째 중 첫째"(듀테로프로토)라는 단어가 있는데 개역 성
경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번째 중 첫째"라는 단어는 고대의 권위있는 대다수
의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해석 중 어느 것도 확실성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원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여러
가지 설명을 제시한다. 이 구절의 문자적인 해석은 "두번째 중 첫째 안식일에"라고 말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다양한 설명들은 다음과 같다. (1)7년의 안식년 중 두번째
안식년의 첫번째 안식일(Wieseler), (2)유월절 후 둘째 날 후의 첫 안식일(Lange,
Ewald, De Wette), (3)두번째 달의 첫 안식일(Wetstein), (4)오순절의 안식일(유월절
안식일을 첫번째 안식일로 보고, a Lapide).
ㅇ제자들이...비비어 먹으니 - 마태는 "제자들이 시장하여"(마 12:1)란 말을 첨가하
였다. 제자들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에서도 분명히 허락하고 있다. "네 이웃의 곡식 밭
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신 2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2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ㅇ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 나그네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의 밭에서 곡식
따는 것은 위법(違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이 이의를 제기한 것
은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삭을 잘라 비비는 것은 추수하고 타작한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규정했다. 당시에 안식일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은 유대교의 중
요한 의무 중 하나였다. 율법학자들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된 사항들
을 제외하고도 문자 그대로 수천가지의 명령에 대한 미묘한 조항들을 규정해 놓았다.
그 결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완전히 형식주의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므로 그와 같
은 원칙과 형식을 고집하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준수의 참된 의미를 중요시하신 예수
님의 태도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ㅇ다윗이...시장할 때에 한 일 -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예수는 문자적인 율법보
다 율법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삼상 21:1-6을 인용하여 설명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에게만 먹도록 허용된 진설병을(레 24:9) 먹었다는 사
실은, 율법의 더 중한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단적 예라 하겠다. 마태는 당시 바리
새인들에게 정곡을 찌르신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곧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
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
라"는 말씀이다(마 12:7).
ㅇ읽지 못하였느냐 -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바리새인들이 율법이 전하는 참 의미를 깨
닫지 못하고 유전에만 집착하고 형식으로 치우쳐 허탄한 일만 일삼는데 대해 성경 자
체에 기록된 사례를 통해 일침을 가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께서 다윗의 예증을 사용
하신 것은 다윗이 긴박한 상황에 처하여 율법 내용 가운데서 예외적인 행동을 할 수
있었다면 하물며 예수께서는 그 이상의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함이
다.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ㅇ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 '진설병'(showbread)은 히브리어로 '레헴판
님'이라 하여 '면전의 떡', '누군가의 앞에 두는 떡'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출 25:30). 이 떡은 모두 열 두 덩이로 성소 안에 있는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들은 일주일 동안 상 위에 진설되었
다가 제사장이 거룩한 곳으로 가져가서 그곳에서 먹었다(레 24:5-9).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진설병을 먹는 것은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였다(삼상 21:2,3;마 12:4). 또
한 이 열 두 덩이의 떡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였으며(레 24:8) 민족의 통
일을 상징하였다(왕상 18:31,32;겔 37:16-22). 한편 예수께서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제사장들만을 위한 음식으로 율법에서 지정한 진설병을 먹은 사건(삼상
21:1-6)을 인용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 보다도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과 공의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다.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ㅇ인자는 안식일의 주인 -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로서 그리고 인자로서안
식을 어떤 정신과 방법으로 준수하셨는가를 분명히 밝혀준다. 예수께서 '안식일의 주
인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입법자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창 1:26) 제 7일에 안식하셨기 때
문이며(창 2:1-3),첫 사람 아담의 타락 후 죄로 오염된 이 세상을 다시금 회복시키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실 자이기 때문이다(히 4:1-11).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같은 안식일 제도를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규례로 주신데(출 20:8-11;신
5:12-15)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다. (1) 하나님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다.(2)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중에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성별시켜 주
신데 대한 표징으로 삼기 위해서이다(출 31:13). (3)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신 5:15). (4) 사람들
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이다(출 20:10). 이상에서 우리는 안식일이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아울러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있는 것(막 2:27)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같은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깨닫지 못
하고 단지 '제 7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는 금기조항에만 연연한 나머
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주신 선한 규례를 오히려 인간의 행동을  제어(制御)하는
악법으로 변형시키고 말았으니 그 어리석음과 잘못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예수의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 준수가 신자들의 신앙 성장에 장애가 되는
외적인 형식주의로 전락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주일 성
수는 바리새적인 형식주의의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답게 자발적인 순종과 섬김의 자세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ㅇ또 다른 안식일에 -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의 준수가 엄
격한 형식적 규정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안식
일에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을 제시하신다. 이 구절에서 '다른 안식일'이란 반드시 그
다음 안식일로 볼 필요는 없다. 누가가 이 부분에서 의도하는 바는 어느 안식일이냐가
아니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어떤 사람의 오른손을 고쳤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ㅇ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 예수께서 자주 드나드시던 가버나움의 회당인 것 같
다. 예수께서는 기회있을 때마다 회당이나 성전이나 노천에서 제자들과 무리들을 가르
치셨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관복음 전체에
걸쳐 입증된다(21:37;마 13:54;막 1:21 등).
ㅇ오른손 마른 사람 - '오른손'이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곳은 공관복음서 평행 구
절 가운데서 오직 여기 뿐이다. 이는 여러 방향에서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자 누가의 직업이 의사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문가적인 직업 의식에서 나온 결과
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문 의사로서 환자의 정확한 병명과 정확한 환부(患部)의 상태
를 살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그 진찰 결과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사례 수집이
라는 차원에서 관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환자의 마른 손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었다는 것은 이 환자의 상항이 보다 심각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환
자의 이전 직업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손으로 생계를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었다면 일반적인 대부분의 오른손 잡이처럼 오른손의 마비는 그에게 치명적이었을 것
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본문에서는 보도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환자에게
그간 손이 말라 있었던 기간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기간이었음은 분명할 것이다.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ㅇ서기관과 바리새인 - 서기관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제사장 계층에서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하여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는 율법이 모든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으며 율법 해석을 목적으로 등장한 서기관들은 문필가로서 이스라엘의 성
문서를 해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수집하는 데에도 몰두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필사자들, 편집자들 그리고 성경의 순수성을 수호하는 자들로서 사람들의 대단한 신망
과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헬라의 세속 문화로부터 유대교를 순수히
보존하고자 하는 동기에서 마카비 시대 때 생겨난 소위 '하시딤' 혹은 '하시디안'이라
는 경건 집단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의 선한 동기와는 무관하게 날이 갈수록
형식과 위선에 치우치게 되었다. 한편 본문에서 이 사람들은 앞서 안식일 논쟁에서 패
배하고 예수의 정곡(正鵠)을 찌르는 지적으로 인해 망신을 당했던 터라 예수를 궁지에
빠뜨릴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ㅇ엿보니(파레테룬토) - '엿보다'의 미완료형으로서 예
수께서 가르치시는 동안에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들이 엿보고 있었
던 것은 송사할 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행동은, 오늘날 성경을 보되 그
속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독교를 헐뜯을 근거를 찾
기 위해서 말씀과 씨름하는 자들의 사악한 행위와 일맥 상통한다. 이들은 공히 예수나
성경 말씀에 대해 왜곡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방 일변도로 흐르게 마련이다.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ㅇ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
하사 노하심으로"라고 한다(막 3:5). 따라서 '저희생각'이란 예수를 궁지에 빠뜨리고
자 하는 악한 생각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저들의 생각을 어떻게 아셨는지에 관
해서 누가는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통찰하실 수 있는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방법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ㅇ일어나 한 가운데서라 - 예수께서는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무리가 잘 보이는 가운
데 일어서라고 공개적(公開的)으로 명령하셨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엿보니'와 대조되
는 말로서 완악한 마음을 갖고 송사할 구실을 찾으며 엿보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다시
한번 반격하실 예수의 당당한 행동으로 볼 수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께서 불의
와 타협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악한 의도를 물리치기 위해 그의 병고치는 이적을 공
개적으로 행하셨음을 의미한다.
