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마태복음

[스크랩] 마태복음 (24 : 1~51) 주석

예루살렘 선교회, 안디옥 선교회 2015. 2. 9. 08:17
마태복음 24장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ㅇ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 여기서 '성전'(히에론)은 문자적으로 성전
경내, 곧 거룩한 경내를 의미한다. 그리고 '나 와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
셀돈'은 제2과거 분사형을 취하고 있어 뒤이어 나오는 '가실 때에'(에포류에
토, 서술적 미완료 시상)보다 앞선 시제로 볼 수 있으나 전체 문맥상 두 행
동이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이미 떠나고 계셨으
며(여셀돈) 그렇게 나아가실 때 성전 건물 옆을 지나가셨다(에포류에토). 따
라서 1, 2절의 내용은 성전 뜰에서 나눈 대화로 볼 수 있다. 즉 21:23에 예
수께서 성전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언급되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성전을
'나왔다'함은 21:23 이후 행해진 모든 가르침은 줄곧 성전 뜰 안에서 행해졌
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7화(禍) 선포(23장)
직후 영영히 성전 밖으로 나와 그 곳을 떠나가셨다.
ㅇ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 평행구인 눅 21:5에서는 '제자'
가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킨 것으로 표현한다. 더구나 같은 평
행구인 막13:1에서는 '제자들 증 하나'라고 묘사하고 있다. 제자들이 성전을
가리켜 보인 것은 앞서 23:38에서 언급한 예수의 선언과 관계가 있다. 즉 당
시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그 웅장한 성전은 화려한 모습으로 많은 사람
들의 관심을 불러 있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선언한 성전의 '황폐와 버림 받음'에 대한 예언은(23:38)쉽게 믿어질 수 없
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성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정말 황폐하고 버림받게 됩니까? '라는 말없는 물음을 했을 것이다
(막 13:11).
ㅇ성전 건물들(타스 오이코 도마스 투 히에루). 이 성전 건물은 원래 B.C.
19년에 유대인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에돔 사람 헤롯대왕에(2:1) 의해 착공
된 것으로 비록 제 2성전을 개축할 의도로 시작한 것이기는 하나 거의 신축
한 것이기에 일반적으로 제 3성전이라고 불리운다. 즉 이 건물은 솔로몬에
의한 제 1 성전(왕상 6:1-8:11, B.C. 959-586)과 스룹바벨에 의한 제 2성전
(포로기 이후 B.C. 520년경에 재건)에 이은 새 성전 건물이었다. 이 제 3성
전은 A.D.63년경 알비누스(Albinus)총독에 의해 완공되기까지 근 80여년
의 기나긴 공사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그 중간에 봉헌식(착공 9년만에)을 하
는 등 나름대로는 화려(華麗)한 외모로 치장되기도 했다(요 2:20). 실로 제
3성전은 유대 출신 제자들에게는 자랑스럽고 장엄한 것이었으며 마치 눈덮인
산처럼 아름다움 것이었다(Jos, Wars 5, 6). 그도 그럴것이 이 성전은 거
대한 대리석으로 둘려졌으며 지붕과 같은 특별한 부분들에는 금으로 꾸며졌다
고 한다.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ㅇ대답하여 가라사대 - 새번역과 공동 번역 성서는 '말씀하셨다'로 이 부분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1절에서 질문 내용이 전혀 언급 되지 않았는데 '대답'하였
다고 한다면 적어도 1절 주석 마지막 부분의 내용과 같은 질문을 제자들이 던
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2절에서 답변하신 내용이 1절 주석 끝
부분에 가정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적절하다.
ㅇ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 예수께서는 지금 화려하고 장엄한 자태를 자
랑하는 성전 건물의 외형을 사실 그대로 긍정하셨다. 그리고 이같은 인정을
통해 뒤이어지는 당신의  경고를 더욱 강렬한 뉘앙스(nuance)로 대비시키
셨다. 한편 공동 번역 성서는 이러한 대비적 표현에 맞추어 '저 모든 건물을
잘 보아 두어라'는 말로  번역하고 있다.
ㅇ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 성전 건물에 사용된 돌을 가리킨다. 여기에
사용된 돌 하나의 크기는 25*12*8 규빗 (1 규빗은 약 45.6cm)의 상당히 큰 것
으로서 누가 복음에서는 '미석', 즉 '아름다운 돌'이라고 묘사한다(눅 21:5).