ㅇ저가 일어나 서거늘 - 손마른 사람은 예수의 말씀에 곧 복종했다. 그는 권위있는
예수의 명령에 그대로 따랐다. 예수께서는 그를 자신의 앞으로 오라고 명령하지 않았
고 '일어서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의 악한 생각을 미리 아
시고 그들이 치료의 행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편으로는 병고침이 손을 만짐으로써가 아니라 말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
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으리라.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ㅇ예수께서...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핏발선 눈으로 지켜보
며 책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바리새인 등에게 예수는 공개적인 질문을 던지셨다. 여
기서 '묻노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로타오'는 '질문하다',
'요구하다'는 뜻인 '에로타오'보다 훨씬 강한표현으로 '심문하다'는 의
미까지 내포한다. 따라서 이말투 속에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편견(偏見)을 적나
라하게 파헤치고자 하는 메시야의 권위가 스며있다 하겠다.
ㅇ안식일에...어느것이 옳으냐 - 이 질문은 병든 사람이 죽을 처지가 되었을 경우에
만 안식일에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전통에 대해서 반격을 가하신 것
이다. 손 마른 사람은 비록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해도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이라해서 이를 내버려두는 것은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을 도외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과감히 실
행하려고 하셨다. 특히 우리는 예수의 이 반문에 담긴 예리한 풍자를 파악해 볼 수 있
다. 즉 예수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옳으냐 그러지 않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지 않고 '안식일에 선행(혹은 생명 구함)이 옳으냐 아니면 악행(죽임)이 옳으냐'라
고 물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형식과 위선의 허물을 쓰고 사람의 진정한 아
픔과 필요를 거들떠보지 않는 자들의 비정함을 이미 악행 내지는 살인 행위로 규정하
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 예리한 질문 속에는 거룩한 안식일에 예수를 '멸하려
고' '악'을 꾀하는 대적들의 음모에 대한 질책이 시사되어 있다. 마태에 따르면 이 부
분에서 예수의 말씀은 더 이어지고 있다. 그는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의 예화를
사용했는데 그 주인은 안식일일지라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확실히 건져내어야 한다.
하물며 인간은 양보다 더 귀하기 때문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고 결론지으
셨다(마 12:11,12).

10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ㅇ무리를 둘러 보시고 - 마가의 표현에 의하면 무리를 둘러 보시는 예수님은  근심하
시고 노하신 상태였다(막 3:5). 아무튼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을 가하신 후에 그들의
태도를 살피신다.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중(意中)을 찌르는 질문을 하
셨다. 사실 이 질문은 상식적인 선에서 모든 사람이 답할 수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
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묵묵 부답, 유구 무언이었다. 왜냐하면 어떠한 질문이든 그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느 쪽도 택일할 수
없는 난처한 처지에서 안식일에 치유 행위를 하시는 예수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는
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을 보시며 곡해된 안식
일의 근본정신을 쇄신하려고 하신다.
ㅇ네 손을 내밀라 - 이 명령은 사실상 그 손 마른 자가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그에게 손을 내밀라고 명하신다. 공관복음 어디에도 그병자가
믿음을 가졌다거나 고쳐줄 것을 부탁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예수를 향한 갈급한 심령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ㅇ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그리하매'는 손 마른 사람의 신앙적 행위를
입증해 주는 말이다. 예수께서 힘이 없고 마른손을 내밀라고 명하셨고, 그 사람이 손
을 내밀었을 때 즉시 그 손이 회복되었다. 세 공관복음서 기자가 모두 '회복되다'는
말인 '아페카테스타데'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이전의 상
태로 다시 회복되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병자의 병을 고치신것은 안식
일 규례를 어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치료할 수 있는 병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방
치해 두는 것은 오히려 '태만'의 죄를 범하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을 '멸하는' 악행을
범하는 것이고 결국 안식일의 근본 목적을 거스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께
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안식일 제도의 근본 목적을 성취시키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
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써 예수께서는 스스로 안식일의 입법자이심을 드러내셨고 하나
님의 아들이심을 암시하셨다.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ㅇ분기가 가득하여 - '분기'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이아'는 모든 감
각과 이성을 잃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되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에서는 이성을 잃고 덤
비려는 태도를 가리키고 있다.
ㅇ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 마태와 마가는 이 구절에 '죽이다'는 말을 사용함으
로써 더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마 12:14;막 3:6). 그러나 누가는 여기에서 '처치 하
다'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른 기자들보다 완화된 어감을 주지만 그렇다고 예수께 대한
바리새인들의 적대감이 완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가장 교묘하고 은밀한 술책으로 예수를 모해(謨害)하려고 한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했다.
ㅇ서로 의논하니라 - 마가는 그들이 회당을 나와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어떻게 예수
를 죽일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기술한다(막 3:6). 그들은 예수를 대적하는 무리들과
함께 모여서 예수를 모함하고 그를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음모를 세웠을 뿐만 아니
라 결국은 그를 죽일 계책을 세웠던 것이다.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맟도록(마ㅊ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ㅇ이 때에 - 예수께서 지금까지 갈릴리에서 전도하시는 동안, 특히 5장과 6장 11절까
지의 사건들이 있은 후를 가리킨다. 11절과 관련하여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들의 음모
를 깨달았을 때에 이 지방을 떠나셨다고 기록하는데(마 12:15) '이 때'는 예수께서 그
지방을 떠나신 직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때가 정확히 어느때인지는 알 수 없다.
ㅇ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 이 구절에서 산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중요
한 일이 아니나(Conzelmann) 학자들은 팔복을 말씀하신 산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Farrar). 아무튼 여기서 '산'(토 오로스)에는 관사가 있어서 예
수가 늘 오셨던 친숙한 산임을 암시하고 있다.
ㅇ밤이 맞도록 - '디아뉘크테류오'는 '밤을 새다'의 미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오랜 지속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의학적 용어로(Vincent) 신약
에서는 이 구절에만 나오지만 70인역 등에서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의
학적 용어로 쓰는 경우에는 밤을 새워 병 간호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의 삶
을 살펴볼 것 같으면 그의 생애에서 모든 중요한 사건 전에는 반드시 기도하시는 모습
을 찾아 볼수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끝임없는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기도와
실제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막 1:35).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의 능력의 공급선이었다. 하나님께  감
사와 찬양을 드리며 죄인을 구속하고자 하는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애절하고
절박한 끊임없는 기도가 있었다. 본 구절에서도 예수께서는 그가 선택하려고 하는 제
자들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성취할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
하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이러한 기도는 남에게 과시(誇示)하기위해 요란스럽게
빌었던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기도와는 현격히 대조된다(막 12:40).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ㅇ열 둘을 택하여 - 열 둘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에게 있어 완전을 의미한다. 따라서
12제자의 선택은 예수의 복음 사역의 초기 단계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종말론적 의미에
서 복음 사역의 완전한 성취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이것은 구약과의 관계에서 아브라
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유대 민족의 형성 과정상의 12지파가 암시하는 바와 맥
을 같이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출현을 의미한다. '택하여'는 예수께서 복음 사
역을 위해 주권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제자들을 선택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요
15:16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자들이 예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
하셨다는 말씀을 입증해 준다. 거기서도 예수는 선택의 주체는 분명히 예수인 것을 밝
히고 있다.
ㅇ사도(아포스톨로스) - 이는 '아포스텔로'('보내다')에서 나온 말로 문자적으로는
특별한 명령과 권세를 받아 보냄을 받은
사절을 말한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 가운데 열 둘을 택하여 다른 무리
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도'라 칭하셨다. 사도의 정의와 용법 및 사도직 계승의 문제
등에 관해서는 막 3:13-19 주제강해 '사도직에 대하여'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참
조하기 바란다.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과 및 그 형제 안드레와 및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ㅇ베드로 - 14-16절은 사도 명단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약에서는 네 곳에 나타난다(마
10:2-4;막 3:16-19;행 1:13). 베드로는 비록 맨 처음으로 예수께 부름받은 자는 아니
라 할지라도(요 1:42) 열 두 사도의 목록 중에서 항상 맨 앞에 나온다. 이것은 그가
사도들 중에서 인정된 수제자(首弟子)였기 때문일 것이다. 히브리 이름인 시몬은 그의
본명으로서 '듣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그를 제자로 삼으신 후 붙여주신
이름으로서 헬라어로 '반석'이라는 뜻이다. 또한 요 1:42에서 그에게 붙여진 '게바'라
는 이름은 아람어로서 역시 '베드로'라는 이름과 같은 의미를 나타낸다.
ㅇ그 형제 안드레 - 갈릴리 바닷가의 벳새다 출신의 어부로서(막 1:16-18;요 1:44)
세레요한의 제자가 되었다가(요 1:35,40)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즉시 그를 따르게 된
다(마 4:19,20). 그는 그의 형제 베드로보다 먼저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후 베드로를
주께로 인도한다(요 12:20-22).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주의 제자로서 보이지 않게 많은 일들을 했다(요 6:8,9;12:20-22;행 1:13,14). 안드레
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남자'라는 뜻이다.
ㅇ야고보와 요한 - 이들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던 세 제자 중의 두 명이다. 마가는 이
들에게 더 자세한 말을 덧붙여서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들'이라는 이름을 더했
다(막 3:17). 그러나 누가는 아무런 수식이 없이 이들을 소개하는데 그것은 이미 5:10
에서 그들을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로 언급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발꿈치를 잡음'의 뜻이고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이다.
ㅇ빌립 - 안드레나 시몬의 고향과 같은 벳새다 출신이다. 주를 처음 만난후 친구 나
다나엘을 주께 인도했던 자이다(요 1:45,46).
ㅇ바돌로매 - 히브리식으로는 '바르-탈매'인데 이는 돌로매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바돌로매는 요 1:46의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Herbert Lockyer) 일반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

15 마태와 도마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ㅇ마태 -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그는 '레위'로 소개되는데(5:27-29;막 2:13,14) 그
의미는 '연합하다'이다. 아마 예수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 히브리식 이름인 '레위'
에서 헬라식 이름인 '마태'로 바뀐 듯하다. 그러나 마태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사도로
택하신 예수의 은혜에 감사하고픈 심정에서인지 자신을 '세리 마태'로 숨김없이 표현
한다(마 9:9,10).
ㅇ도마 - 세 번에 걸쳐 이 이름 다음에 '디두모'라는 헬라식의 이름이 따라 나온다
(6:14-16;마 10:2-4;막 3:16-19). 이것은 당시에 헬라어를 사용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가 바로 이 '디두모'라는 이름으로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도마'는 히브리명으로
'쌍동이'라는 뜻이다.
ㅇ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여 '작은 야고보'로 불리운
다. 그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이름만 언급할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10:3;막
3:18). 다만 전설에 의하면 그가 페르시아에서 선교했다는것과 십자가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는 것만 전해질 뿐이다.
ㅇ셀롯이라 하는 시몬 -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구별하기 위하여 '가
나안 사람 시몬'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누가는 그를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했
다. 마태와 마가가 호칭한 '가나안 사람'이란 가나안 지방 출신의 시몬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열심인'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나'에서 유래한 형용사이다. 따라
서 누가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셀롯'이라는 헬라 명칭은 '열심당원'(Zealot)을
뜻하는데 시몬이 열심당원들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셀롯'이라는 이
한 마디 속에서 열심으로 불타는 열광적인 한 유대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열심당
은 유대의 반로마적 애국 집단으로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을 감
행 했었다. 이들은 살인과 방화를 일삼는가 하면 심지어는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곤 했
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몬은 이러한 무리들 가운데 속해 있었다고 한다
(Josephus, Antiq.,18,1,1;6;Wars,2,8,1).

16 및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및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ㅇ야고보의 아들 유다 -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Thaddaeus)라고 부른다. RSV에는 야
고보의 아들 유다(Judas the son of James), KJV에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Judas the
brother of James)라고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는 그의 말이나 활동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요한복음의 최후의 만찬석에서 가룟인 아닌 유다가 예수께 질문한 적이
있는데(요 14:22) 이 제자가 야고보의 아들 유다, 곧 다대오일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ㅇ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 가룟은 그가 태어난 마을 그리욧의 헬라어 형태
로서 '그리욧 사람'이란 뜻이다. 이 가룟이란 이름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여 졌
다(요 6:71;13:2,26). 그리욧은 '기럇'과 똑같은 말로서 기럇여아림에 있는 것임이 밝
혀졌다. 그중 하나가 모압에 있고(암 2:2) 다른 하나는 에돔 가까이 남동쪽 해변에 위
치한 유다에 있다(수 15:25). 그가 언제 어떻게 하여 제자가 되었는가는 성경 어디에
서도 언급이 없다. 그는 공관복음의 열 두 사도의 명단에 맨 나중에 돈궤를 맡은 자로
서(요 12:6) 신뢰와 신망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마귀가 그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를 팔 생각을 갖도록 유혹했다(요 13:2). 결국 그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
유를 낭비한다고 항의(요 12:5)한 정의감을 내팽게 친 채 겨우 은 삼십을 받고 하나님
의 아들을 팔아넘겼다. 당시에 유다가 받은 은 삼십이란 기껏해야 짐승에게 받혀 죽은
노예의 몸값에 불과한 것이었다(출 21:32).

17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ㅇ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 '저희'는 이미 택하신 열 두 사도들뿐 아니라 그
외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까지 지칭한다. 밤이 맞도록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을 택하신
예수께서 계속해서 산에만 계실 수 없었다. 이제 택한 제자들과 '함께' 세상으로 나가
서 죄악에 빠진 영혼들을 구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셔야 했다.
ㅇ평지에 서시니 - 여기 언급된 '평지'는 마 5:1의 '산 위'(mountainside)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평지'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피 토푸 페디누'
는 반드시 저지(低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지
를 뜻하기도 한다. 누가의 기록은 예수께서 산 위의 높은 곳에서 기도하시고 12제자를
선택하신 뒤 산 아래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 오신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그리고 마태
의 기록은 사방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위를 향하여
올라간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일단의 두 일행이 산 언저리의 어느 한 평평한
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복음서간의 차이점은 해결될 수있다.
ㅇ유대 사방과...많은 백성도 있더라 -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5:1)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구절에서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다른 여러 곳에서 온 많은 백
성들을 말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평지에 멈추어서 가르치실 때 그 주위에 몇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 택하신 열 두 사도들, 그들 보다 좀 많은
제자들의 무리, 그리고 일반 군중들이었다. 백성들이 허다하게 몰려든 목적은 예수의
권능있는 말씀을 듣고 또 그의 치유능력을 보고자 함이었다. 한편 여기서 각 지방의
이름은 곧 팔레스틴 지역을 뜻한다.