그런데 이러한 돌들이 돌위에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회복 불가능의
완벽한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서 구약에도 여러번 언급된 바 있다(렘 26:6,
18 ; 미 3:12 ; 학2:15). 그런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는 심판은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역사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는 A.D. 63년에 제 3성전이 완공된 후 겨우 7,8년 후의 일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성전의 허무함을 제시해 주고 있다. 한편 이렇게 성전 파괴에 대한 단호
한 표현을 통하여 24장에 소개될 종말에 관한 메시지의  긴박성과 그 파멸적
(破滅的)인 성격을 웅변적으로 암시해 주고 있다. 즉 이러한 언급을 통해 예
수께서는 당신의 재림과 세상 종말에 있을 극렬한 심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
으키시고 있다.

3 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ㅇ감람산 - 예수는 이 산에 올라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의 종말에 대한 예표라고 볼수 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ㅇ실제로는 종말의 징조가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미혹되어 잘
못된 위기 의식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다.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ㅇ실제로 야고보,베드로,바울 등은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 순교하였소 그 외의
사도들도 거의 순교하였다.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ㅇ시험에 빠져(스칸달리스데손타이)는 '걸려 넘어지게  하다', '죄를 짓게 하
다' 또는 '노하게하다' 등의 뜻을 가졌다. 새번역에서는 '믿음을 잃고'라고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신앙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결국 박해로 인해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살후 2:3). 이처럼 종말의 때가 가까워오면 교회의 외적인 풍랑과 더불어 교
회 내부로부터의 분란이 발생하게 될것이다. 이때는 인내와 믿음이 더욱 요구
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벧전 4:12).
ㅇ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새번역과 공동 번역 모두 '서로 배반
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교회 안에서 나타나는 공동체 분
열의 모습이다. 여기서 '서로'(알렐루스)는 상호대명사로서 쌍방간의 행위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서로 똑같이 배신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교회
공동체로부터 등을 돌린 사람들의 간교(奸巧)하고 악의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말로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구절이 뜻하는 바는 세상의 종말이 이르게 되면
사랑과 하나됨의 공동체인(요 15:17) 교회에서도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
실이다. 실로 이같은 교회 내부의 분란이야말로 성도가 맞는 가장 위험하고도
치명적인 징조이다.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ㅇ거짓 선지자(프슈도프로페타이) - 여기 이들은 비록 초자연적인 이적과 능
통한 언변(言辯)을 지녔을지라도 그 가르침과 행위가 진실에 입각하지 않은
자들이다(계 13:11 ff). 실로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주의는 예수와 사도들에
의해 여러 번 주어져 왔는데(7:15 ; 24:5 ;고후 11:13 ; 딤후 2:17, 18), 그
들 거짓 선지자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자들 등의 모습으로 교회의
질서와 진리를 와해시키는데 힘을 쏟았다(행 20:30 ;갈 1:7-9 ;골 2:18-23).
실로 기독교회사는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수없이 유린(蹂躪)당해 왔
으며 지금도 그들의 사특(邪慝)한 가르침으로 인해 많은 교회들이 중병을 앓
고 있다(살후 2:8-12).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ㅇ불법(아노미아) - 부도덕성과 무질서적인 방종을 가리키는 말로서 전통적
규범이나 윤리적 가치 기준이 상실됨을 말한다. 특히 본문에서는 진리와 신앙
이라는 미명 하의 온갖 비신앙적 작태(作態)와 방종과 타락을 가리킨다(살후
2:3, 7, 8). 한편 오늘날 이러한 부도덕적 사회 현상을 가리켜 '아노미현상'
이라고 지칭한다.