ㅇ앞 페이지의 지도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치유 사역은 이스라엘은 물
론 이방 각처에서도 행해졌다. 여기서 '유대 지방'이라함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남쪽 지역 전체를 말하는 것이고 두로와 시돈은 갈릴리 동북쪽으로 베니게에 속한 항
구 도시이며 이방 지역이다. 따라서 팔레스틴 남.북부 지역을 언급함으로써 사방 각처
에서 예수의 말씀과 병고침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마
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요단강 건너 지방까지 언급함으로써 팔레
스틴 전지역을 서술적 형태로 표현해 의미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얻은지라

ㅇ더러운 귀신에게...고침을 얻은지라 - 누가는 귀신들린 자들과 단지 육체적인 질병
을 앓고 있던 자들을 구별한다.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더러운 귀
신에게'가 '고난받는'과 연결될 수 있고 둘째는 '고침을 얻은지라'와도 연결될 수 있
다. 여기에서 사용된 '고치다'(데라퓨오)는 예수의 기적적인 치유
를 말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서 서술적인 반복의 뜻을 나타내는 미완료 수동태
(에데라퓨온토)로 쓰였다. 본절과 19절에서 묘사된 바와 같
은 이적적 권능(power)과 고침(healing)에 관한 강조는 누가복음의 특징을 보여준다.
특히 이 기사는 평지 수훈 직전에 위치함으로써 그 가르침의 권위를 한층 더해주고 있
다.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 나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ㅇ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 예수의 치유 능력이 알려지게 되자 무리들은
예수를 만지기만이라도 하려고 모여들었다. 병자들은 예수의 권위와 능력에 압도되어
예수에게 감히 개인적인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청하지 못했다. 예수를 만짐으로 병
을 고치는 기사는 8:43-46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예수의 옷자락 자체에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만 예수께서 병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병자들이 예
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  빚어진 결과이
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께 몰려온 병자들의 무리 개개인이 예수를 통해 병이 나을수
있다는 믿음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수를 만진 병자들이 나음을 얻은 것은 그들을 불쌍히 보신 예수의 주권적인 은혜를
시사한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ㅇ눈을 들어 - 이같은 표현은 마 5:2의 '입을 열어'라는 말과 비교된다. 두 복음서
모두 어떤 한 행동을 취하기 전 예비 동작을 갖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예비동작의 표현은 그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있게 전달해 주며 동작의 주체자의
의지적이고 결단력있는 모습이나 엄숙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ㅇ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의 평행 구절에서는 '가난한 자' 앞에 '심령이'라
는 말을 덧붙인다(마 5:3). 두 복음서 간의 표현상의 차이점에 대해 여러 가지 구구한
해석들이 있다. 그러나 설령 두 복음서의 표현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한다 해도 두
표현 간의 의미상에 큰 변화는 없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이든 영적으로 가난한 자이
든 그들은 항상 예수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또 항상 예수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들
의 가난의 문제는 하늘의 복으로만 영원히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실제로
예수 앞에 몰려온 자들을 보면, 부자들과 권세가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문자 그대로
빈곤한자요 병약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특히 누가는 이러한 사회적 소외층들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이 의도하는 바는 물질적으
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이 복되다는 것이 아니다. 이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
는 한시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앞에 의지하는 자들이 복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난한'을 나타내는 헬라어 '프토코스'는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한다. 특히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경제적인 면에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사람들로서 압제를 당한다해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자들을 가리키고 때때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압박을 당하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
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외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경건한 사람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
로 묘사된다(단 4:27). 따라서 여기서 나타난 '가난한 자'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아갈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또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경건한 사람들'
을 의미하기도 한다.
ㅇ하나님의 나라가 - 마태복음 평행 구절의 '천국'이라는 표현과 비교되는데 그 뜻에
는 차이가 없다. 다만 마태복음은 유대인 독자를 향해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하나님'
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는것을 꺼려하여 '천국'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나
라'(바실레이아)란 구약의 용어로는 '말쿠트'인데
이 말은 본래 왕의 지위, 왕의 권위, 왕이 행사하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예
수는 이 단어를 '바로 지금 이곳'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나타내는
말로 자주 사용하셨다(마 6:10;10:7;12:28).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표현한 바에 의하
면 이 말은 현재적이며 또한 미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통치는 믿음이 수반
되는 곳에 '바로 지금'임할 뿐 아니라 장차 주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그 통치가
절정에 이르러 마침내 그 나라가 완성될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관한 보다 상세한 내용
은 막 1:15 주제 강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참조하기 바란다.
ㅇ너희 것임이요 - '너희 것이 될 것이요'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것이라'고 하심
으로써 가난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된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들
은 '이미'(already)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not yet)은 완
성되지 못한 축복의 영역 가운데서 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이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때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될 것이다.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ㅇ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은 이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표현하여 영적 의미를 강조한다. '주린'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논테스'
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어 일시적인 주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리
고 있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낸다. 따라서 영적인 것에 항상 주려있는 사람들은 하나
님의 자비와 죄 용서를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이러할 때 주
려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채워주실 것이다.
ㅇ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 육체적 주림이 해결된다 해서 영적인 주림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영혼의 주림이다. 육체적 주림은 이 땅에서 음식물로
서 배가 부를 수가 있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
다. 이러한 영혼의 기갈 상태에 관하여 아모스 선지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대언한 바 있다(암
8:11). '배부름을 얻다'는 것은 능동적인 획득의 의미가 아니라 미래  수동태로 쓰인
것으로 주님의 주도적인 은혜에 의해서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ㅇ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클라이오'('울다')는 통곡하는 것을 말한
다. 여기에도 현재 분사로서 지속적인 상태를 암시한다. 마태는 이를 '애통하는'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는 마음으로 주 앞에 나와야  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죄인인 것을 통회하는 마음을 꿀임없이 유지해야 할 것을 한다.
ㅇ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 마태는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했다. 여기에
서의 웃음은 영적인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천국의 특성을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규정한 것과 비교해 보라(롬 14:17).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ㅇ인자를 위하여 - '인자'(투 휘우 투 안
드로푸)는 본서 중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예수의 칭호이다. 이 말은 예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반적인 칭호였다(9:26;11:30;17:2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
면서 사람의 아들(인자)이셨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라는 의미로
'너희가 나를 인자 메시야로 믿고, 나를 고백하고, 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의 제자들
로서 나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마태는 이 문구를 '나를 인하여'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이 칭호와 관련되는 의미를 상세히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인
자'라는 칭호를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것은 그의 신인적(神人的) 본질에 대
한 중요한 시사이다. (1)인자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의미한다(19:10;마 9:6). 예수
가 그의 메시야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17:24;18:8), 당시의 유대
인들은 이 말을 정치적, 군사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므로 이 말을 당신께 적용하기를
삼가셨다. (2)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인자란 말과 연결된다. 인자는 인간의 형체를 띠고
하늘로부터 지상으로 오셨으며, 동시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의 신인적인
성육신의 본성은 그의 사역 활동의 목적과 성격을 반영한다. (3)인자는 그리스도가 온
전히 구원의 승리를 거두신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용어이다(요 3:14). 그리스도의 죽음
은 신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의 부활 및 승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와 같이 대속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으로서의 승천에 있어서 그리
스도의 구속 사업이 완전히 승리하실 것을 미리 예견하기 위해 예수는 인자의 십자가
고난을 말씀하셨다. (4)인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Lordship)을 나타낸다(막
14:62).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은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부탁의 말씀과 사도행전
1:8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서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5)인자는 무엇보다도 예
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자 되심을 의미한다(마 13:41,42;19:28). 그리스도는 만민
의 재판관으로 군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육신을 통해서 모든 인간과 동등하
게 되었으면서 여전히 신성을 간직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ㅇ너희를 미워하며...버릴 때에는 -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순교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곧 피로 얼룩진 역사라 할 수 있다. 이 박해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리스도께서 다시 오실때까지 이 박해는 계속 있을 것이라고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신
바이다. 이 박해는 참 신앙인과 거짓 신자를 구별 지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리
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연단을 가져다 주고 믿음의 인내를 가르쳐 준다. 사도행전의 역
사나 교회의 역사를 보면 박해가 있을 때 교회는 내적으로 충실했고, 선교는 더욱 활
발했다. 따라서 박해를 이기고 난 뒤의 결과는 영광과 기쁨의 승리인 것이다. 한편 여
기서 '멀리하다'(아포리조)는 '경계를  구분하다'는  의미인데 이
말은 사회적 교제 관계에서 소외되는 것을 나타내었다. 또한 '버리다'(에크발로)는 연
극 배우를 무대에서 쫓아내는 것에 대해 사용한 단어이다. 따라서 그리
스도의 제자들이 악하다 하여 버림을 당한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종종 있었듯이 경
멸과 조소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투옥이나 재판, 사형에까지 이르도록 버림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ㅇ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 마태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 반면에 여기서는
'뛰놀라'로 되어서 더 적극적이고 격렬한 태도를 암시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앞절
의 박해와 고난을 당할 바로 그때에 기뻐하고 뛰놀라는 의미이다. 이는 주님 때문에
받는 박해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큰가를 극적(dramatic)으로 나타내는 표현이다.