ㅇ사랑이 식어지리라 - 여기서 '식어지다'(프쉬게세타이)는 '숨쉬다', '싸늘
해지다'는 뜻의 '프쉬코'에서 나온 말로서 '싸늘한 숨을 쉬다'또는 '차가워지
다', 그리고 좀 더 심층적으로 '해로운 바람으로 인해 영적 열성이 식어지다'
(Vincent)등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이유는
'아노미 현상', 곧 불법으로 인한 내적인 불화와 균열(龜裂)때문이다. 실로
이 구절은 9-11절까지 나타난 교회분열로 인한 결과이며 결론이다. 결국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식어지면 8절의 내용처럼 세상의 끝날이 되는 것이다. 한편 본
문에서 언급된 '사랑'(아가페)이라는 명사는 공관 복음서에서는 눅 11:42과
여기서만 사용되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명된 데 비해 본문은 형제상호간의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차이점이
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성도가 추구해야만 하는 형제
사랑은 오직 하나님 사랑에 그 기초와 뿌리를 두어야 하는것이다(요일 4:10,
19). 그리고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 사랑의 확실한 발로인 것이다. 여하튼 모
든 율법, 모든 의식(儀式), 모든 성전의 화려함과 웅장함도 사랑이 식어지면
끝이 되고만다(고전 13장).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ㅇ끝까지 견디는 자 - 여기서의 '끝'은 5절부터 나열한 여러가지 재난과 박
해 그리고 공동체의 분열이 있을 고난의 기간이 끝날 때를 말한다. 그리고
'견디는'에 해당하는 원어 '휘포메이나스'는 '굳게 서다', '참아내다'는 뜻
으로 단순히 수동적으로 참는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자기의 내면적 신앙
과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끈기 있게 버텨나감으로써 끝내 승리, 쟁취한다는
의미이다. 실로 사람들의 배신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뢰하며 온갖 실
망이 겹쳐 절대 절망에 이르렀어도 희망을 갖고, '아노미 현상'과 같은 혼란
의 시대에도 주님의 뜻을 따라서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람이 곧 견디는 자이다.
ㅇ구원을 얻으리라 - 끝까지 견디는 자의 보상은 구원이다. 그런데 이 구원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세상의 끝날에 얻게 되는 천국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끝은 곧 세상의 완성이므
로 그때까지 견딘 자는 완성된 하늘나라에서 천국 백성의 자격을 갖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 이것은 종말적 심판의 때에 얻는 최종적 구원을 의미
한다.(2) 현세의 구원에 대한 의미도 생각할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
이 세상 끝에 나타날 종말적 징조는 예수 시대에도 이미 나타났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갖고 살았고, 또한 종말의 징조는 역
사 속에서 꾸준하게 나타났으며 오늘날에도 예수께서 지적했던 그런 징조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원은 종말적 최후의 날에만 이루어지는 것
이 아니라 날마다 현실적인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 더욱이 성도에게 매일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process)으로 볼 때 날마다 겪는 새로운 여러
가지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살아가는 것이 구원의 삶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매일 구원을 고대(苦待)하며 필요로 하는 자는 날
마다 종말적 자세로 사는 것이다.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ㅇ천국 복음(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 이는 마태복음의 특징적 표현이
다(4:23 ;갈9:35 ; 24:14). 여기서 '복음'이란  예수께서 지금 전파하고 계신
그 메시지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 하시기 위해 성육신하신
예수 자신을 지칭한다(요 1:14 ; 고후 5:18). 한편 복음의 요체는 '천국' 곧
모든 나라와 모든 인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이다(3:2 ; 4:23).
ㅇ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 혈통과 민족을 초월한 천국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보여 준다(고전 1:24). 여기서 '증거'(마르튀리온)란 신앙에의 부름을 위
한 유일한 근거이자 복음을 배척하는 자에게는 심판과 정죄의  근거가 되는 것이
다. 이것이 곧 복음 증거의 양면성이다.
ㅇ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 여기 '온 세상'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이라는 의미이다. 세상의 종말이 이 때, 곧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된 후에 올
것이라는 사상은 사도들이 계승한 사상이었고 신약 성경 안에서 여러 차례 언급
된 바 있다(눅 4:5 ; 행 11:28 ; 17: 6, 31 ; 19:27 ; 롬 10:18 ; 계 3:10 ; 12
:9 ; 16:14). 한편 당시 '온 세상'을 로마 제국 안에 있는 영역으로 보는 경향
이 있었다(행 1:8 ; 롬 15;23). 그러나 본문에서의 '온 세상'이란 좀 더 포괄적
이고 광의적(廣義的)인 의미로서 지구상에 있는 모든 지역, 곧 전세계의 모든
곳이라는 뜻으로 봄이 좋다. 어쨌든 다른 민족들에게도 이 천국 복음이 전파되
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세상의 끝'이라는 말은 세상의 심판과 멸
망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세상의 완성이라는 말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8절, 13
절 주석 참조). 실로 세상이 완성되는 날, 그날은 모든 민족이 완성된 새 하늘
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세상의 끝은 절망
의 상징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무한한
기대가 된다.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ㅇ다니엘의 말한 바 - 본문은 단 9:27 ; 11:31 ; 12:11의 70인역(LXX)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인용이다.