ㅇ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 박해를 받는 자들의 고난은 헛된 것이 아니다. 하나
님께서는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히 기억하고 계신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큰상
이 예비되어 있다. '하늘에서의 큰 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천국에 참예
함'을 의미한다(마 5:10 주석 참조). 여기서 예수께서 '하늘의 큰 상'을 말씀하신 것
은 박해를 피해가거나 박해로 인해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주를 배반하지 말것을 격려하
시기 위함이다. 그런데 박해 만큼이나 사람들을 믿음에서 돌아서게 하는 것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명예나 물질을 위해서 일하지 말
고 장차 그들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축복 곧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일할 것을 요구하
신다. 이처럼 살기 힘든 세상에서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끝까지
인내하는 자에게는 하늘 나라가 큰 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24 그러나 화 있을찐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ㅇ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 여기서 '부요한 자'는 20절의 '가난한 자'의 반대
개념으로서 등장한다. 본문의 의미가 이 땅의 모든 부자들이 화를 당할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상징적 의미로서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신뢰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으며 자
신만을 신뢰하고 자만하며, 자신들의 교육, 학문, 지혜만 자랑한다. 더욱이 이들은 마
음이 심히 완악하고 강퍅하여 그리스도의 경고의 메시지에 귀기울일줄 모르며 하나님
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기업이 없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육신의 정
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삶의 모든 의미를 두고 허탄한 일만 일삼는다. 따
라서 이들에게는 심판 때에 돌이킬 수 없는 큰 화 곧 하나님의 영원한 사망의 형벌이
임하게 될 것이다.
ㅇ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 부요한 자들은 미래의 영원한 축복 대신 현
재의 육신적 만족을 스스로 택하였고 더욱이 다른 사람을 착취한 대가로 이기적 욕구
를 충족시켰으므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음이 당연하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축복받은 자들과 잘 대조된다(23절). 여기서'받았도다'란 의미
의 원어 '아페코'는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또는 '완전하게 수령했다'
를 뜻하는 상업적 용어이다.

25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ㅇ배부른 자 - 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고 영혼의 굶주림을 외면
한채 재물을 방탕하게 사용하여 육체의 쾌락을 만족시키는데 급급하는 자들을 지칭한
다. 이는 21절의 '주린  자'와 대조가 된다.
ㅇ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 여기서 웃는 자의 웃음은 세상에 속한 것들
을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서 오는 육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심판 때 대가로 받을 울음은 영원한 것이되어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한편 이 '웃
는 자'는 21절의 셋째 축복 '우는자'와 대조된다. 이처럼 20절로부터  계속 묘사되는
일련의 역전(逆轉) 상황들은 죄악으로 가득한 이 세상과 인간의 완악한 본성에서 기인
하는 진리의 역설(paradox)을 선명하게 노출시킨다. 이와 같은 역전 상황 내지는 역설
의 논리는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를 테면, "자기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는 말씀이나(마 10:39)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는 말씀이 바로 그러하다(고후 6:10).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ㅇ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 일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달콤한 말로 비위를 맞
추는 자들을 칭찬하기 쉽다. 예로부터 거짓 선지자는 항상 그들의 간사한 행위를 인하
여 칭찬을 받지만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함으로써 핍박을 받아 왔다. 그러
나 거짓 선지자의 칭찬은 모두 일시적인 것이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빛가운
데 백일하에 드러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22절의 넷째 축복 '핍박을
받는 자'와 대조된다.
ㅇ저희 조상들이...하였느니라 - 본문에 대한 구체적 사례로서 이스라엘 왕 아합 당
시의 왕실 선지자들을 들 수 있다. 그들은 아합왕과 왕후 이세벨의 귀에 즐거운 거짓
예언을 일삼은 대가로 부를 누리며 칭찬을 들었다(왕상 18:19). 이 외에도 이스라엘은
달콤한 통치자와 예언으로써 일반 백성들의 눈을 멀게 하며 나아가 그들을 우상 숭배
에 빠뜨리는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예레미야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
은 거짓 선지자들을 책망하며 그들의 득세를 애통해 했다(렘 5:31). 예수께서도 이러
한 거짓 선지자들을 '양의 옷을 입은 이리'로 표현하며 경계하셨다(마 7:15).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ㅇ그러나(알라) - 원래 '알라'는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접속사로 쓰이나
여기서는 앞에서 나온 주제와 병행하는 다른 주제를 소개하는 연결사로 쓰인다. 본절
로부터 36절까지는 '원수에 대한 사랑'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 5:21-48에는 주님의
가르침 다섯가지가 연속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비하여 누가는 그 가운데서 한 가지
(마 5:43-48)를 택하여 이를 보다 확대시켜 상세히 기록하였다. 누가는 구약의 구체적
계명을 꼬집어 말하면서 예수의 교훈과 대조시키지는 않는다(마 5:42,44 비교). 단지
그는 적극적인 사랑의 계명을 직접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마태는 황금률(黃金
律)을 의도적으로 뒷쪽으로 옮겨 앞의 교훈들에 대한 결론적 요약의 형식으로 제시하
고 있으나(마 7:15) 누가는 자연스럽게 문맥을 따라 그것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한다
(31절).
ㅇ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재산, 지위 등에 상관 없이 그에게
참된 관심을 나타내고 먼저 사랑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이는 예수님의 교훈 중에 극치
를 나타내는 것이요 기독교의 가장 큰 교훈이다. 예수께서는 이를 몸소 실천 하심으로
써(23:24) 본을 보여 주셨다. 이 구절 하반부에서부터 30절까지는 사랑의 행위가 무엇
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롬 12:14-21). 평행 분문인 마 5:43-48은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의 차원 높은 새 계명들이 열거되는(마 5:21) 가운데 한 부분으로 등장한다. 반면
에 본문에는 앞 뒤의 연결이 다소 어색하지만, 앞의 내용이 완악한유대교인들 특히
유대교 지도자들에 대한 책망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비추어 본문은, 독선적 정
죄에 급급하였던 당시의 폐단을 염두에 두고 이해됨이 자연스럽다.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ㅇ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을 금하시며 오직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사면해 주는 권한만을 부여하셨다(요
20:23). 여기서 '저주하다'는 뜻의 헬라어 '카타라오마이'는
전치사 '카타'와 '소원', '간구'라는 뜻의 '아라'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며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진 말들을 가리킨다.