ㅇ멸망의 가증(可憎)한 것 - 이는 단 11:31 ; 12:11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그
내용은 여호와 경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사를 폐하고 우상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즉 성전을 더럽히겠다는 말이다. 특히 구약적 관점에서 '가증한 것'은 여호와
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신성 모독과 연관된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의미의 헬
라어는 '브델뤼쏘마이'로서 원뜻은 '악취로 인해 구토를 일으키다', '혐오스럽
다'이다. 실로 하나님께 우상과 거짓 사술 등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 아
닐 수 없다. 그리고 '멸망의'란 '멸망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이란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 다니엘서의 이 말은 분명 .B.C.168년에 수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의 상을 세우고
그 제단에 부정하게 취급되는 돼지를 제물로 바쳤던 사실을 의미한다(마카비
서 1; 54-64, Josephus, Antiq., 5:4). 예수께서는 바로 이러한 예언을 통해
위와 비슷한 모습으로 거룩한 곳이 황폐되고 치욕당할 것이라 하셨다. 이런
사실로 인해 (1) 혹자는 로마의 통치자 가이우스 갈리굴라(Caligula) 황제(A.
D.37-41년)가 그의  상(상)과  기(기)를 성전에 세우려 했던 계획을 본 예언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게획과 예수가 말씀하신 내용과는 잘 조화가 되지
않는다. (2)또다른 학자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 군대와 연관시켜 이해하
고있다(눅 21:21, Bengel, Bruce). 사실 로마 황제의 가슴 위에는 은이나
청동으로 된 한 마리의 독수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군대는 바로 그같은 독
수리 깃발을 앞세우고 전선에 나아갔고, 그의 경배와 동일한 차원의 경의를 그
기에 표해야 했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Josephus, B.F. 6) A.
D.70년. 예루살렘을 훼파(毁破) 로마 장군 디도(Titus)가 로마군기를 성전 동
편 문쪽을 향해  세우고 거기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미
수년간 로마 군대의 기를 보아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것이 일말(一抹)의
새로운 징조가 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의 예언과 본 견해를 연관시키기에
는 부적절한 점이 있다. (3) 그리고 어떤 학자는 A.D.70년 이전 열심 당원들
(Zealots)이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힌 사건과 관련시키고 있다(Alford). 
그 당시 열심 당원들은 대제사장을 살해하고 매일의 제사를 훼방했으며,합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제사장을 임명하였(Jos. Wars 147-57, 162-92, 334-44).
요세푸스는 그들의 만행(蠻行)이 바로 예루살롑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단
정하고 있다. 한편 당시 그들의 만행 동안 예루살렘 주민들은 그 곳을 달아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Lane, Gaston). 그러나 이 견해 역
시 확정적으로 인정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믿을만한 한 전승에 따르면 그리
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남으로써 처참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어쨌든 예수의 예언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바는 아니
나 '가증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명확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적어도 이 내
용이 갖는 의미는 앞에서 언급한(9-12절) 교회 분열의 혼란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때 신앙의 중심이요 하나님의 전(殿)인 인간의 내면을 공격하며 파괴
하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의 활동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살후 2:4, 8).
ㅇ거룩한 곳(토포하기오) - 앞의 내용을 미루어 보아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한
다고 볼 수 있다(사 6013 ; 2 Macc 1:29 ; 2:18). 그러나 본문에는 정관사
가 없는 관계로 단순히 한 성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 회당까지도 포
함한 신앙의 중심지들로 보기도 한다.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都城)인 예
루살렘으로 볼 수도 있으며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신앙인의 마음속이 될 수도 있다. 그곳에 우상을 세우게 된다면
그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될 것이다. 한편 평행구를 이루는 눅 21:20에는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표
현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대신 거룩한 성전에 대한
유린을 멸망과 연결시킨다.
ㅇ읽는 자는 깨달을 진저 -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읽는 것의 진정한 의
미를 깨달으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나, 즉 예수께서는 다니엘의 예언과
역사에 대한 당신의 자의적 해석을 조화시키고자 하셨으며, 더불어 당신이 예
언한 바를 어떤 영적 긴장과 분별력이 없이는 도무지 감지(感知)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한편 본문은 후대 편집자들이 첨가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
나 그 보다는 다니엘을 향한 천사의 고지(告知), 즉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단 9:25 ; 12:10)는 말처럼 예수께서 친히 경고적, 교훈적 메시지
로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ㅇ유대에 있는 자들은 - 닥쳐올 재난이 단지 예루살렘에만 국한(局限)되는
것이 아니라 유대 지경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을 암시한 구절이다.
ㅇ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유대인들에게는 산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즉 그
들은 산을 하나님의 보호와 도움의 근원지로 생각하였다(시 11:1). 또한 구
약시대 때 십계명을 받은곳도 산이었고(출 19:1-2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도 산이었다(출 3:1-12). 그리고 예수의 핵심 설교인 산상 수훈도 역시 산
에서 이루어졌다(5-7장), 지금 종말에 관한 설교를 하는 곳도 바로 산이다.
따라서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산과 하나님과의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일반적
통념이 반영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여하튼 이 경고에 의해 초대 교회 성도
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보존한 적이 있다. 즉 A.D.68년 로마의 베스파시안
(Vespasian)장군이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성내(城內)에 거주하던 그리
스도인들은 예수의 경고를 기억하고 모두 요단강 계곡에 위치한 베레아 지역
의 펠라(Pella)라는 곳으로 피신함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Euesebius,
H.E. 5:3). 한편 본문의 이와같은 의미를 신앙적으로 재해석하면 거룩한 곳
이 더럽혀지고 성전이 유린 당했을 때, 즉 신앙의 위기가 왔을 때 속히 하
나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임을 알게
한다. 따라서 도망은 비겁한 모습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가고 하
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ㅇ지비 위에 있는 자는 -  유대인들의 가옥은 대부분 지붕이 평평하여, 주로
기온이 서늘한 저녁 시간에 휴식과 묵상과 대화의 장(場)으로 활용되었다(신
22:8 ; 막 2:4 행 10:9). 그리고 이 지붕에는 지상과 연결된 두 통로가 있었
는데, 그하나는 지붕에서 집 외부로 바로 연결되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
붕에서 그 집 내부와  연결되어 있다.
ㅇ집 안에...내려가지말며 - 이는 재난을 만난 사람이 취할 태도로서 결코
집 안 귀중품에 미련을 두지 말고 먼저 천하보다 귀한 생명부터 보존하라는
교훈이다. 사실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만 해도 각종 난리와 폭란이 겹쳤는데
(6절), 이때 민첩한 도피가 필요했었다고 한다. 적어도 재난을 만난 자는 롯
의 처를 생각해야만 한다(창 19:26 ; 눅 17:32)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ㅇ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거처가 있
는 성에서 조금 떨어진 성 밖에 마련하였다. 그리고 일터에 나갈 때는 두터운
외투는 집 안에 두고 활동하기 좋은 가벼운 의복으로 나섰다고 한다. 재난의
때에는 그 겉옷을 취하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입고 있는 그대로 재빨리
피신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말을 맞는 자세는
매우 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급박(急迫)한 것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
나 과거에 대한 미련이 있어서는 안된다. 구원을 향한 단호한 결단만이 요구
될 뿐이다. 악으로부터의 확연한 갈라섬, 비신앙에서 돈독한 신앙으로 돌아서
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ㅇ아이 배 자들(가스트리 에쿠사이스) - 여기서 '가스트리'는 배를 나타내기
도 하고 자궁(Womb)을 뜻하기도 한다(1:8, 23 ; 막 13:17 ; 눅 1:31 ; 21:23
; 살전 5:3 ; 막 13:17 ;눅 1:31 ; 21:23 ;살전 5:3 ; 계 12:2).그리고 '여
쿠사이스'는 '소유', '보관', '결혼', '사랑의 소유', '즐긴다', '필요하다'
'궁핍하다' 등 여러 뜻을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자궁'이라는 단어와 연결하
여 '임신하다'는 말로 사용되었다(1:18, 23 ; 눅 21:23 ; 계 12:2 등).실로
임신한 사람과 아기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이는 홀몸이 아니다. 즉 자신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서 자신의 구원에 몰두하기 어렵다. 그래서 남보다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확연하다. 이는 여자에 대한 저주도, 임신부와
어린 아이를 키우는 어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날의 고통이 남을
돌볼 만큼 여유있게 대처할 만한 것이 못되기에 미리 미리 종말의 때에 대비
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그날이 오면 민첩하게 구원의 일에
몰두하도록 하기 위해 준비를 할 것이며, 다른일로 인하여 자신의 구원을 잃
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편 A.D. 8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 미
처 도피하지 못한 유아와 어머니들이 예루살렘을 가득 메웠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아사자(餓死者)와 고통받는 자가 수없이 많았다고 전한다(Jos, Wars
V 10:3).