한편, 이 불가능해 보이는 숭고한 말씀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이다"하고 원수들을 용서하신 십자가상의 외침에서 문자 그대로
실천되었으며(23:34), 스데반의 순교시에도 생생히 증거되고 있다(행 7:60). 사실 예
수께서 죄있는 인간 세상에 성육신하신 것 자체가 바로 원수 사랑이었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이 놀라운 교훈을 인간의 합리적이고 산술적인 계산의 안목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억만 죄악으
로 말미암아 영벌에 처해질 인생이 예수의 대속으로 용서함 받아 영생에 이르게 되었
으므로, 성도는 도저히 갚을 길없는 큰 사랑의 빚을 예수께 지고 있는 셈이다. 이 사
실을 확신한다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원수 사랑의 도
(道)까지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ㅇ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 '뺨'에 해당하는 헬라어 '시아곤'은 턱
이나 턱뼈를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한 모욕의 행
동뿐 아니라 폭력적인 행위까지 포함된다.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단순히 참아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의 행위로 덮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행위를 의미하
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폭력은 그보다 더 큰 폭력을 부르며 그때까지 참아 왔던 모
든 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에 수반되는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한편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사
랑의 행위를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핍박에 직면하였을 때
가급적이면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지 자청하여 핍박의 소용돌
이 속으로 몸을 던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요 18:22,23;행 23:3).
ㅇ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 출 22:26과 신 24:13은 다른 사람
의 겉옷을 전당잡거나 압류한다면 그날 해가 지기전에 돌려보내도록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밤과 낮의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겉옷이 생필품으로서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의 역할을 하고 먼지가 많이 이는 낮에는 겉옷으로 걸치고 다녔기 때문
이다. 따라서 겉옷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추위 속에서의 굉장한 고통을 의미할 수도 있
다. 그러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때로 중요하게 여기는 겉옷을 전당잡히고 돈을 빌리기
도 하였다. 아울러 겉옷의 현물가치 때문에 노상 강도들은 겉옷을 걸친 사람들을 약탈
하는 수가 다반사였으며 심지어는 겉옷과 함께 속옷까지도 빼앗아 가는 사례가 심심찮
게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저항하거나 반항하지 말라고 말
씀하신다. 이 말씀의 배후에는 불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다른사람의 아픔과 불행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유익을 위해 고난을감내하며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건까지도 희생할 줄 아는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랑을 몸소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보여주셨다(23:34).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ㅇ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 이것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 사랑의 정신에서 주는 것을 의미한다(마 5:42). 왜냐하면 그리스
도의 계명은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도 없이 어리석은 맹목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시행되
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의도는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보상을 기대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라고 하는 것이다. 계산된 행동과 숨은 의도로서 다시 받을 것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처럼 주는것을 뜻한다.
잠언 기자는 이를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갈파한다
(잠 19:17).
ㅇ네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 본절 상반절의 내용과 비슷하지만
더 강화된 표현이 사용되었다. 즉 '구하는'에 비해 '가져가는'은 보다 강압적 분위기
를 느끼게 하며, '주며'보다는 '다시 달라지 말며'라는 말이 한층 사랑의 밀도를 더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강도의 폭행을 방관하라거나 절도자의 손을 제지하지 말
라는 의미로 이러한 말씀들을 하시지는 않았다. 다만 물질의 손실이나 이해 타산에 급
급한 나머지 정작 소중한 영혼에 타격을 입히지 않을까를 우려하시며, 더 적극적으로
는 궁핍한 처지에 있는 자들을 헌신적으로 구제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들을 반복하신것
이다.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ㅇ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른바 황금률(黃金律)로
서 기독교 윤리의 적극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주석은 이 황금률이 원래 예수
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랍비 힐렐(Hillel)이 이미 사용한 규범을 예수께서 사용하
여 강조한 것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B.C. 5세기 후반 헬레니즘 세계에서 소피스
트 운동의 결과로써 이와 유사한 교훈들이 생겨났다. 예컨대 유대의 저명한 랍비인 힐
렐(Hillel)은 '네가 싫어하는것은 타인에게도 행치 말라'고 하였고 헬라의 스토아 철
인(哲人)들은 '네게 해주기를 원하지 않는 일이면 다른 사람에게도 행치 말라'고 했
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부정적이고 소극
적인 측면에서의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이 같은 교훈들이 예수의 황금률에 영향을 끼
쳤다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사람들의 교훈이 당시 사회
의 윤리적 기초가 되었으나 그것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이고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올
리신 분은 바로 예수이시다. 그런데 예수의 말씀 중 황금률만 따로 떼어서 이해할 것
이 아니라 이 황금률을 '이웃을 사랑하며,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예수의 교훈은 보편 윤리적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한차원 더 앞선 무조건적인 희생의 사랑이 담긴데에 그 독창성과 특징이 있다.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ㅇ너희가 만일...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 마태는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 5:46)라
고 말한다. 마태가 의미하는 '상'(미스도스)은 그들 자신의 일이나 고
생에 의해 얻어지는 상이 아니라 무조건적 은혜로 주어지는 상을 말한다. 본문의 '칭
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 또한 '은혜' 혹은 '선물'의 뜻으로 자
주 쓰인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무조건적인 은혜를 암시한다. 결국 이제껏 언급된
차원높은 새 교훈들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의 은혜에 근거하여 실행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소위
탈리오의 법칙을 율법의 정신으로 받들고 있었으나 예수는 인과 응보적 보복의 차원을
넘은 희생과 사랑의 온전한 모랄(moral)을 제시하신 것이다.
ㅇ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 '죄인 들도'(카이 호이하마르톨로이)란 '그
죄인들 조차도'란  뜻이다. 마태는 '세리'(마
5:46)라고 말한다. 여기서 죄인이란 이방인들(5:47)과 세리(5:46) 그리고 창기와 기타
당시에 죄인 취급을 받았던 소외된 모든 계층을 의미한다. 이처럼 버림받은 사람들 조
차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면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미워하고 핍박
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말이다.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ㅇ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 이 구절은 앞절(32절)의 반복으로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제시한다. 이 죄악된 세상에서는 심지어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
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처세에 급급한 나머지 기껏해야 '주는
만큼 받는'(give and take)식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개도 주인을 보면 꼬리를
흔든다'는 우리나라 속담도 있듯이, 그러한 단계는 그리 수준 높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자연인으로서의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야 할 위치에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할 능력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ㅇ너희가 받기를 바라고...무엇이뇨 - '빌리다'(다네이조)는 상업
적인 거래에서 이윤을 목적하고 빌려준다는 뜻이다. 따라서 '받기를 바라는'것은 대부
(貸付)의 이자를 포함한 최종적인 총액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리대
금업자처럼 이윤 목적으로 남에게 무엇인가를 빌려주는 자는 결국은 자신의 치부를 위
한 것이므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남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예수의 의도
는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남에게 무엇을 주는 행위지만 그러나  그것을 되돌려
받기를 바라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ㅇ의수히 받고자 하여 - 문자적으로는 '똑같이 돌려받기 위해'란 뜻이며 계산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론 빌려준것을 다시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반드시 돌려 받을 것을 전제하고 빌려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ㅇ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 다시 27절의 원래적 명령으로 돌아가 원수 사
랑의 계명을 반복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여기서 '원수'를 나타내는 헬라어 '에크드로
스'는 '증오'를 의미한다. 구약성경(70인역)에서는 이 단어를 우상 숭
배자들이나 계약 관계를 깨뜨린 자들에 대한 증오를 나타낼 때 사용했다. 신약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적들을 나타내게 되었다. 어쨌든 여기서는 그들이 설사 계약 관계를 위
반하였든 개인적인 해를 끼쳤든 간에 그들을 정죄하거나 재판한다 하더라도 그 행위가
사랑의 행위여야지 단순한 보복의 동기에서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사
랑'을 나타내는 헬라어 '아가파오'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을 나타
내는 말이다. 물론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것을 나타내지만 이 사랑
은 이웃에 대한 사랑까지도 수반된다(마 22:39). 아울러 이웃에 대한 사랑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도 분명히 포함된다(마 5:43-44). 따라서 이 '아가파오'의 사랑은 관념적이
고 추상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을 요구하게 된다. 즉 자
신의 불이익이나 고난과 어려움을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감당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이며 그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이다.