ㅇ화가있으리로다 - 여기서의 '화가 있으리로다'라는 표현은 저주 선언이 아
니라 동정을 표시하는 탄식문이다. 즉 '아 ! 안되었도다'라는 뜻으로 쓰이거
나 또는 '오! 슬프도다'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도 한다. 본래 '우아이'라는 뜻
은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새번역에서는 '화를 입을 것이다'로 번역되어
있고, 공동 번역에서는 '불쾌하다'로 번역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의 표현이 더
적절하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ㅇ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 겨울과 안식일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활
동하는데 가장 어려운 때이다. 즉 겨울에는 비가 오는 계절이라서 땅이 질
식량 확보도 어려워 유대인들에게는 취약(脆弱)한 계절이다. 또 안식일에는
종교적 행사에 주력해야 했으며, 율법적으로 1.8Km이상 이동하는 것이 금지
되었기 때문에 산으로 오른다거나 피신하는 행위는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다.
한편 이 경고로 미루어보아 안식일을 그 당시에 철저히 준수한 것으로 보인
다. 예수께서도 바로 이러한 때에 환란날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권면을
하신다. 역사적으로 볼 때 B.C 168년 수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침
공이 있던 날도 안식일이어서 유대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살육을 당했던 적
이 있었다.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ㅇ이는...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 본절은 '이는'(가르, '왜냐하면')이라는 단어
를 사용하여 17-20절에 걸쳐 피난하라고 권면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여
기 제시된 '환란'(둘립시스)은 단 다니엘의 내용과도 비슷한 점이 있다. 즉 다
니엘은 '건국이래로 없었던 환난'이라고 표현한 것에 견주어 예수께서는 '창세
로부터 지금까지 전무 후무한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이것은 피상
적 예고가 아니라 역사롤를 통해 밝혀진 진실이었다.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
(Josephus)는 예루살렘의 함락(陷落)에 관한 보고에서 예루살렘  함락 당시 유
월절 절기에 참석키 위해 수많은 민중이 그 성내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로마군
침략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110만명,포로가 9만 7천여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
(Wars 9:3). 그에 덧붙여 그곳이 각종 질병과 기근(饑饉)으로 고통당할 뿐 아니
라 진쟁의 참화로 너무나 참혹하여 장례식도 치릍 수 없었고, 심지어는 자기 자
식을 잡아먹는 여인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끔찍한 참변(慘變)은
미래의 역사에 도래할 마지막 대환난의  전조(前兆)이자 예표가 된다(계 11:3,
11 ; 12:6, 14).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ㅇ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 '그날들' 앞에 나열한 환난의 날에 겪게
될 고난의 기간을 말한다. 그리고 '감하지'에 해당하는 원어 '에콜로보데산'은
'지다'는 뜻인 '콜로보오'의 제 2조건문으로서 비록 미래와 시점에 와 있으나
이미 성취된 것이나 마찬가지의 특질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이는 자비와 긍휼
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품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고통의 양을 큰 묶음으로
줄여 주실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한 공동 번역의 해석은 '하나님께서
그 고생의 기간을 줄여 주시지 않는다면'이다. 여기서 그 환난의 날에 대한 주
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한편 마지막 날에 준비된 환난은
너무도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만약 그 환난의 기간을 줄이지 않는다면 모든 육
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여기서 '모든 육체'는 단지 예루살렘 뿐 아니라
전 인류로도 보아야 한다. 이는 예언의 이중성(현재, 미래)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공동  번역에서는 본문을 '살아 남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재난의 혹독성과 파괴성을 분명히 보여 준다.
ㅇ택하신 자들을 위하여...감하시리라 - 이 말은 '택하신 자들'을 위한 약속이
다. 그렇게 무서운 환난이지만 택하신 자들을 위해 그 환난은 유동적(流動的)
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약속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상기시킨다. 즉 의인 열명만 있어도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과 비슷하다(창 18:32). 한편 여기서 '택하신 자'(에클레크토스)란 '뽑혀진'
(chosen, selected)의 뜻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 모두를 뜻한다. 이는 단순한 혈통적 선민 사상에 기인한 것이 아
니라, 앞의 13절의 내용처럼 환난속에서 끝까지 견디며, 12절의 역설적인 의미
처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고 변치않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자들로 인해 비록 세상이 파멸로 달음질 칠지라도 다른 한편에서
는 세상이 도리어 완성과 완전한 구원쪽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구
원의 가능성에 대해 항상 개방적으로 약속하신다. 이 구절은 앞에서 교회의 파
괴를 말하면서 13절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기서도 세상
의 환난을 가장 무섭게 묘사하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따라서
이러한 환난의 예고는 멸망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세상의 완성, 하
나님 나라의 도래를 암시하는 희망의 예언이라고 볼 수있다.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ㅇ그 때에 - 이 말은 앞 내용과 직접 연결되어지나, 곧바로 무슨 사건이 발생할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처한 시점에 과연 어떤 징조가 나타날 것인
지를 소개하기 위한 서언적 표헌이다(Chrysdstom). 한편 여기서부터 35절까
지가 종말의 때에 일어날 제 현상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번째 묶음이다. 특별히
이 세째번 묶음은 예루살렘멸망이라는 지금까지의 초점에서 발전하여 세상 종말
이라는 큰 흐름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물론 예수의 예언은 항상 이중적(현재,
미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을 절대시할 수는 없다.
ㅇ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 환란의 때에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이 거짓 그리스도
의 출현이다(5절). 자칭 메시야가 '여기', '저기'에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에 재
난이 많을수록 더욱 기승(氣勝)을 부린다. 한편 본절은 5절의 표현과 약간의 차
이가있는데, 5절에서는 많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을 그리스도라 자칭하는 현상을
언급한 것인데 비해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이 소문에 의해서 여기저기
혼란스럽게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거짓 그리스도에게 안내하
는 자들의 무리가 많아질 것이며 그들의 발걸음이 바빠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러한 소문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를 찾아 산으로 계곡으로 모여들 것이나
실로 어리석은 사람들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자의적이 구원
개념과 유사한 절대자를 찾아 헤맬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의 재림으
로 모든 것을 밝히실 예수께서는 여기에 속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ㅇ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 여기서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지도자의 교활함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거짓 그리스도는 예수의 권위와 이름과
능력을 도용하여그 영광을 차지하려는자들이며(5절 참조), 거짓 선지자는 그릇된
영적 탁월성과 거짓 사술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에 권위를 더하는 자를 가리킨다
(7:15 참조). 이런 자들에게는 선택받은자들 조차도 속을 위험이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표적(標的)과 기사(奇事)를 통해 사람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적'
(세메이온) 말은 '표징', '표시'(sign), '증거', '상징'(indication), '전조'
'징조'(protent) 또는 '놀라운 일'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증
명하는 각종 이적을 가리킨다.또한 '기사'(테라스) 역시 '경이', '놀라운 일'등
의 뜻으로 '표적'과 거의 흡사한 의미이나 '표적'이 주로 인간과 관계된 외형적
증거라면 '기사'는 주로 자연 만물과 관계된 내면적 능력이나 영향력 등을 가리
킨다. 한편 이 단어는 주로 같이 연결하여 쓰여졌다(요 4:48 ; 행 2:22 ; 4:30
; 살후 2:9 ; 히 2:4). 물론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이같은 능력을 발
휘하기는 하지만 그 능력 자체가 하나님의 그것과 비교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흑암의 권세잡은 자, 곧 사단도 악의적 측면에서 이런 능력을 행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ㅇ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이 말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
짓 선지자들이 먼저 택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활동함을 암시한다.그리고
가능하면 택하심 받은 이들도 속이려 한다는 것이다. 공동 번역 성서는 그 의미
가 더욱 명료하다. 즉 '어떻게 해서라도 뽑힌 사람들마저 속이려고...'라고 번역
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이 선택받은 사람들을 속이려하는 의지를 강화시
켜 주고 있다. 한편 본문의 '할 수만 있으면'(에이 뒤나톤)이란 미혹하는 이들의
의도를 나타내는 말로서, 만약 가능 하기만 하다면,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심지어 선택받은 자도 미혹(迷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분
명한 것은 이 말이 성도들을 '반드시' 미혹시킬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공 여
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만약 택한 자, 곧 예
수의 참 제자들이 말씀과 기도로 단단히 무장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공략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엡 6:10-18).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ㅇ내가...미리 말하였노라 - 예수께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경고하신 것은
경각심을 일깨워 주고 그들로 담대하게 하려고 할뿐 아니라(요 16:4) 자기 자신
에게 있는 초월적 권위를 소개하기 위함이다(신 13:1-4 ; 요 14:29).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ㅇ광야 - 여기서는 23절에서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여기저기에 있을
것이라는 말과 연결하여 구체적인 장소를 제시하고있다. 이 의도에 대하여는 27
절의 주의 재림에 대한 언급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향편 '광야'는 전통적인 유
대 관념에 의하면 메시야 도래의 공개적 장소로 이해되었으며, 예언자들의 활동
무대가 되어 왔고 세례 요한 역시 '광야에 외치는 자'라는 칭호를 얻었다(3:3).