ㅇ바라지 말고 - KJV는 "아무 것도 다시 되돌려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고"(hoping
for nothing again)라고 번역한다. 이 부분에 대해 여러 번역본상의 차이들이 있으나
KJV의 번역이 가장 적절한 듯 하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빌려주든 무조건적
으로 줄 것이며 다시 받을 것을 기대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ㅇ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 '지극히 높으신 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다. 1:32에서 이미 예수님을 가리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칭
한 바 있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차원 높은 사랑을 할 때 얻는 상은 곧 하나님의 아들
이 되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이'라는 누가의 표현에 비해 마태는 '하늘에 계신 너
희 아버지'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마 5:45). 이는 둘다 절대적인 권위(authority)
와 지존(majesty)의 개념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ㅇ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 마태는 '온전'이란 말을 사용하지만(마 5:48) 누가
는 그대신에 '자비'로 바꾸었다. 그 이유는 누가는 글을 읽을 자가 율법에 능한 유대
인(바리새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하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은혜를 모르는 원수에게까지 자비를 베푸신다. 그것이 곧 '온전'일 것이다.
ㅇ너희도 자비하라 - 이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과 동일
한 것으로 이 말 속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 (1)이 명령은 죄인인 인간
의 절망을 시사한다. 인간이 아무리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처럼
온전해질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2)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이
시행될 수있음을 뜻한다. 이 고차적인 명령을 스스로 지키려고 하면 인간은 누구나 절
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대신하여 이 모든 계명을 완수하신 예수께서 우리속
에 거하시면 그분의 인도와 간섭 그리고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3)성도의 신분과 위치가 실로 고귀함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성도들
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시며 그러한 교제를 위해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
을 성도들에게도 나누어 주사(히 2:11) 이른바 '신의 성품'에 참예케 하신다(벧후
1:4).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ㅇ27절의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이 28-35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듯이 36절의 자
비의 정신은 이제 본절과 38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먼저 '...말라'는
부정 명령이 두 차례 언급되며 이어 '...하라'는 적극적 명령이 또한 2회 나온다.
ㅇ비판치 말라 - 이말은 단순히 윤리적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바로 다
음 구절의 "정죄하지 말라"는 말이 암시해 주듯이 종교적으로 사람을 판단하여 정죄하
는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이 말은 합당한 의견을 제시하거나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참과 거짓 그리고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수있는 판단력을 강력히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만 편견을 가지고 무분별하
고 성급하게 의견을 제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판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리네테'
는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습관적인 비판 성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람을 보면 누구든 그를 비판하고 잘못을 찾아내어 정죄하려는 것을 나타낸다.
ㅇ정죄하지 말라 - 어떤 사람에 대하여 심판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예수의
가르침은 법정에서 재판을 하거나 선악을 구별하는 일 자체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자
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재판관으로 앉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
의 태도를 금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선악의 분별을 가져야 하지만 심판이나 판결은 오
직 하나님께 속한 고유 권한이다(롬 2:1,2;14:10;고전 4:3,4). 우리가 타인을 정죄하
거나 심판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 자신도 동일한 죄를 범할 가능성을 얼마든지 내포하
고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이
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며 친
히 원수를 갚지 말고 참되고 유일하신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롬 12:18,19).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ㅇ주라 - 이 명령형은 다른 사람들의 곤궁을 구제하기 위하여 공급할 수 있는 모든
선물을 주라는 뜻이며 또한 받기를 바라기 이전에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이것은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이 동사(디도미)는 요 3:16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에도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
는 것보다 복이있다"고 말씀하셨거니와(행 20:35), 그 이유는 서슴없이 베푼 모든 사
람들에게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영광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ㅇ후히 되어...주리라 - '후히 되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트론 칼론'
은 '분량', '척도'(메트론)라는 말과 '좋은'(칼로스)이라는 말의 합성어
로서 '좋은 분량으로 주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줄 수 있는 한 최대한
으로 준다는 의미이다. 즉 굵은 콩 사이로 작은 조나 깨를 섞듯이 조금도 빈틈없이 누
르고 흔들어서 채울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채워서 준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
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여 그 이상으로 임한다.
ㅇ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안티메트레데
세타이) - 이 단어는 '다시', '반복'을 나타내는 단어 '안티'와 '재다',
'측량하다'는 뜻의 단어 '메트레오'의 합성어로서 '다시 측정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해 주는가에 따라
그대로 받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ㅇ비유로 말씀하시되 - 누가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기록을 일상 생활에서 비롯된
네가지 짧은 비유로 끝맺는다. 주께서 이러한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지금까지 말씀
하신 내용들을 무리들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기 위함일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든지,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군중들에게 설교하든지, 서기관및 바리새파 사람들
과 논쟁하든지 간에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
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비유가 사태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할 수 있도록 도
와주지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는 수수께끼 같은
내용으로 가득차게  된다. 그러나 정직하고 착한 심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러한 수수께끼조차 환영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들이 A.D. 20-30년대 팔레스틴 변방의 생활 환경을 잘 밝혀준
다는 사실이다. 비유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 중 일부는 청중이 그 비유 속에
묘사되어 있는 상황에 이미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본장에 나타난 비유들에서
청중들은 모두 동전 하나를 잃는 일이(15:8-10) 어떻게 집을 발칵 뒤집어 놓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먼 나라로 자기의 행운을 찾아 떠난 방탕한 아들을
(15:11-32) 머리 속에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여리고 도로의 위험은(10:30) 그
소문이 자자했다.
ㅇ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 이 구절은 팔레스틴의 지형을 염두에 두고 말씀
하셨을 것이다. 그곳의 땅들은 바위들이 많고, 많이 패여서 소경이안전하게 보행을
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길을 소경이 또다른 소경을 인도한다면 어찌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 소경이 영적 소경을
인도하고 지도한다면 인도한 자는 물론 인도함을 받은 자까지 영혼의 멸망을 당하게
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소경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가리킨다. 이들은 빛되신
예수를 반대하였고, 빛보다 어두움을 택하였으며, 보지 못하면서도 교만하게 본다고
말하였다(요 3:19;9:40,41). 그리고 그들은 제자를 얻기 위해 사방 팔방으로 뛰어다니
지만 결국에는 그 제자를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고 말았다(마 23:15).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ㅇ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 마태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
10:24)라는 구절을 추가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말이, 핍박의 상황을 묘사하는 문맥
에서 사용되어, 제자들에게 닥칠 핍박이 예수께 닥친것보다 더 심할 수 있음을 상기시
키기 위해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절에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진 소경들이 바리새
인들을 가르킨 것이라면 지금 이 구절에서도 그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소경인 제자는 소경인 선생보다 못할 것이고 바
리새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은 여전히 그 거짓된 교훈의 틀에 속박당하고
말 뿐이라는 의미이다.