또 광야에서 수도원 운동과 같은 엣세네파 공동체가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요
세푸스의 보고에 의하면(Jos, Wars, 5.7)많은 사기꾼들이 광야를 주무대로 백성
들을 미혹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본문의 골방은 좁고 밀폐된 비밀 장소를 의
미한다. 그러나 이같은 특정한 장소에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대중적이고도 집단적인 단체나 집회에 주의 재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은밀
한 개인이나 특정한 장소에서도 마찬가지로 주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ㅇ주의 재림이 어떻게 임할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신다.
ㅇ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 이 비유는 세가지 의미로 이해
할 수 있다.(1) 주의 재림이 인간의 지혜와 판단으로는 도저히 예기치 못했던
시점에 갑자기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돌발적인 재림 시기는 44절에도
언급되고 있다. 또 25장의 비유들 속에서도 재림시 급작성과 돌발성이 잘 나타
나고 있다. (2)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번개가 순식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나
타나듯이 주의 재림도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Weiss, Broadus). (3) 재림
의 선명성(鮮明性)이다. 은밀하거나 교묘한, 그리고 모호하여 아리송한 형태로
재림하지 않고 번개의 섬광처럼 분명하고, 단호하게, 그리고 엄격한 방법으로
모두가 공히 인지할 수 있는 모습으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 이와같은 재림에 대
한 선언은 앞에서(5, 23, 24, 26절) 묘사된 거짓 그리스도나 선지자의 소문을
단호히 거부하며 그 거짓된 실체를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25절에
서 자신있게 그리고 선언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한다'라고 말씀 하시면
서 속지 말라고 권면하셨다(26절)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ㅇ하늘의 권능 - 하늘의 모든 천체들.

30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ㅇ29-31에서는 예수의 초림이 비밀성, 공간적 제한성, 소박성이 특징이라면
재림은 공개성, 공간적 무제한성, 영광의 광휘성 등이 그 특징이다. 그리고
이 재림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ㅇ나팔소리 - 재난을 알릴 때, 사람들을 불러모을 때, 절길를 알릴 때, 유대
인들이 사용하던 신호다(출 19:13)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앞에 이른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35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ㅇ재림 시간 - 예수 재림이 지니는 특징을 보면 하나님만이 예수 재림 시간을
아신다. 따라서 인간은 영적 긴장을 하며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잊고 현실 세계에 집착한 자에게는 갑작스럽게 임할 것이다. 깨어 있는
자는 그 시점은 모른다 해도 징조를 읽을 수 있다. 그때로부터 영생과 영벌의
세계가 완연한 구별될 것이다.

ㅇ두 여자가 매를 갈고 - 유대에서는 두 여인이 마주 앉아 매를 간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ㅇ깨어 있으라 - (헬. 그레고레이테) '계속적으로 깨어 있는 생활을 하라'는 명
령어.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ㅇ경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필라케'는 파수병들이 교체하는 시간을 가리
킨다. 로마군들은 밤시간에 네 번 교대했는데. '1경'은 3시간씩이었다(유대인은
3회 교대했음)
ㅇ집을 뚫지 - 지붕의 기와를 벗기고 침입하는 것을 가리킨다.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ㅇ지혜있는 종 - 종의 신분으로서 집안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를
가리킨다.

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ㅇ술 친구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메튀온톤'은 직역하면 '술취한 자
들'이다. 이것은 육신의 욕망대로 술취함과 방탕에 빠져 살아가는 불신적인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50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ㅇ엄히 때리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코토메세이'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두조각을 낸다'이다.
ㅇ율 (헬. 람파스) 등잔'(막 4:21)이나 '초롱'(요 18:3)과 드르다. 막대기 끝
에 기름 먹인 헝겊을 달아 매어 사용하던 횃불을 가리킨다.
ㅇ42-51절에서는 종말을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5가지 비유로
설명한 것 중 도적 비유와 충성된 종 비유가 소개된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춘천 대우인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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