ㅇ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 선생의 가르침
을 온전히 좇게 된다면 그 선생과 똑같은 바리새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는 예수의 다른 의도, 즉 '나를 따르는 제자들은 이 사람보다는 달라
야 하지 않겠느냐, 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르침을 통하여 온전케 되어 나와
같이 되라'는 권고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생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의
수준에까지 이를 수는 없지만, 성도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범사에 자라가야 한
다(엡 4:15;골 1:18).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ㅇ어찌하여 형제의...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이 두 구절은 39, 40절과 연결되어
잘못된 선생들의 과오를 지적하는 말이다. '티'와 '들보'는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인간성의 모습을 나타낸 말이다. '티'(카르포스)는 원래 '조각'이란
뜻인데 조그마한 나무조각, 즉 '나무 부스러기'를 가리킨다. 이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가지셨던 목수 일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리고 들보는 건물의 서까래
로 쓰기에 적절한 무거운 목재를 가리킨다.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범죄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생활 속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실수나 잘못을 비판하는 거짓 선생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예수께서 작은 나무 부스러기와 커다란 들보의 관계로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
은 대개 다른 이의 잘못에 관심이 많으며 그것을 비난하고 흉봄으로써 쾌감을 느끼기
까지 한다. 그리고 한 단체의 개선이나 개혁을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개혁이 수
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을 냉철히 돌아보는 일에는 인색하다. 그래서
서로가 상대방을 비방하고 정죄함으로써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특히 당시 바
리새인들의 심각성은 그들 속에 들보가 박혀 있으면서도 전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진정한 개선이나 회개는 자신의 처한 형편을 직시하는 데서 비롯
되거니와 그들은 위선과 외식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하나님의 신령한 계시의 빛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ㅇ어찌하여(포스) - 이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사이다. 그래서 여
기서는 자신의 눈 속에는 들보, 즉 온갖 위선과 죄악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형제의 조
그마한 실수나 허물을 정죄하고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이다.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ㅇ못된 열매 맺는...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 가시적 결실, 곧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적 표현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나무는 사람들의 인격 혹은 마음을 묘사하며 열매
는 사람이 자신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방법, 즉 태도, 말, 행동을 의미한다. 이 비유
는 (1)사람의 영적상태는 자연스럽게 외적으로 나타남을 가르친다. 물론 당시 바리새
인과 같이 위선으로써 철저히 은폐하는 자들은 표리 부동(表裏不同)한 모습을 보이지
만 그들의 궁극적 관심사(예컨대, 재물욕, 명예욕 등)는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
다. 역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통해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
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향기'를 발한다(고후 2:15). (2)구체적 결실을 맺는 신앙이 되
어야함을 가르친다. 입으로만 온갖 경건과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냉담하다면 이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으며, 이런 나무는 찍혀 불붙은 아궁이
에 던져지게 된다(마 7:19).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ㅇ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 나무의 열매는 그 나무의 본질을 나타낸다.  이는
나무의 가치나 중요성이 그 열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나니'
(기노스케타이)란 본질적인 것까지 완전히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ㅇ가시나무에서...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 마태는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
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16)로 기록한다. 각 나무들에 열리는 열매들이 서
로 바뀌어져 열릴 수 없듯이 사람의 경우도 그 심령의 상태 대로 외적 행실이 드러나
게 마련임을 거듭 강조하는 말씀이다. 한편 본 비유는 당시 팔레스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에서 취해진 것이다. 즉 무화과나 포도를 재배하는 곳은 대개 가시 울타리로
둘러쳐져 있어 무화과나 포도 열매가 가시 덤불과 섞여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 되었던
것이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ㅇ마음의 쌓은 선에서 - 이 말은 문자적으로 '마음의 선한 보고(寶庫)로부터'라는 뜻
이다. 이는 마음이 선이나 악이 쌓이는 창고인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잠 4:23은 특별
히 마음을 지킬 것을 훈계하고 있다. 왜냐하면 마음은 성경에서 지(知), 의(意), 정
(情)을 포함한 인간의 정신적 생(生)의 근원으로 또 나아가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되는
인격의 가장 깊은 원천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신 20:14;시 27:8;잠 6:18). 말과 행실
은 마음의 창고에서 나오는 산물이다(마 12:34,35). 속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악한 것을
말하고 그것을 행하여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ㅇ본절로부터 49절까지는 평지 수훈 전체의 결론으로서, 참된 신자의 표는 번지르르
한 말이나 종교적인 의식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모든 가르침들을 실천에 옮
김으로써 나타난다고 가르친다.
ㅇ주여 주여 하면서도...행치 아니하느냐 - 마태는 '하늘에 계신 내아버지의 뜻을 행
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하였다(마 7:21). 본 구절은, 예수를 따라 다니면
서도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뿐 예수의 신령한 교훈을 깨달아 실천
에 옮기는 일에는 무관심하였던 많은 무리들을 염두에 두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넓게는 소위 외형상으로 종교 생활을 해나갈 뿐 실제적으로는 신앙의 결실을
맺지 않는 일부 맹목적 신자들 전체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며 수많은 권능을 행하기도 하고 선지자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맺어야 할 신앙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자들은 주의 재림시에 '도무지 알지 못하는'자
로서 제거되고 말 것이다(마 7:21-23 주석 참조).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ㅇ내게 나아와...행하는 자마다 - 본 구절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 동사가 제시되는데
곧 '나아와', '듣고', '행하는'이다. 이는 곧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원리를
순서대로 제시하는 것이다. (1)'나아와'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곧 그리스도를 개인
적으로 영접하는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예수께 나아와 그를 개인적으로 만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갖게 된다(요 1:12). (2)'듣고'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
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롬 10:17). (3)'행하는'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다(약 2:17).
이 세 가지 사항을 모두 지키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곧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요
선한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다.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ㅇ집을 짓되 깊이 파고 - 예수의 이 비유는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와 건축 양식을 매
우적절하게 사용하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건조한 지역으로서 일단 비가 왔다 하면
보통 사나운 폭풍을 동반하여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쏟아졌고 그로 인해 산에서 탁한
급류가 흘러내려 기초가 약한 건물들을 무너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따라서 집을
지을 때는 폭우가 쏟아져 흘러 내릴 때를 대비해 기초를 튼튼히 해야 했기 때문에 깊
이 파들어 가야 했다.
ㅇ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 지혜로운 건축자는 기초를 세우기 전에
반석까지 깊이 파들어가 그곳에다 기초를 세운다. 이 말이 바로 전체적인 요점이기도
하다. 예수께 나아와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의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다는 것이다. 주초를 반석 위에 튼튼하게 세운 집이 온갖 폭풍에도 잘 견
디어 내듯이, 예수의 말씀을 머리 속에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구체적 삶 가
운데 실천해 나감으로써 크고 작은 난관들을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를 축적하게 되며
결국에는 큰 환난에 처하더라도 꿋꿋이 신앙의 절개를 지킬수 있다는 말씀이다.

49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ㅇ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 이 구절에서의 두 동사 '듣다'와 '행하다'는 47절에 언
급된 세 동사와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 '나아와' 진정으로 그리스도와의 일
대일 만남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말씀을 듣는 일도 행하는 일도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암시한다. 또한 이 경우에 설령 예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흔한
윤리적 교훈 중의 하나정도로 여길 따름이며 그 속에 내포된 생명력있는 진리를 깨우
치지 못하므로 실천적 행동이 뒤따르지 못한다 할 수 있다.
ㅇ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 마태는 '모래 위에'라고 한다(마
7:26). 모래가 흙보다 더 나쁜 상태를 나타내긴 하지만 흙이라고 그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집이 주초 없이 지어졌다는 점에서는 둘 다 곧 무너지고 파괴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ㅇ탁류가 부딪히매...파괴됨이 심하니라 - 탁류가 흘러 내릴 때 '반석 위에 지은 집'
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너져 내릴 것임에 분명
하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구절로서 환난과 시련은 모든 사람에
게 임할 것이며 그때 믿음이 없고 견실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환난과 시련에 멸망하고
말 것을 나타낸다. 한편 여기서 '탁류'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시련과 궁
극적으로 맞게 될 마지막 시험을 의미한다(고전 3:11-15).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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